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준비하고 계신 하나님

신앙적으로 너무나 부족한 내가 선교사의 길을 걷게 되리라고는 전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나는 선교사를 목회자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선택을 받아 특별한 훈련을 마쳐야만 하는, 말 그대로 ‘특별한 직분자’라고 여겼다.


그러나 지난 수년간 바누아투에서의 선교 사역을 돌아보면, 이 모든 과정이 나의 의지나 계획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오래전부터 치밀하게 준비하시고 인도하신 결과였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한때 세계에서 가장 가난하지만 행복지수는 높았던 남태평양의 섬나라 바누아투처럼 경제적으로 어렵고 의료 환경이 열악한 곳으로 나를 보내신 이유를 생각해 보면, 하나님께서는 내 삶의 이력 전체를 보시고 “그래, 이 사람이라면 견딜 수 있겠다.” 하시며 보내신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린 시절의 가난했던 가정환경, 대학을 마칠 때까지 겪어야 했던 극심한 생활고, 학업을 마친 후 제약회사에서 담당했던 교육 경력, 뉴질랜드 이민 후 토마토 농장을 운영하며 배운 농사의 기본, 그리고 농장을 접은 뒤 57세의 나이에 폴리텍에서 목수 과정을 수료한 일까지—이 모든 과정이 선교지에서 쓰임 받기 위한 준비였음을 이제야 깨닫게 된다.


원선희 선교사가 사역하고 있는 파키스탄 단기선교에서 길가에 쭈그리고 앉아 용변을 보는 사람들과 파리 떼가 새까맣게 앉은 음식을 처음 보았을 때의 충격, 간호사 출신의 김행란 선교사가 교회 건축을 총괄 지휘하던 피지에서 화장실에 놓인 물병의 용도를 알게 된 후 두루마리 화장지를 아껴 쓰게 된 경험도 나에게는 귀한 배움이었다.

그리고 ‘바누아투’라는 이름조차 생소하던 나라의 산토섬에서 사역하던 원천희 선교사의 요청으로 고산지대 부족 마을의 유치원 놀이시설을 만들어 주기 위해 청년부 팀과 함께 다녀온 단기선교는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아무런 준비도 되어 있지 않다고 생각했던 우리 부부에게 하나님께서는 그 길을 통해 선교사의 문을 열어 주셨다.

가난 훈련
오늘날 한국이 경제적 풍요를 누리게 된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지금의 30~40대 젊은 세대는 조부모나 부모 세대가 겪었던 극심한 가난을 잘 알지 못한 채 자랐을 것이다.


나 역시 말단 공무원이셨던 아버지 아래에서 8남매 중 셋째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가난한 환경에서 자랐다. 초등학교 시절, 도시락 반찬으로 늘 된장을 싸 주시던 어머니 덕분에 고추장을 싸 가는 것이 소원이었던 적도 있다.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는 중학생들을 그룹 과외로 가르쳐 학비를 벌고 가정 살림에도 보탰다. 이후 온갖 아르바이트를 하며 대학을 겨우 마칠 수 있었다. 겨울에는 기숙사 정문에서 군밤을 팔았고, 여름에는 아이스케이크를 팔았다. 방학 때는 스케이트장에서 스케이트 날을 갈아 학비를 모았는데 그 덕분에 지금도 부엌칼 가는 일에는 자신이 있다.


대바구니에 깨엿을 담아 당구장과 다방을 돌며 엿을 팔기도 했고, 주말에는 한국일보사에서 발행하는 ‘주간 한국’을 사서 가판 소년들에게 약간의 이윤을 붙여 넘기기도 했다. 중학교 입학시험 날에는 시험이 끝난 과목의 정답을 급히 등사해 학부모들에게 팔았던 적도 있다.


돌이켜 보면 이러한 어려운 환경 덕분에 남들이 쉽게 하지 못하는 다양한 경험을 통해 난관을 극복하는 법을 배웠고, 긍정적인 마음 자세를 갖게 되었다. 선교지에서는 가난한 원주민들의 형편을 이해하고 함께할 수 있었으며, 음식과 주거 환경이 열악해도 비교적 잘 견딜 수 있었다.


간호학교 졸업생이 살고 있는 작은 섬을 방문했을 때, 손님이 왔다며 방 한 칸짜리 오두막을 내주었는데 경사진 울퉁불퉁한 흙바닥 위에 풀로 엮은 돗자리가 전부였다. 그 아래에는 지네와 노린재들이 함께 ‘플랫메이트’로 살고 있었다.


산토섬 단기선교 때 함께 갔던 한 청년은 잠결에 겨드랑이가 따끔거려 손으로 만져보았더니 커다란 지네가 있었는데 그 지네에게 물려 통증과 불안으로 밤을 새운 적도 있다. 아침에 일어나 보면 아내의 몸에는 벼룩에 물린 자국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대나무를 쪼개 얼기설기 막아 놓은 벽 사이로 밤이면 모기들이 자유롭게 드나들었고, 화장실은 당연히 푸세식이었다. 현지인들은 뒤처리를 예전 우리가 볏짚을 쓰던 것처럼 나뭇잎으로 한다. 전기가 없는 산속 마을에서는 저녁 식사를 마치면 곧바로 잠자리에 들어야 했고, 바닥이 경사지다 보니 눕는 방향도 잘 정해야 했다.
그러나 이 모든 악조건 역시 어린 시절부터 받아온 하나님의 ‘가난 훈련’ 덕분에 넉넉히 견딜 수 있었다.

간호학교 교사로서의 훈련
뉴질랜드로 이민 오기 전, 사회생활의 첫 직장은 미국과의 합작 제약회사인 ‘한국화이자’였다. 항생제 테라마이신으로 잘 알려진 회사다.


영업 경험을 쌓은 후, 수의학을 전공했던 나는 교육 부서로 옮겨 직원들에게 커뮤니케이션 스킬, 동기부여, 세일즈, 리더십, 매니지먼트 등의 일반 관리 과목과 함께 인체 해부생리학, 미생물학, 약리학, 면역학, 질병 등을 가르쳤다. 교육을 마친 사원들은 의사와 약사를 상대해야 했기에 의·약학 전문인들과 대화할 수 있을 수준의 교육이 필요했다.


당시 사용했던 교재와 자료들은 모두 미국 화이자 본사에서 제작된 영어 자료였는데, 이것이 훗날 간호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바누아투에서 처음 맡은 사역은 한국 장로교회가 설립한 KORVAN 간호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이었다. 바누아투는 영어, 프랑스어, 토착어인 비슬라마어가 공용어이기에 학생들이 영어 교재를 이해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오히려 학생들의 영어 수준과 나의 영어 수준이 모두 ‘브로큰 잉글리쉬’였기에 서로 소통하는 데 더 수월했다. 혀가 너무 잘 굴러가는 원어민 영어는 오히려 이해하기 어려울 때도 있었다. 이민 생활 중 틈틈이 공부한 영어와 바누아투에 오기 전 독학으로 배운 비슬라마어를 섞어 사용하니 언어 문제는 거의 없었다.


간호 실습 과목은 호주와 뉴질랜드에서 온 자원봉사 간호사들이 맡아 주었고, 나는 이론 과목 전반을 가르칠 수 있었다. 이 모든 만남과 연결을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내일 죽을 것처럼 살고, 영원히 살 것처럼 배워라.” 잘 가르치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끊임없이 배워야 했다.

목수 훈련
1995년 이민 후 유니텍에서 원예를 6개월 공부하고 토마토 온실을 구입해 농사를 시작했다. 한국인 특유의 근면함으로 농사일이 즐거웠지만 대형 농장들이 늘어나면서 작은 규모의 낡은 농장으로는 수익을 내기 어려워졌다. 결국 9년 만에 농장을 정리하고, 마누카우 폴리텍에서 1년 반의 이론 과정과 3년의 현장 실습을 거쳐 목수 과정 레벨 4 국가 자격증을 취득했다. 목수 일이 이렇게 재미있는데 하나님께서는 이제야 알려 주시다니!


어느 날 구역예배에서 피지의 한 여자 선교사가 교회 건축을 계획하고 있으나 일꾼이 부족하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곧바로 목수 과정을 함께 수료한 두 명의 교인과 이발 기술을 가진 한 교인, 이렇게 네 명이 팀을 이루어 피지로 가서 교회 건축을 도왔다. 짧은 2주간이었지만 전문인 선교사로서의 첫 맛보기 사역인 셈이었다.

주님의교회로부터 바누아투 선교사로 정식 파송을 받은 이후에는 간호학교 수업이 없는 기간이나 방학 때마다 학교 시설을 보수·증축했고, 교회와 초등학교를 짓는 일에도 참여했다. 목수에게 연장과 도구는 생명과도 같다.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도록 녹이 슬지 않게 관리하고, 날이 서 있도록 갈고 닦아 두어야 힘을 아끼고 효율을 높일 수 있다.


선교지에서의 하나님은 목수이시고, 나는 그분의 손에 들린 연장과 도구에 불과하다. 그저 하나님께서 쓰시기에 부족함이 없도록 늘 마음의 준비를 하고 대기하는 것이 나의 역할이다.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돌아보면, 어느 하나도 하나님의 개입이 없었던 순간은 없다. 고된 훈련을 받은 군인이 실전에서 승리할 수 있듯, 나에게 허락하신 지난날의 훈련은 선교지의 수많은 어려움을 견디게 하는 힘이 되었다.


오는 7월, 바누아투 통오아 섬에 KORSHIP Mission Center를 건축하기 위해 기도하고 있다. 이 일에도 치밀하신 하나님께서 친히 개입하시어 많은 동역자들을 붙여 주실 것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