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시록의 종말론적 전쟁

곡과 마곡
‘곡과 마곡’은 신약에서 요한계시록 20장 8절에 아무런 설명 없이 단 한 번 등장하고 사라지는 이름이다. 하지만 곡과 마곡이라는 이름은 허공에서 튀어나온 이름이 아니다. 마곡은 노아의 아들 야벳의 후손 이름으로 처음 등장하고(창 10:2), 곡이라는 이름은 르우벤 지파의 한 사람 이름으로(대상 5:4) 짧게 언급되고 있다.

그러나 곡과 마곡은 묵시 전통 속에서 종말론적 심판의 대상으로 에스겔서 38장과 39장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에스겔은 마곡 땅의 왕으로 북방의 통치자인 곡이 종말론적 침략을 감행할 것을 예언하며, 이 침략이 하나님의 주권적 개입 아래 오히려 하나님의 승리로 귀결될 것을 선포한다.

요한은 이 에스겔의 예언을 “그 곡과 마곡”이라는 정관사가 붙은 형태로 결합해 사용함으로써 자신이 지금 그려내고 있는 전쟁이 특정 지리적 실체나 민족이 아니라 오랜 유대 전통 속에서 종말에 파괴될 하나님의 대적 전체를 가리키는 상징적 이름임을 드러낸다.

다시 말해 곡과 마곡은 애초부터 지도 위에 표시할 수 있는 나라의 이름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을 대적하여 마지막 날에 모여드는 모든 악의 세력을 가리키는 신학적 명칭이다. 이를 놓치는 순간, 우리는 계시록이 결코 의도하지 않는 방식으로 이 본문을 정치적 군사적 종교적 수단으로 오용하게 된다. 이 본문이 실제로 말하고자 하는 답을 찾기 위해서는 먼저 에스겔서로 돌아가야 한다.

에스겔서의 곡의 전쟁과 여호와의 이름
에스겔 38장과 39장에서 예언되는 곡과의 전쟁은 시작부터 심상치 않다. 하나님은 친히 “내가 너를 대적하여 너를 돌이켜 갈고리로 네 아가리를 꿰고”(겔 38:3~4)라며, 곡이 이스라엘을 치도록 이끄시겠다고 말씀하신다. 전쟁의 시작 자체가 인간의 계획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 결정에 달려 있다는 뜻이다. 강대한 군사력을 지닌 마곡 땅의 곡이 힘없는 이스라엘을 공격하러 오지만, 이 전쟁은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여호와의 완벽한 승리로 결말이 정해져 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전쟁의 목적이다. 에스겔서는 이 승리의 목적을 반복적으로 “내가 여호와인 줄 알게 하리라.”는 문구로 명시한다. 이 문구는 이른바 “여호와 인식 공식”이라 부르는 표현으로 38장과 39장에서만 다섯 차례(겔 38:16, 23; 39:7, 22, 28) 등장하며 각 단락을 마무리하는 후렴구처럼 기능한다. 이는 에스겔서에서 하나님을 행동하게 만드는 근본 동기가 다른 무엇도 아닌 그분 자신의 거룩한 이름에 대한 열심임을 분명히 보여준다.

왜 하나님의 이름이 이토록 중요한가? 에스겔서의 문맥을 보면 그 답이 드러난다. 이스라엘은 성전 안에서까지 우상숭배를 행함으로써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스스로 더럽혔다. 그 결과 하나님은 성전을 떠나셨고, 이스라엘 백성은 이방의 포로가 되었다. 하나님 자신의 백성에 의해 짓밟히고 무시당한 그 이름은 성전이 무너지고 백성이 포로로 끌려가는 과정에서 이방 민족들의 눈앞에서도 철저히 짓밟혔다.


그러나 여호와의 거룩한 이름은 계속해서 짓밟힌 채로 머물러 있을 이름이 아니다. 하나님은 가장 막강한 군사력을 지닌 마곡의 왕, 곡의 마음을 친히 일으켜 이스라엘을 치게 하시고, 그 전쟁을 통해 오히려 이방 민족들의 눈앞에서 자신의 거룩함과 위대함을 드러내신다. 곡의 전쟁은 결국 이스라엘에 대한 긍휼이나 자비를 넘어, 더럽혀진 여호와의 이름을 만방 앞에서 회복시키는 하나님의 이름 회복 전쟁인 것이다.

이 신학적 얼개를 이해하고 나면 계시록 19장과 20장의 전쟁 본문이 왜 그토록 집요하게 에스겔서를 소환하는지가 눈에 들어온다. 계시록 19장 11절부터 21절은 백마를 탄 자, 곧 재림하시는 그리스도의 전쟁을 그린다. 이 장면에서 요한이 가장 공들여 강조하는 것은 다름 아닌 ‘이름’이다. 그리스도는 “충신과 진실”이라 불리고, “하나님의 말씀”이라 불리며, 마침내 “만왕의 왕, 만주의 주”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이 세 가지 이름은 구약에서 하나님과 그의 속성을 나타내던 명칭들이다.

그리고 이 이름을 지니신 분이 전쟁을 수행하신 결과, 짐승과 거짓 선지자를 따르던 세력들은 참패하여 공중의 새들에게 시체로 내어주어지는데, 이 장면은 에스겔 39장에서 곡의 군대가 새들과 들짐승의 먹이가 되는 그림과 정확히 겹친다. 계시록 20장 7절부터 10절에서는 이 전쟁의 모티프가 다시 한번 곡과 마곡이라는 이름을 직접 언급하며 반복된다. 두 본문 사이에 세부적인 차이는 있지만 둘 다 동일한 구약 본문을 근거로 삼고 있다는 사실은 이 두 전쟁이 결국 같은 신학적 실재, 곧 그리스도의 재림 때 이루어질 하나님의 최종적 심판을 서로 다른 각도에서 반복적으로 그려낸 것임을 보여준다.

여기서 우리는 이 전쟁의 성격을 분명히 해야 한다. 이것은 짐승의 군대와 그리스도의 군대가 대등하게 맞붙어 승패를 겨루는 전쟁이 아니다. 본문은 적대자들이 “전쟁을 하려고” 모였다고 말할 뿐 실제 전투 장면은 등장하지 않는다. 그들은 싸워보지도 못한 채 만왕의 왕이신 그리스도 앞에서 참패를 당한다. 이는 에스겔서에서 곡이 여호와의 갈고리에 꿰어 이끌려 오듯 처음부터 결과가 정해진 심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요한 계시록의 전쟁 본문을 특정 국가나 민족 간의 물리적 무력 충돌로 환원해 읽는 것은 본문의 의도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일이다. 곡과 마곡은 훨씬 더 우주적이고 보편적인 시각에서 읽혀야 할 이름이며, 이 전쟁은 인간이 자기 손으로 완성해야 할 성전(聖戰)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심판자로서 홀로 수행하실 거룩한 전쟁이다.

이름의 회복과 새 예루살렘
그렇다면 이 심판의 궁극적 목적지는 어디인가? 요한계시록은 20장의 심판 이후 곧바로 새 하늘과 새 땅, 그리고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환상으로 나아간다. 22장 1절부터 5절은 생명수의 강과 생명나무, 그 나무의 잎사귀가 만국을 치료하는 장면을 그리는데 이 이미지들은 에스겔 47장의 새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의 강 환상을 강하게 반영한다.

그리고 이 새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의 백성은 마침내 하나님의 얼굴을 마주하고, 그들의 이마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새겨진다. 이름이 이마에 새겨진다는 것은 단순한 표식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짐승을 따르던 자들이 이마에 짐승의 표를 받았던 것처럼, 하나님께 속한 백성은 이마에 하나님의 이름을 지님으로써 자신이 누구에게 속한 자인지를 드러낸다. 동시에 하나님의 이름은 그분의 성품을 나타내므로 그 영광스러운 얼굴을 직접 뵌 자들의 얼굴은 하늘 아버지의 형상을 고스란히 반영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계시록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신학적 궤적을 발견하게 된다. 19장 11절부터 16절에서 심판 주 그리스도께 붙여졌던 삼중의 이름과 22장 4절에서 구원받은 백성의 이마에 새겨진 하나님의 이름은 결코 별개의 장면이 아니다. 과거 이스라엘의 죄악과 불순종으로 인해 더럽혀진 여호와의 이름은 곡과 마곡을 향한 종말론적 전쟁을 통해 반드시 그 이름을 회복하며, 그 결과 하나님의 이름을 이마에 지니고 그 얼굴을 반사하는 백성들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마침내 온 열방 가운데 충만히 드러나게 된다.

이 흐름을 오늘의 시선으로 다시 읽어보면, 곡과 마곡 전쟁은 우리에게 두 가지를 동시에 요구한다. 하나는 겸손이다. 이 본문은 그 누구도 특정 국가나 민족을 곡과 마곡으로 지목하여 오늘의 전쟁에 신학적 정당성을 부여할 권리를 우리에게 주지 않는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지상의 물리적 전쟁을 정당화하려는 모든 시도는 정작 이 본문이 그리는 전쟁이 인간의 손으로 수행되는 전쟁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홀로 심 판자로서 행하실 전쟁이라는 사실 앞에서 무너질 수밖에 없다.

다른 하나는 위로다. 이 세상 곳곳에서 여전히 하나님의 이름이 짓밟히고, 그분의 백성이 압도적인 반대와 거부 앞에 놓여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계시록은 그 더럽혀진 이름이 반드시, 그것도 완전하게 회복될 것을 선언한다. 그 회복은 인간의 정치적 승리나 군사적 개가를 통해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 자신의 거룩한 이름을 건 결정적 개입을 통해 이루어진다.

결국 곡과 마곡 전쟁이 우리에게 남기는 메시지는 특정 종말론적 시간표를 계산하는 데 있지 않다. 그것은 압도적인 반대와 거부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의 권위와 그분의 백성을 향한 흔들림 없는 사이 마침내 확증되리라는 확신이다. 악에 대한 최종 심판과 성도의 완전한 구원은 결코 별개의 사건이 아니라 한 동전의 양면이며, 그 완성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백성은 마침내 그분의 얼굴을 마주하고 그 이름을 이마에 지니게 될 것이다.

오늘 우리가 국제 정세의 격변 속에서 곡과 마곡의 이름을 다시 마주할 때, 그 이름이 가리키는 것은 세상 어느 나라의 지도자나 국가가 아니라 언젠가 반드시 회복될 하나님의 이름과 그 이름 앞에 나아갈 우리 자신의 자리임을 기억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