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리스 사역과 영적인 싸움

90년대 초, 한인들이 뉴질랜드로 이민 올 때 귀금속들을 가지고 왔습니다. 집집마다 결혼반지, 금목걸이, 금팔찌와 같은 귀금속들이 있었습니다. 적게는 몇 천불에서, 많게는 몇 만불에 이르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한국 사람들이 집에 귀금속을 갖고 있다는 소문이 나기 시작하면서 좀도둑들의 타겟이 되었습니다. 이 일로 한인들 사이에서는 비상이 걸렸습니다. 어떤 사람은 보험을 들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냉장고 음식들 사이에 숨기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내기도 했습니다. 그러자 좀도둑들이 금속탐지기까지 갖고 다닌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저도 한 동안은 안전하게 숨겨 놓았습니다. 하지만 결국 도둑맞고 말았습니다. 제 기억으로 이민 생활하는 동안 네 번 정도 도둑이 들었는데 갖고 있던 모든 귀금속을 도둑 맞고 말았습니다. 도둑을 맞을 때마다 마음이 상했습니다. 특히 결혼반지까지 모두 도둑 맞았을 때는 마음이 너무 힘들었습니다. 결혼 반지는 값을 매길 수 없을 만큼 평생에 기념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소중히 여기는 무언가를 잃어버렸을 때 마음이 아픕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향해 이런 안타까움을 갖고 계십니다. 우리는 원래 하나님의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온 우주만물을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땅과 하늘을 창조하시고, 식물과 동물을 창조하시고 마침내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좋았더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손으로 창조하신 모든 것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그 중에서도 특별히 인간을 사랑하시고, 한 영혼을 온 천하보다도 귀하게 여기십니다(마16:26). 값비싼 보석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리를 귀하게 생각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피조물인 인간이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우리를 도둑맞은 것입니다. 공중권세 잡은 자들에게 빼앗긴 것입니다. 귀하기 때문에 보험을 들고, 냉장고 속에까지 숨겼던 보석을 도둑 맞은 것입니다. 한 영혼을 향한 이 안타까운 마음을 갖고 계신 하나님은 오늘도 한 영혼을 찾고 계십니다.

그러나 도둑맞은 한 영혼을 다시 찾아오는 일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선한 일을 행할 때 모두가 박수 쳐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경험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한 영혼이라도 전도하고, 구원의 길로 인도하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거대한 저항에 부딪히게 되는 것을 경험합니다. 홈리스사역도 마찬가지입니다.

믿는 분들 중에서도 홈리스 봉사에 대해 회의적인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의 주장은 얼핏 논리적으로 그럴듯해 보입니다. 그 중에 가장 많은 것이 “뉴질랜드 같이 세계 최고의 복지국가에서 왜 이런 사역이 필요하냐?”는 것입니다. 정부에서 수당을 주지 않느냐는 것이지요. 또 하나는 “게을러서 홈리스가 된 사람들을 왜 이렇게까지 음식을 나누어 주어야 하느냐?”, “음식을 나누어 줌으로써 홈리스 생활을 오히려 조장하는 것이 아니냐?”하는 의문입니다. 멀쩡한 육신으로 일하면 될 텐데, 수당이라도 신청해서 살면 될 텐데 게을러서 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이 두 가지 의문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 다루었기 때문에 생략합니다만 이것은 오해입니다. 홈리스의 문제는 단순히 게으름의 문제가 아니라 양극화된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이고 멘탈의 문제입니다. 피상적으로 홈리스 문제에 접근하기 때문에 이런 오해가 생깁니다. 어떤 분들은 이런 오해를 마치 큰 해법을 제시하듯 이야기하는 것을 들을 때 참담한 심정이 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생각을 갖고 계신 분들 중에는 한 교회의 직분자요, 믿음의 가문에서 성장하고 신앙적인 뼈대가 있다고 자부하는 분들도 있기 때문입니다.

홈리스 봉사 현장에도 결코 긍정적인 일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은 많이 줄었지만, 홈리스 봉사를 갓 시작한 초창기에는 봉사자들에게 행패를 부리는 홈리스들이 있었습니다. 약에 취해서 마치 작정이라도 하고 온 사람처럼 소리를 지르고, 욕하고, 행패를 부리는 것이었습니다.

그 중에 가장 악명이 높았던 “카스”라는 형제가 있었습니다. 이 형제는 약을 하고 오면 꼭 사고를 쳤습니다. 봉사자들에게 시비를 걸고, 욕을 하면서 “너희네 나라로 돌아가라!”라는 인종차별적인 발언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서 수모를 겪던 당시 변호사인 우리 딸은 결국 참았던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습니다. 정말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살면서 피했으면 피했지 상대할 일도 없고, 상대하고 싶지도 않은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인류애까지는 아니더라도 선한 마음으로, 또 위대한 믿음은 아닐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는 마음으로 봉사에 참여했는데 이런 일을 당합니다. 이럴 때 우리는 당황하게 되고, 순수했던 마음이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격렬한 영적싸움입니다.

더욱이 일단 이렇게 소동이 일어나면 또 다른 문제를 야기시킵니다. 대부분은 소동이 거기서 일단락됩니다. 하지만, 어떨 때는 소동을 일으키는 쪽과 그들을 진정시키려는 쪽이 크게 부딪히는 일이 생깁니다. 그렇다고 해서 경찰을 불러야 할 정도는 아니지만, 소동이 장시간 이어지고 분위기가 험악해집니다.

이렇게 되니까 원래 봉사하던 곳이 도서관 정문 앞이었는데 도서관에 출입하는 사람들이 불편을 겪는 일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소동은 도서관 직원들까지도 힘들게 하는 상황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도서관 매니저로부터 메일을 받았습니다. 당장 다음주부터 홈리스 봉사 장소를 다른 곳으로 옮겨달라는 일방적인 통보였습니다. 도서관의 입장도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결국 장소를 도서관 옆쪽 거리로 옮기는 것으로 일단락되었습니다.

또 봉사자들이 부족해서 발을 동동 구르기도 했고, 코로나로 인해서 홈리스 봉사가 중단 위기에 처하기도 했습니다. 또 봉사에 참여하겠다! 도네이션하겠다! 철석같이 약속을 했건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정작 봉사 현장에는 나타나지 않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영적인 전쟁의 연속이었습니다.

이런 상황 가운데 홈리스 사역을 하면서 죄에 대해 또 사탄의 공격에 대해 깊이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왜 이 사람들이 홈리스가 되었을까? 하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되었습니다. 세상은 공중권세 잡은 사탄이 지배하는 곳입니다. 죄가 상식처럼 통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이 죄의 문제는 개인적 차원의 문제가 아닙니다. 개인의 옳고 그름의 문제, 개인의 도덕이나 윤리의 문제를 넘어섭니다. 나 혼자 죄를 짓고 벌을 받는 것으로 끝나는 문제가 아닙니다. 죄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조직적이고, 구조적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어떤 대기업이 있습니다. 신입 사원도 재택근무에 연봉이 백만불입니다. 일 년에 네 번, 한 달씩의 휴가를 줍니다. 어디를 가든지 모든 여행 비용을 전액 회사가 부담합니다. 임신하면 육아휴직을 3년 동안 줍니다. 이 보다 더 좋은 회사가 있을까요? 그런데 이 회사가 취급하는 품목이 마약입니다. 불법적으로 마약을 유통하면서 돈을 버는 회사입니다. 이런 회사에서 일하면서 아무리 정직하고 성실하게 열심히 일해 봤자, 그것은 죄에 죄를 더하는 일일 뿐입니다.

공중권세 잡은 사탄이 지배하는 세상의 모습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사탄은 모든 사회 구조와 시스템 속에 죄의 그물을 쳐 놓았습니다. 그리고 이 죄의 시스템에 걸려든 사람들의 마지막 종착지가 홈리스입니다. 그들 중의 대부분은 좋은 환경에서 자랐고, 좋은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죄의 시스템 속에 빠져 버렸습니다. 마약에 빠지고, 도박에 빠져서 재산을 잃고, 가족을 잃고 모든 것을 잃어 버렸습니다. 거리로 나앉게 되었습니다. 믿는 자도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죄를 짓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면 누구나 천국을 잃은 영적인 홈리스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교회 안에만 머물러 있으면 온실 속의 화초와 같은 신앙이 되고 맙니다. 교회 문을 열고 나가는 순간부터는 영적인 전쟁터임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 더구나 시티는 오클랜드에서 가장 강력하게 어둠의 세력들이 진을 치고 있는 곳입니다. 카지노가 있고, 온갖 유흥업소들이 밀집된 곳입니다. 이런 곳에 다툼이 있고, 고성이 오가는 일이 생기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이런 세상에서는 거룩하고, 예의 바르고, 안정된 상황만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교회 안에만 있다가 잃어버린 성경적인 신약교회의 선교적 영성을 회복하고, 영적전쟁에서 승리하는 교회와 성도들이 되시기를 믿고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