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팀 구성 후 파키스탄으로

나의 첫 사역지는 파키스탄으로 1989년 12월에 시작되었다. 우리 의료팀의 구성은 두 의사, 네 명의 간호사, 검사실 기사, 방사선 기사와 행정 간사 9명, 결혼한 가족들과 함께 총 16명이었다. 팀의 구성은 한국 CCC 대표 김준곤 목사님이 파키스탄 CCC의 ‘자히르 우딘’ 목사의 의료선교팀 파송 요청으로 시작되었다. 김 목사님은 내가 종합 복음병원에서 일할 때 CCC ‘다운’ 의료팀을 통해 나를 부르셨고 나는 선교사로 서원하였기에 하나님의 응답으로 생각하고 즉시 수락했다. 목사님은 파키스탄에서 ‘노르웨이’ 기금으로 건축하다가 멈춘 종합병원을 인수하게 되어 많은 의료인이 필요하다고 하셨다.

그 당시 ‘다운’ CCC 의료팀에는 전문의가 적고 의대, 간호대와 약학대의 학생들이 많아 선교사로 파송 받으려면 학업 과정을 마치고 선교로 헌신한 사람이 필요했다. 목사님은 CCC의 행사인 원단 금식, 수련회, 여러 전도 집회에서 광고하도록 말씀하시어 몇 년간 나는 집회 때마다 청중들에게 호소했다. 하나님의 은혜로 외과 의사와 검사실 기사를 필두로 전국 CCC에서 16명이 모였고, 1989년에 부암동과 필리핀에서 선교 훈련을 마쳤다. 그동안 나는 병원 책임자인 ‘싸디크 와하브’씨와 병원 수리의 진전을 확인하기 위해 여러 번 국제 통화를 했고 두 번은 직접 답사했다. 그리고 우리는 동년 12월에 파키스탄으로 떠났다.

카라치에서의 이슬문화
처음에 도착한 카라치는 겨울이었지만 습하고 바람이 좀 불었고 그리 춥지는 않았다. 우리는 시내의 ‘메트로폴리탄’ 호텔에 머물렀는데 호텔은 남루하고 카펫은 낡고 냄새가 났다. 우리는 다음 행선지를 위해 1주일 이상 기다리면서 이슬람 문화를 접하게 되었는데 우선 눈에 띄는 것은 사람들의 옷차림이었다. 상의인 ‘까미즈’와 하의인 ‘샬와르’를 입고 여자들은 대부분 머리에 ‘히잡’을 쓰고 긴 목도리인 ‘두빠따’를 두르고 있었다. 우리는 한국에서 약간 배웠던 ‘우르두’어 인사인 ‘앗살람 알레이꿈’ (평안이 당신에게)으로, 또는 간단히 ‘슬람 지’로 만난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카라치에서 ‘씬드’ 지역인 ‘싸카’로 이동
카라치에서 멀라 북쪽 외곽에 위치한 ‘오랑기 타운쉽’에서 사역하기로 했으나 그 지역에 갑자기 내전이 생겨 매우 더운 ‘싸카’로 우선 이동하게 되었다. 거주할 곳은 기존의 긴 ‘방갈로’였는데 결혼한 네 가정과 싱글들을 위한 큰 공간이 만들어졌다.

언어 공부 후 현지인들과의 현실적 대화
우리가 머물 집이 확정된 후에 먼저 할 일은 언어 공부였다. 공용어인 ‘우르두’어는 문법이 한글과 같아 좋았으나 글자가 37자로 많고 글자가 지렁이 같은 모양으로 철자가 너무 비슷하여 단어 읽기가 쉽지 않았다. 언어는 각자 개인 교사를 통해 한 시간 반 배우고 복습으로 인해 매일 8시간 이상 공부했다. 나는 동네 어린이들을 만나 생활 언어를 습득하고 어감을 익혔다.

3개월 후부터는 새로운 단어들을 잘 외울 수 있어 언어가 재미있었고 6개월 후에는 일반인들과 대화가 가능했다. 하루는 골목길을 가다가 작은 수레에 귤을 가득 실은 노점상을 보고 다가갔다. 먼저 온 고객이 주인에게 킬로 당 얼마인가 물으니 3’루피’라고 했고 그는 구매 후에 떠났다. 나도 주인에게 얼마인가 물으니 두 배의 값을 불러 앞의 사람과는 왜 다르냐고 물으니 그는 답변을 못 했다. 내가 외국인으로 보여 앞 사람과의 대화를 이해 못 했을 것이라 생각한 것 같다. 나는 ‘바자르’(시장)에 가서 식품을 구매할 때도 이와 비슷한 일들이 생겨 구매하는데 번거로움이 있었다.

파키스탄의 물 사정
파키스탄은 어느 곳에서나 물이 석회질이어서 뿌옇고 물맛이 없었다. 우리는 석회를 제거하기 위해 백반을 사용하여 잠자기 전 마당에서 물을 드럼통에 채워 가스로 끓였다. 백반을 줄에 묶어 몇 번 물속에 넣다 뺐다 하여 물을 끓이면 아침에는 석회가 가라앉고 물은 맑아 하룻동안 마시기도 하고 샤워에 쓰기도 했다. 그 덕분에 우리 모두는 요로 결석으로 고생하는 일은 없었다.

‘싸카’에서 ‘카라치’의 선한 사마리아 병원으로
1년 반 동안 ‘싸카’에서 언어 공부 후에 소요가 진정된 카라치의 ‘오랑기 타운쉽’의 병원에서 사역하게 되었다. 카라치는 옛 수도로 이 나라에서 제일 큰 도시이고 수도는 북쪽의 행정 도시로 ‘이슬라마바드’가 있었다. 우리 팀원들의 집들은 치안이 안정된 시내의 클리프턴에서 세로 살면서 함께 출근할 작은 봉고도 구매했다. 병원 상태는 한국에서 두 번 답사 갔을 때보다는 아주 좋았다. 그 당시는 방글라데시 난민들이 살면서 밥을 짓느라 벽이 검게 그을리고 변을 아무 데나 보아 쓰레기장처럼 보였었다.

진료하는 선우형식 선교사

그러나 아직 진료하기에는 충분치 않아 오후에는 우리가 모은 십일조로 시멘트와 자재들을 사서 한동안 내가 직접 일꾼을 데리고 수리했다. 우리 의사 두 사람은 넓은 라운지에서 두 책상을 따로 놓고 환자들을 보았고, 처방전을 받은 환자는 라운지 코너의 약국에 가서 약을 받곤 했다. 약은 도매상에 가서 여러 종류의 약들을 싸게 구매하여 환자들에게 원가를 받고 약을 주었다. 언어는 그동안 열심히 익힌 덕분에 환자와 대화가 가능했고 설교를 위해 2년 이상 언어 공부도 계속했다. 병원에서 돌아올 때는 시장을 들러 ‘허니 멜론’의 맛과 같이 달면서도 길고 큰 “거르마’ 과일을 구매하곤 했는데 이는 마치 아이스크림을 먹는 느낌이었다.

병원 전도의 어려움
나는 전도를 하고 싶어 진료한 후에 ‘우르두’어 성경을 펴면서 읽기를 권유하곤 했고 환자는 기쁘게 읽어 주었다. 환자가 구절을 조금 읽은 후에 나는 읽기를 멈추게 하고서 그 구절을 설명해 주곤 했다. 혹시나 내용을 읽다가 성령님이 역사하시면 깨닫게 되기를 기대한 것이다. 그러던 중 자주 오던 한 아주머니가 와서 진료한 후에 준비한 요한복음 3장 16절을 펴고서 읽도록 부탁했다. 환자는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를 읽었을 때 나는 멈추게 한 후에 본문에서 ‘저’가 누구냐고 물었다.

그녀는 대답을 하지 않아서 ‘저’는 예수님이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했다. 그 환자는 설명을 듣는 순간 얼굴 빛이 변하면서 요셉의 아들을 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느냐면서 화를 냈다. 그리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약국으로 자리를 옮겨갔고 계속 큰 소리로 욕하면서 약을 받은 후 떠나갔다.

나는 걱정이 되었고 다른 동료들도 같은 마음이었다. 왜냐하면 경찰에 고발되면 나에게 문제가 될 뿐 아니라 병원이 문을 닫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행히 그 환자는 경찰에 고발하지 않았고. 병원은 계속 열 수 있었다. 그 환자는 그 후로 다시 오지 않았는데 나는 그녀가 너무 불쌍하게 여겨졌다. 나는 다시 같은 방법으로 전도할 수 없었고 무슬림 나라에서는 직접 복음 전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꿈에서 전도하도록 인도하신 하나님
어느 날 병원에서 진료받은 한 청년이 교회에 나오게 되었는데 이는 하나님이 꿈으로 알게 해 주시어 그를 인도하게 된 경우이다. 그때는 1993년 크리스마스를 두 달 앞둔 좀 추운 때였다. 나는 오전에 환자를 보고 있었는데 한 청년이 멀리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진료 시간이 마감되었을 때 그는 나에게 다가왔다. 그는 전에 몇 번 치료받기 위해 왔던 청년이었는데 나에게 우리 집이 어디인가 물으면서 방문하고 싶다고 했다. 나는 혹시 이 청년이 나를 해할 사람은 아닌가 하고 잠시 생각했다.

그런데 문득 어젯밤에 꾸었던 꿈이 생각났다. 그 꿈에 내 주위에 많은 양들이 있었는데 그중의 한 마리 양이 나에게 다가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양이 바로 이 청년인 것을 깨닫고 집의 약도를 그려 주었다. 그는 다음 주 평상적 공휴일인 금요일 오후에 우리 집을 방문했고 자신이 직접 짠 옷감을 선물로 가져왔다. 그는 방직 공장에서 천을 짜는 직공이었는데 가져온 무명 옷감은 나의 ‘까미즈’와 ‘샬와르’를 만들 수 있는 분량이었다. 그는 가난하게 보였는데도 귀한 옷감을 가져온 것에 대해 깊은 감동을 받았다.

나는 그와 교제하면서 성경 말씀을 나누었고 전도 책자들을 주었다. 그는 몇 번 더 우리 집을 찾아와서 교회에도 같이 갔으며 그에게 예수님을 통한 구원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곤 했다. 크리스마스 전날 밤에는 교회의 이브 행사에 같이 가서 교회 청년들과 교제하도록 했다. 그 후에 나는 파키스탄을 떠나게 되어 교회의 청년들에게 특별히 잘 보살펴 주도록 당부했고 청년에게는 ‘우르두’ 성경을 주면서 교회에 계속 나갈 것을 권유하고 아쉬운 작별을 나누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