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전래된 성경의 발자취

김영수목사<파라카이예수사랑교회>

사도행전 1장 8절의 말씀대로, 주님의 제자들은 마가 다락방에서 오순절 성령을 체험한 후에 성령의 권능을 받고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사역을 감당하였다. 복음을 전해 듣고 믿은 사람들 중 몇몇은 다른 나라들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데 온 힘을 다하는 가운데, 진리 되신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구원의 소식이 땅 끝까지 점점 전파되어갔다.

그 땅 끝이 어디인가? 2000년전 주님의 제자들이 활동하였던 예루살렘으로부터 당시 지역상으로는 지구상 동쪽 끝 한반도가 땅 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흑암의 땅 한반도에 성경은 어떻게 전해졌는가.

초기 한반도의 복음전래
오래 전 서기 635년부터 845년, 통일신라 시대에 당나라를 통해서 경교가 한반도에 전래되었다고 일부 학자들이 말한다. 서기 1253년에는 몽고를 통해서 로마 선교사인 ‘루브루크’에 의해 고려(Core’e)시대에 카톨릭이 접촉되었다고 하며, 조선시대인 서기 1592년과 1598년도 임진왜란과 정유왜란 당시에는 일본군의 종군신부인 ‘세스페데스’가 조선에 참전했다는 기록이 있다.

1627년과 1653년에는 당시 기독교 국가였던 화란인 ‘벨트브레’(박연)와 ‘하멜’이 무역하던 배가 파선되어 조선에서 활동한 일이 있었다.

18세기는 한국 천주교 형성기로 실학운동이 왕성하였고, 이승훈(세례명; Peter)이 중국에서 세례를 받은 해인 1784년부터 1884년까지 100년 기간을 조선시대의 ‘천주교 선교세기’라고 부른다.

조선 조정에서는 1784년 4월에 천주교도에 대한 박해를 시작하여, 1791년(신해박해)와 1801년(신유박해)에는 외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조선에 선교사로 와있던 중국인 주문모 신부를 비롯하여 천주교도인 수 천명이 신분고하를 불문하고 죽임을 당했다.

이런 박해 가운데서도 천주교 일부 지도자들은 ‘텬쥬공경가’, ‘성교요지’, ‘성교전서’, ‘쥬교요지’ 같은 신앙서적을 저술하여 민간에게 널리 알렸다.

1815년부터 1839년(기해박해)과 1866년(병인박해)까지 조선 조정에서는 천주교도에 대한 박해를 계속하여 수많은 천주교도들이 죽임을 당했다. 1845년에는 중국에서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신부가 된 ‘김대건’ 신부가 평안도 의주로 월경하여 활동하던 중 발각되어 그 이듬해에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순교하면서도 전달한 성경과 존 로스의 한국어 성경
개신교 선교사인 영국인 로버트 토마스 선교사는 1866년 제너럴 셔먼호를 타고 대동강을 따라 올라오다가 순교를 당했다. 토마스 선교사는 죽는 순간까지도 주변의 조선인들에게 한문 성경을 나누어 주었다. 이 성경으로 인하여 조선 평양에 최초의 교회인 널다리골 예배당이 설립되었다.

1872년에 만주지역에서는 스코틀랜드 연합장로교 소속인 존 로스(1841~1915)와 존 매킨타이어(1837~1905) 선교사가 한국선교를 위한 체계적인 선교준비를 진행하고 있었다. 존 로스 선교사는 압록강 상류 부근까지 가서 한 사람의 한인에게 한문 성경 몇 권을 전하고 돌아왔는데 수년 후에 여러 명의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

또한 존 로스는 1874년에 한중 국경에 있는 고려문에 가서 노방선교와 설교를 하며 한국어 성경을 제작하기 위해 노력하던 중에 의주 출신인 이응찬을 만나게 되었다.

이응찬은 존 로스의 한국어 어학선생이 되는 한편 백홍준, 이성하, 김진기 세 명의 의주 청년과 함께 존 로스의 한국어 성경 번역 작업에 협력하였다.

1879년 네 사람 모두 메킨타이어 선교사에 의해 세례를 받게 되었으며, 또한 같은 해에 만주 우정에서 존 로스 선교사에 의해 서상륜이 1883년에는 김청송이 세례를 받았다.

1878년에는 존 로스와 이응찬 김진기 백홍준 공역으로 누가복음 초역이 완료되었고, 1879년에는 복음서와 사도행전 그리고 로마서 원고가 작성되었다.

1891년에 존 로스는 매킨타이어가 수정한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을 검토하여 최종원고를 완성하고, 1881년에 스코틀랜드 성서공회로부터 지원을 받아 인쇄소를 봉천에 설치하여 한글로 된 첫 개신교 문서인 “예수성교문답”과 “예수성교요령”을 인쇄했다.

이듬해인 1882년에는 첫 성경인 “예수성교 누가복음전셔”와 “예수성교요안니 복음전셔”를 발행했다 이후 1887년에는 신약 전권인 “예수성교전셔”가 완간되었다.

일본에서의 이수정의 성경번역
이와 같이 중국에서 존 로스와 몇 명의 한국인에 의해 복음이 준비되고 있는 동안 일본에서는 이수정에 의해서 복음이 준비되고 있었다. 이수정이 40세 되던 해 1883년에 미국 선교사 조지 낙스(George William Knox) 에게서 세례를 받은 소문이 퍼지자 일본에 와있던 외국 선교사들에게 한국 선교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일본주재 미국 성서공회 헨리 루미스(Henry Loomis) 선교사로부터 한국성서 번역을 의뢰받은 이수정은 작업에 착수하여 1883년 7월 30일에 요한복음 일부가 인쇄되어 미국 성서공회 본부에 보내졌다.

한문성경에 토(주석)를 단 현토성경<신약성경 마가전>이 1884년 11월에 출판되었고, <현토한한신약전서>가 1887년에 출판되었다.

이수정은 모든 조선 사람들이 쉽게 읽을 수 있는 성경으로 1884년 4월에 완성하여 다음해 2월에 <신약 마가복음서언해> 1천부를 발행했다.

1885년 4월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제물포에 도착했을 때 이 성경을 가지고 왔었다. 이어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 번역도 완성했으며, 이수정의 번역은 로스 역본과 함께 한글성경 번역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번역 초본들이었다.

한국의 선교는 성서 번역에서부터 출발했으며 한국인에 의해서 스스로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점이 특징이며, 또한 교회가 한국인 스스로에 의해서 자립의 틀을 형성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선교사들이 한국에 입국하기 전에 이미 개신교 신자들이 국내에 생겨나고 있었고, 회심한 이들이 여러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었으며, 성경이 대량으로 반포되고 있었고, 그리고 특별한 것은 기독교가 만주에 흩어진 한인들 사이에 놀랍게 확산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만주지역에서는 1895년 한국인에 의해 교회 건축이 이루어진 이후, 무려 1,500개의 교회가 건립되었으며, 복음을 접한 한국인들은 매서인이 되어 자신들의 고향으로 돌아와 복음을 전하면서 복음은 한국인들 사이에 조용히 저변이 확대되었다. 이러한 성경번역과 전달은 오늘날의 한국복음화의 밀알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