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의 제목이 <두루의 중동과 아시아 모험>인 이유는 여행했던 국가의 대부분이 바로 ‘아시안 하이웨이’ 노선 안팎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선교적 관점으로는 ‘10/40 선교의 창’에 속한 국가들이 여행지의 대다수였다. 21세기 실크로드라고도 불리는 ‘아시안 하이웨이’는 아시아 32개국을 육로로 연결하는 세계 최장거리의 육로 교통 네트워크다.
AH1노선과 AH6노선이 대한민국과 북한을 가로질러 중국, 러시아, 중앙아시아, 동남아시아, 인도, 터키를 지나 중동과 유럽 끝까지 육로로 연결되는 그 날이 언젠가 올터인데 그 날이 실현되기 위해선 지금은 반으로 나뉘어진 한반도 코리아땅의 허리가 회복되는 것이 절실하다.
남북한이 하나되어 이 길을 통해 함께 땅끝까지 나아가는 꿈을 꾸면서 이 시대에 나를 아시안, 한국인, 남한사람, 서구문화권 안의 유학생, 이민자 디아스포라, 그리고 이 땅 가운데 하나님 나라가 임하길 소원하는 그리스도인 청년으로 불러주신 하나님의 택하심에 대하여 스스로 질문하며 70리터 배낭을 뒤에 메고, 30리터 배낭을 앞에 메고, 23개국을 388일 동안 약 114, 000킬로미터를 혼자 떠난 한 평범한 뉴질랜드 코리안 디아스포라 청년의 이야기를 25회 연재를 통해 나누고자 한다.
‘아마르’ 통해 16억 무슬림을 새롭게 보게 돼
“두루(Drew), 그런데 왜 그렇게 길게 여행중인 거야? 특별한 목적이라도 있는거야?”
“하나님 아버지 마음을 더 알고 싶어서. 나를 사랑하시듯 온 세계 모든 나라 사람들을 사랑하시는 내가 믿는 하나님 말이야”
새하얀 눈으로 가득 덮힌 창밖의 풍경이 차갑기보다는 포근하게 느껴지는 한적한 오후였다. 아시안 하이웨이(Asian Highway)의 서쪽 끝자락에 있는 나라, 터키의 수도 앙카라에 도착한지도 5일이 지났다.
지난 5일간 호스텔 방을 나눠쓰며 나의 친구가 된 스물두살의 시리아 청년 아마르에게 내가 여행하는 진짜 이유, 그리고 내 삶에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한 가지를 나누고 싶었다. 내일이면 사도바울의 고향 다소로 이동해야하기 때문에 아마르와 함께하는 날은 오늘이 마지막일지 모른다.
“이전에는 ‘하나님, 부처님, 예수님, 공자, 알라’의 이름을 다 불러가며 기도한 적도 많아. 그런데 어느날 하나님이란 분이 성경책 속에 갇혀있는 분이 아니라 실제로 살아계시고 말씀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았어. 내 멋대로 살아왔던 나를 끈질기게 사랑하시고 기다리시는 분이란 걸, 히 워즈 리얼!(HE was real!) 눈물을 펑펑 쏟았지. 하나님과 상관없이18년을 살다가 단 하루도 쉬지않고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셨던 하나님 아버지 품으로 그날 밤 드디어 돌아간거야!”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내 이야기를 온몸으로 경청하는 아마르의 반짝이는 눈동자에 힘을 얻어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신 성경구절을 펀치라인으로 인용하며 이 분위기를 더욱 드라마틱하게 이끌어가고(?) 싶었다.
“Jesus answered,“I am the way and the truth and the life. No one comes to the Father except through me.” (John 14:6)
“그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나를 만나주신 거야! 내가 잘못 알고 있던 종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사랑의 하나님, 나를 인격적으로 만나기 원하시는 살아계신 예수님을 만나게 된거지!”
그때였다. 20분이 넘도록 단 한번도 말을 끊지 않고 내 이야기를 듣고 있던 아마르가 입을 여는 순간!
“아이 노우 하유 퓔~~! (I know how you feel!). 나도 그 맘 알아!”
“응? 뭐라고…? 이슬람이 꽉 잡고있는 시리아와 사우디아라비아에서 평생을 무슬림으로 살아온 네가… 예수님을 만나고 감격에 겨워하는 내 맘을 안다고…?”
당혹스러움과 의아함에 사로잡혀 혼잣말을 하고있는 내 앞에서 아마르는 자신의 인생이야기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난 시리아 알레포(Aleppo)에서 태어날 때부터 무슬림이었어. 내 아버지, 할아버지, 할아버지의 아버지 때부터 온가족이 다 무슬림이었으니까. 그런데 청소년기를 거치면서 내가 믿고 있는 이슬람이라는 종교가 너무 가식적으로 느껴지기 시작했어. 알라를 믿는다고 말은 하지만 나도, 내 주변 사람들도 왜 이렇게 밖에 못살까 회의감이 들었어.
내가 18살 되던 해에 너도 알다시피 시리아 상황이 갑자기 나빠졌어(2011년 시리아 내전) 곧 우리 가족은 사우디아라비아로 거처를 옮겼지.
사우디에 가서 생애 처음으로 하지 메카 성지순례를 가게 됐어. 메카 한가운데 있는 카바 (메카 중심부에 위치한 이슬람 예배와 순례의 중심) 주위를 기도하면서 천천히 돌고 있었는데…
이전에 느껴보지 못했던 신비롭고 강력한 무언가가 내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데 그때 처음 깨달았어. 아! 알라가 진짜 살아계신다! 알라는 진짜다! 지난날 방탕하게 살아왔던 과거와 내가 저질렀던 잘못들을 회개하면서 펑펑 울었지. 그날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해”
“아…”
어떻게 이 친구의 그릇된 확신에 대해 받아쳐줄까 속으로 고민하고 있던 찰나… 순간 내 마음 가운데 잔잔하고 인자한 음성이 들리는 것 같았다.
“방금 네 입으로 이 친구에게 말하지 않았니? 18년이란 세월 동안 네가 나를 모른체하며 다른 신들의 이름을 불러가며 기도하던 때에도 나는 한순간도 너를 버린 적이 절대 없었다고?”
“엇… 제가… 그렇게 말했죠…”
“그럼 내가 이 친구를 절대 포기하지 않고 있다는 것도 알겠네? 친구가 되어서 친구가 살아온 이야기 5분을 못 들어주겠니? 그가 살아왔던 이야기를, 들어줄 수 없겠니? 난 매일 그 옆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머리를 쾅~ 쎄게 쥐어박히는 느낌이었다. 내가 가진 경험과, 지식과, 교육되어온 기독교적 세계관 안에서 이 친구가 하는 이야기는 다 뻥으로 밖에 안들렸다.
그러한 생각이 내 안에 들어오자마자 아마르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은 ‘내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시리아 친구 아마르’에서 ‘잘못된 믿음을 가진 이슬람 교도 아마르’로 바뀌었고 기분좋게 삶을 나누던 ‘열린 대화’는 ‘종교의 대립’으로 변신해 있었다. 불과 5분 사이에 말이다. 나는 이 친구의 경험과 생각을 부정하고 있던 것이다.
“너의 친구라고 했잖니. 그냥 그가 살아왔던 이야기를 들어줄 순 없겠니?”
아마르가 지금 어떻게 생각하고 느끼고 있든지 예수님은 단 한 순간도 아마르를 포기하신 적이 없었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 그 이후로 1년이 지났지만 그 친구와의 대화는 아직도 이어지고 있다. 지금은 독일로 거처를 옮겨 새로운 문화속에서 새로운 도전을 하고 있는 아마르.
아마르를 통해 ‘하나님이 이토록 사랑하신 세상’과 16억의 무슬림들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악한 영에 사로잡힌 우상숭배자가이기 이전에, 하나님이 간절하게 짝사랑하며 기다리고 계신 포기할 수 없는 한 사람으로 바라보는 눈.
전도와 선교의 결과로 개종시켜야할 대상이기 전에, 관심과 사랑으로 알아가야할 우정과 사랑의 대상으로, 친구로, 이웃으로 바라보는 눈을 선물해준 아마르. 슈크란!(아랍어‘고마워’)
“전쟁 가운데 비참하게 폐허가 된 너의 아름다웠던 고향땅 알레포가 속히 재건되기를 오늘도 기도할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