성경에 모든 답이 있다

송명헌목사<소명교회>

스탠다드 오일이라는 미국의 정유회사가 이집트에서 원유를 생산한다고 한다. 그 회사의 중역이 성경을 읽다가 출애굽기 2장에서 레위 여자가 아기를 낳았는데 ‘사내 아이는 모두 죽이라’는 바로의 명령 때문에 아이를 키울 수 없어 갈대로 상자를 만들어 역청을 발라 나일강에 띄웠다는 기사를 보았다. 이 회사에서는 역청이 있다는 그곳에 가서 지질 탐사를 한 결과 유전을 발견했다는 이야기다.

“성경에 모든 답이 있다” 는 말이 성경을 잘 읽으면 유전을 발견한 것과 같은 모든 성공 스토리의 열쇠를 얻는다는 말일까? 그런 말은 아니다. 그러나 분명히 성경에는 우리 인생의 모든 문제의 답이 있다.

왜냐하면 성경은 인간의 모든 문제를 다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 모든 문제를 두고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하시는지 알면 그 문제의 답을 얻을 수 있다.

창세기에 요셉 이야기가 있다. 이복 형제간의 갈등이 있고 부모의 편애가 있다. 요즈음 표현으로 하면 온갖 역기능 가정의 모순들이 첩첩이 쌓여있다.

편애 받던 요셉이 형들의 시기와 질투로 인하여 팔려가서 노예가 된다. 노예로서의 삶도 순탄하지 않다. 주인 아내의 모함으로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옥살이를 한다.

요셉의 삶은 인신매매, 성추행, 학대, 부당한 재판, 배신 등, 고통 가운데 던져지고 잊혀진 삶이었다. 그 모든 고통스럽고 억울한 삶의 과정을 성경에서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하였다(창세기39:2, 23).” 라고 표현하고 있다.

성경은 겉으로 드러난 현상의 배후에 있는 참된 본질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요셉은 그 모든 과정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하였다. 요셉이 총리가 되기 전에 그는 형통하였다.

총리가 된 것도 그가 잘 먹고 잘 살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야곱의 자녀들 70명으로 시작해서 200만 이스라엘 백성으로 번성할 때까지 위협하는 대적이 없이 안전한 애굽 땅에서 그들을 배양하고 양육하는 인큐베이터로 삼으신 하나님의 계획이었다.

우리는 삶을 위협하는 수많은 위기 가운데 살고 있다. 그 어떤 위기에서도 우리가 요셉을 생각하면 용기를 되찾을 수 있다.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같고, 부당한 처우와 불공정이 넘치는 상황에서 우리가 좌절하고 패배하지 않고 승리할 수 있는 비결을 이렇게 여러 성경 인물과 사건에서 찾을 수 있다.

대학교 2학년 때, 선배 한 사람이 내게 자기가 보던 성경을 건네 주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여기에 우리가 풀고자 하는 모든 문제의 답이 다 들어있다. 이것을 읽어봐라.”

그때는 80년 여름, 광주 민주화 항쟁으로 많은 사람이 희생된 후 학교는 휴교를 하였고 모두가 숨죽여 엎드려 있던 때였다. 시간이 있어 도전해볼 만했다. 그런데 너무 어렵고 지루하고 재미없었다.

그러나 인류 역사의 절반인 서구역사가 기독교 역사라는 생각을 하면서, 또 거기에 모든 답이 있다니까 억지로 읽었다. 그때 읽은 내용은 사실 기억나는 것이 없다.

단 한 가지 “용서하라”는 메시지만 기억에 남는다. “어떻게 용서할 수 있지? 사람이 어떻게 용서하며 살 수 있을까?” 하는 질문과 함께.

세월이 흐르고 나는 목사가 되었다. 성경의 내용으로 매주 여러 번 설교를 하고, 성경의 내용을 요약하고 정리하여 가르치며 산다. 솔직히 내게 성경은 무척 어렵다.

말씀을 깨닫게 해 주시기를 늘 기도하며 읽지만 쉽지는 않다. 내가 어려우니 다른 사람들도 어렵겠지. 그래서 내가 연구하고 기도하여 얻은 답을 나누는 것이 무척 기쁘고 보람 있다. 그러나 사람들이 성경에 있는 답을 알지 못하면서 갈망함이 없으니 안타깝다.

내게 성경을 건네준 그 선배도 지금 교회를 떠났다. 나는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안다. 성경에는 분명히 우리 삶의 모든 문제에 답이 있다. 우리가 추구하는 모든 가치가 담겨 있다.

우리 조국 대선 국면에서 후보들의 화려한 공약들을 보면서 파라다이스를 꿈꾼다. 과연 파라다이스를 꿈꾸는 것은 어리석은 일인가? 성경은 파라다이스가 있다고 말하고 파라다이스의 회복을 말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소원이기 때문이다.

래리 크랩이라는 사람은 성경을“하나님의 러브 레터”라고 표현하였다.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기록하고 있다. 어떤 분은 휴머니즘이 기독교 신앙의 가장 큰 적이라고 한다. 그렇지 않다. 성경만큼 강렬하게 휴머니즘을 말하는 것이 없다.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신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들을 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셨다. 인간 안에 하나님이 있다. 인간이 범죄하고 불순종하여 멸망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 그 타락한 인간을 살리기 위해 몸소 십자가를 지셨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해방시킨 후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 하나님의 나라를 만드셨다. 그리고 십계명과 언약법들을 주셨다. 율법이라 말하는 이 계명들은 사람들을 옭아매는 오랏줄이 아니다. 하나님 나라의 청사진이다.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고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삶의 모습이다. 서로 생명을 지켜주고 인격을 존중하며, 소유와 가정을 보호하며 진실하게 사는 모습이 다름 아닌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 사는 모습이다. 문제가 있으면 하나님께 질문하라. 그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답을 성경에서 받으라.

성경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답을 얻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 첫째는 성경을 늘 묵상하는 삶이다. 시편 1편에서 시인은 “복 있는 자는 …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 묵상하는 자로다” 라고 하였다. 율법을 묵상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했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잎사귀가 마르지 않는 것처럼 모든 일에 형통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할 때 그 말씀 속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을 분별하여 읽을 수 있다.

둘째는 성경을 정확히 읽어야 한다. 성경을 내 기분이나 내 필요에 따라 읽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어느 순간 성경은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고 느끼게 된다.

객관적인 이해 없이 주관적으로 은혜 받는 것에만 초점을 맞추면 한 순간에 성경 말씀의 신뢰성의 기반이 무너질 수 있다.

성경에 기록된 내용을 객관적으로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경을 두 단계로 구분하여 읽어야 한다. 첫번째 단계는 이 기록된 상황에서 하나님은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What did it mean?)를 아는 것이다.

두번째 단계는 그 말씀이 오늘 이 성경을 읽고 있는 나에게 무슨 의미를 갖는지(What does it mean?)를 아는 것이다. 첫번째 단계를 잘 파악하기 위해서는 성경을 찬찬히 깊이 읽는 정독이 필요하다. 사전이나 주석서를 참고할 수도 있다.

두번째 단계는 깊은 묵상으로 주님의 마음을 구하는 것이다. 첫번째 단계 없이 두번째 단계로 바로 가게되면 자기 내키는 대로 느끼고 누릴 뿐 객관성이 없다. 두번째 단계 없이 첫번째 단계에만 머물면 죽은 신앙에 머물고 만다.

성경에는 모든 답이 있다. 좋은 질문을 하는 사람에게 좋은 답을 주신다. 질문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답을 주지 않으신다. 답 없는 세상에서 답 있게 살아보자.

날마다 성경 묵상을 하는 가운데 주님의 마음을 더 깊이 알고, 말씀 가운데 숨겨놓으신 주님의 비밀을 다 누리기를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