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구름 까마귀
흰 줄과 검은 줄을 가진 까마귀 한 마리가 비가 내리는 나무에 앉아 있었습니다. 지나가던 다른 까마귀가 다가와 묻습니다. “왜 친구들과 함께 있지 않고 비 내리는 나무 위에 혼자 있느냐”고. 까마귀 ‘잭’은 대답합니다. “먹구름이 항상 내가 가는 곳마다 따라다녀서 나만 나타나면 비가 온다고, 다른 이들이 ‘먹구름 까마귀’라고 싫어해요. 지금도 내가 앉아 있는 이 나무에만 비가 오잖아요.” “그것 참 힘들었겠구나.” 한참을 먹구름 까마귀와 함께 비를 맞고 있던 나그네는 “나도 한때 먹구름 까마귀였어”라고 입을 뗍니다. “먹구름은 계속 따라다니는 게 사실이지만, 먹구름은 높은 산을 넘지 못한단다. 나와 함께 저 높은 산을 넘어보지 않을래?”
그날부터 잭과 나그네는 비를 맞으며 높이 나는 피눈물 나는 연습을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산을 넘는 날이 되어 둘이서 높은 산을 날아오르기 시작합니다. 얼마를 날자 숨이 막히고 힘이 들어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있었지만, 나그네와 함께 위로 위로 날아올라갑니다. 어느새 구름을 넘어 올라서니 찬란한 햇빛이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 산을 넘고 나니 더 이상 먹구름이 따라오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찬란하게 맑은 날 창공을 날던 잭은 비 내리는 나무 아래 떨고 있는 또 다른 까마귀를 봅니다. 그를 향해 천천히 날아갑니다. 이것이 제가 좋아하는 먹구름 까마귀 동화의 내용입니다.
우리 안의 먹구름
우리가 살면서 다른 사람들은 그저 순조롭게 풀리는 것 같은 일도 내가 하면 안 되고, 된다 해도 너무 어려울 때가 있지요. 그럴 때는 우주의 모든 기운들이 우리에게 몰려와 방해하는 것 같고, 욥을 시험하던 그 사탄이 우리의 삶의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방해하는 것 같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왜 하나님은 우리를 돕지 않으시지?’ 하는 마음과, 하나님이 우리를 미워한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우리 삶은 온통 불행한 일로만 가득한 것 같아 원망의 마음으로 가득하곤 합니다.
그러다가 우리는 부족한 자신을 자책하는 방향으로 분노가 튀기도 합니다. ‘내가 더 기도하고, 내가 더 잘 준비하고 잘 했어야 했는데….’ 그렇지 않으면 먹구름 까마귀처럼 어쩔 수 없다는 마음으로 체념하며 살아갈 때도 많이 있습니다.
좌절 속에서 찾은 지혜
밀알의 행사들을 치를 때 여러 어려움들이 있습니다. 사단의 방해라고 규정하고 전투적 의지를 불태우기도 하고, 담임목사님의 말씀을 따라 걱정 대신 감사 기도를 작성하여 모든 이들과 나누었습니다. 기도하면, 내가 이만큼 애쓰고 노력하면 상황이 달라질 것이라고 필사적으로 매달립니다. 내 노력과 헌신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얻어내려 합니다. 그럼에도 매년 봉사해 주던 교회들이 ‘도울 힘이 없다’며 멀어질 때마다 어려움 속에서 깊은 좌절과 우울이 익숙한 손님처럼 찾아와 식탁에 앉아 있습니다. ‘힘든데 안 하면 안 돼?’ 매년 헌신하던 손길들이 떠나고, ‘장가 가야 하고 소도 사야 하고’ 바쁘다는 현실적인 이유들을 전할 때면 무력함이라는 친구는 침대까지 쫓아옵니다. ‘이 좋은 일마저 이렇게 어렵다면, 대체 우리가 왜 이 길을 계속 가야 하나?’ 시도 때도 없이 지난해처럼 이 행사를 그만두면 어때, 모두 이 짐을 내려놓고 할 수 있는 것만 하자 라는 생각이 스멀스멀 기어오릅니다. ‘우리 힘으로는 무리야’라는 절망이 먹구름 까마귀처럼 온몸을 잠식합니다.
주님의 이름의 안내자
그때 광명교회 권사님들이 밀알 바자회 소식을 듣고 제일 먼저 연락을 주십니다. “교회 행사가 있어 어렵지만, 우리가 김밥 100개를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힘내세요.” 그제서야 먹구름 까마귀에게 용기를 주던 인생의 안내자 주님이 옆에 계심을 기억합니다. ‘그래, 안 되는 것은 안 되지만 위로 올라가 보자’ 생각하게 됩니다. 할 수 있는 것을 분별하는 지혜를 구하는 기도를 드립니다. 비든 햇볕이든 사람의 마음이든,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음을 기도하면서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내려놓음
그래서 문득 모든 것을 내려놓게 됩니다. 밀알 바자회와 관련하여 행사의 크기, 동원된 인력, 외부의 인정, 심지어 날씨마저도 내 통제 밖에 있음을 인정했습니다. 마치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자신의 단단한 껍질을 포기하듯, 나는 ‘성공적인 행사’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았습니다. ‘봉사하는 교회가 아무도 안 오면 어때? 밀알 식구들과 조촐한 생일 파티를 열어, 이 30년의 세월에 감사하면 그만인 것을. 우리가 사랑하려고 모였지, 일하려 모인 건 아니잖아요.’ 밀알 하루 카페를 통해 펀드를 많이 모으려는 목표 대신, 밀알 잔치를 열어 함께 기뻐하자는 마음으로 바뀌었습니다.
하나님의 손길
염려를 넘어 하늘에 상달하는 기도를 통해, ‘우리는 뭐 해도 안 돼’라는 비합리적 신념이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의 믿음을 구하는 기도로 바뀌었습니다. 놀라운 기적들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힘을 내려놓자, 하나님의 손길이 움직였습니다.
광명교회, 한우리교회 청년들, 빅토리교회 청년들, 기쁨의 교회, 연합교회가 음식 부스를 맡았고, 슈가 블리스 정 권사님, 현석이네, 어진이네가 부스를, 알파크루시스 신학교, 낮은마음 등 협력의 손길이 이어졌습니다. 할머니 손맛으로 잔치다운 음식이 준비되었고, 사진작가들의 작품전과 진수 씨, 명관 씨, 혜란 씨의 개인전, 그리고 밀알 학생들의 작품 전시회가 잔치의 품격을 높였습니다.
보이지 않는 많은 개인들이 곳곳에서 바자회의 빈 공간을 채워 주셨습니다. “늘 우리는 밀알과 함께 가요” 하던 조이풀 오케스트라와 기타 앙상블은 즉시 ‘오케이’ 합니다. 어린이 합창단 ‘울림’이 시작을 맡아 주기로 합니다. 어린이들의 맑은 목소리로 “꽃들도”를 부르기 시작했을 때, 엔도 슈사쿠의 소설《침묵》의 마지막 장면에서 성화를 밟고 살기를 선택한 일본 기독교인들과 함께 사라지던 선교사의 그 장면이 오버랩되면서 흐르는 눈물을 감추기 어려웠습니다. 언젠가 그날에 하늘이 열리고 벚꽃이 만개하는 날 영광의 주님을 볼 때까지, 욕먹는 이들과 박해받는 이들과 함께 살기를 선택한 선교사가 불렀을 꿈의 노래로 들립니다.
더 놀라운 것은 한국에서 들려왔습니다. 백경실 교수님이 우리의 하소연을 잠시 듣더니, “비행기 끊었으니 둘이 가서 도와줄게요” 하고 황금 같은 연휴를 오직 밀알을 위해 사용하고, 음악치료 프로그램으로 잔치를 풍성하게 만들어주었습니다. 지난 30년 동안 뉴질랜드 교회와 성도와 교민 모두의 힘으로 밀알이 이어왔습니다. 이석재 총재님, 정택정 단장님, 우신득 단장님, 기호장 단장님, 김일만 단장님이 헌신해 주셨습니다. 또한 30년 동안 밀알 이사로 든든하게 지켜온 남우택 목사님과 하영철 집사님께 돌비에 새겨 감사 인사를 드렸습니다.
비, 하나님, 그리고 선물
카페 당일, 새벽부터 나와 텐트를 치고 책걸상을 옮기는 빅토리 청년들의 헌신으로 준비는 완벽했습니다. 기쁨의 교회가 와플과 비빔밥을 준비하는 순간, 먹구름이 끼더니 후두둑 빗방울이 떨어집니다. ‘역시나…’ 탄식하려는데, 학생 자원봉사자들이 “목사님, 기도해요!” 합니다. 하던 일을 멈추고 기도했을 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빗방울은 그치고, 먹구름은 마치 근두운처럼 동쪽으로 재빨리 움직여 사라졌습니다. 성층운은 그 자리에 멈춰 서서 햇볕을 막는 그늘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렇게 우리에게도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네가 열심히 해서 한 것 같지? 아니야, 사실은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네게 주는 선물이야.’
기적을 기대해도 좋은 이유
어디서 이렇게 많은 사람이 왔는지, 잔치 같은 바자회가 되었습니다. 오래된 지인들은 이렇게 어설프게 준비한 행사가 성황리에 끝나는 것이 신기하다고 말합니다. 나는 압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기적이었음을 압니다. 밀알 선생님들, 봉사자들, 그리고 밀알을 후원하는 모든 교회들과 성도들이 기도하고 힘쓰고 애쓴 결과라는 것을요. 우리가 죽으니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말씀대로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니, 수십, 수백의 열매로 되돌아왔습니다. 어떤 이는 “비가 왔다면 어쩔 뻔했어”라고 감사해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비를 주셨다면 이 또한 즐거워했을 겁니다. 하나님은 그 속에서 또 다른 은혜를 준비해 두셨을 테니까요. 밀알 잔치에서, 우리는 일 잘하려는 ‘나’가 죽고 이 모든 과정 속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일 때, 기적을 기대해도 좋다는 것을 다시 확실히 깨달았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 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