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적 교회 개척과 홈리스 사역

1996년 뉴질랜드로 이민 왔을 때 어떤 사람들은 사회가 복잡해진다고 이민자들을 귀찮아했습니다. 당시 뉴질랜드는 그저 조용한 시골 동네였습니다. 주말이 되면 가게는 문을 닫았고, 주일에는 술을 팔지 못하게 하는 법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Mega”라는 말을 붙이는 가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Moto는 “Big is Good”이었습니다. 거대한 상업화의 물결이 조용한 시골 동네 뉴질랜드를 덮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부작용은 감당할 수 없는 집값 상승과 홈리스의 증가로 나타났습니다. 이것이 최근 십수 년 사이에 벌어진 일입니다.

미국에서 돌아와 교회를 개척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입니다. 어떤 성도님을 만났는데 그분은 대뜸 “아니 왜 미국에서 목회를 하시지 그곳에는 목사들 사례비도 많이 주고 잘 대우해 준다는데…” 말했습니다. 제가 대답했습니다. “목사가 돈 때문에 사역하나요?”(마태복음 16:23). 그분은 순간 당황해했습니다. 돈 때문에 하는 목사가 목사일 수 있을까요? 부자가 되고 싶다면 목사가 아니라, 비즈니스를 하는 쪽이 빠를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에도 덕이 될 것입니다.

어떤 사역자가 말했습니다. “뉴질랜드에는 작은 교회들이 너무 많은데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 정리될 것 같아요. 아마도 대형 교회 몇 개만 살아남을 것 같아요.” 저는 그 말에 대해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미국 LA에 있는 코리아 타운 중심부는 이곳 오클랜드 시티와 폰손비, 마운트 이든, 뉴마켙 지역을 포함하는 정도의 넓이입니다. 그곳에만 약 300 여개의 한인교회가 있습니다. 그리고 미국 전역에 한인교회가 약 8천여 개가 있습니다. 교회는 끝없이 생겨나고 없어질 것입니다. 문제는 규모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합당한 교회냐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성도든, 사역자든 모두가 소비주의에 물들어 있습니다. 큰돈을 투자해서 큰 가게를 차려 놓고, 그 주변 지역 상권을 장악하겠다는 것이 Mega shop의 야망입니다. 그들의 전략대로 “Big is Good”이라고 광고하는 상업적인 논리가 여과 없이 그리스도인들의 사고와 삶을 지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목사가 되기 전 소위 Mega Church를 추구하는 교회들을 경험했습니다. 교회가 크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꼈고, 이런 교회의 울타리 안에서 가만히 생활하다가 천국 가는 것이 이상적인 신앙의 모습이라고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Mega Church의 원조인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4년 동안 살면서 이 환상에서 깨어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서 미리 Mega Church의 비극적인 미래를 보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인 교회가 수정교회(Crystal Cathedral)입니다. 수정교회는 1955년 로버트 슐러 목사에 의해 창립된 이래 미국에서 가장 크고 영향력 있는 교회 중 하나였습니다. 특히 40여 년 전 건축된 예배당은 아름다운 유리 벽과 세계에서 가장 큰 파이프 오르간으로 유명했습니다. 매년 크리스마스가 되면 교회에서 성탄절 공연을 하는데 당시 입장료가 US $100이었습니다. 무대에 말과 낙타가 등장하고, 천정에 로프를 매달아 천사가 날아다니는 화려한 공연이었습니다. 또 이곳에서 촬영된 주간 TV 설교 방송 ‘능력의 시간(Hour of Power)’은 전 세계에 방영되었습니다.


그러나 로버트 슐러 목사의 은퇴 후 자녀 간의 교회 지도권을 둘러싼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이로 인해 교인 수가 급감했고, 이것이 재정 악화로 이어졌습니다. 결국 2010년 교회가 파산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1년여 뒤인 2011년 말 교회 건물은 가톨릭 가든 그로브(Garden Grove) 지역 교구에 매각되고 말았습니다.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풀러신학교 주변에는 미국 교단을 대표하는 큰 교회 건물들이 있었습니다. 그 교회들에는 하나같이 노인들만 남았습니다. 그나마 이민자, 소수인종 회중들의 예배를 통해 교회의 명맥을 겨우 유지하는 교회가 대부분이었습니다.

문제의 원인은 교회가 본질에서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성도를 소비자로 보고, 그 소비자의 욕구를 충족해 주려다 보니까 배가 산으로 가고 말았습니다.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하던 120명의 제자들의 머리 위에 성령께서 불의 혀같이 임하심으로 탄생한 선교적인 교회가 원래의 목적에서 벗어나고 말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이 뒷전으로 밀려나고 말았습니다. 교회가 부르심을 받은 성도들의 모임이 아니라, 자신의 필요를 채우는 집단으로 변질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런 시대적 상황에서 미국에 있는 동안 “선교적 교회”를 연구하게 되었습니다. “선교적 교회”라는 용어는 영국출신 인도 선교사였던 레슬리 뉴비긴(Lesslie Newbigin 1909-1998)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인도 선교사로 35년 동안 헌신했습니다. 이분이 사역을 마치고 고국인 영국으로 돌아와 보니까, 영국은 이미 이교도의 나라가 되어 있었습니다. 오히려 영국을 포함한 유럽 전체가 선교지였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교회의 본질을 의미하는 “선교적 교회”라는 용어가 탄생하게 되었고, 북미교회와 신학자들에 의해 본격적으로 연구되기 시작했습니다.

요약하면 선교적 교회란 “교회는 태생적으로 선교적이기 때문에 교회의 선교적 본질을 수행하기 위해 교회의 모든 조직과 제도가 변화되어 하나님의 선교 목적에 부합된 형태로서의 교회”를 의미합니다. 이것이 성경적인 신약교회입니다.

성경은 전체가 선교적인 책입니다. 모든 민족을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시키기 위해 특정한 사람들을 부르시는 선교하는 하나님을 계시하는 선교적인 책입니다(Glasser 2006:39).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게 하심으로 선교는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의도를 저버린 배타적인 신앙으로 일관하며 선교적 사명에 불순종했고, 결국 바벨론 포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흩어짐은 죄악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선교적 도전 때문이라고 이해되었습니다(Glasser 2006:272).

그들은 고레스의 칙령에 의해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 공동체들은 더욱 넓은 지역으로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지중해 연안의 전 지역에서 그들만의 신앙공동체를 형성하며 회당을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이 회당은 신약에서 초대교회가 지역 선교와 세계 선교의 소명을 감당하는 연결고리가 됩니다. 따라서 교회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 열방으로 흩어지는 선교적 속성과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곳에서 복음 증거의 사명을 감당하는 태생적으로 갖게 된 교회의 선교적 본질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성경적인 신약교회, 선교적 교회는 정착민이 아니라, 유목민에 가깝습니다. 이 땅에 잠시 잠깐 살다가는 나그네의 삶입니다. 이것이 교회가 태생적으로 가진 속성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땅에 천년만년 살 것처럼 땅에, 건물에 모든 것을 쏟아부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손으로 쌓아 올린 거대한 건물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그것이 영원할 것으로 착각합니다. 교회들이 한참 번영주의에 도취되어 있었을 때 “큰 교회가 큰일 한다!”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작은 교회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 왜 그렇습니까? 작은 교회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 한 가지 하기에도 벅찹니다. 멋을 내고, 자랑 삼아 하는 일에 허비할 여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기도하고 기도하고 기도해서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일, 주님께서 하라고 하신 그 한 가지 일에만 집중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오히려 복이 되었습니다. 그 일이 우리에게는 홈리스 사역이었습니다. 잃어버린 한 영혼에게 집중하는 일입니다.

40대 후반에 15년 동안 하던 비즈니스를 정리하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두 개의 신학석사 학위를 마치고, 50대 초반에 안수를 받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늦은 나이에 시작한 목회이니만큼 시간 낭비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사역만을 해야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그래서 교회 개척은 철저히 과거로부터의 결별로 시작했습니다. 외형적인 성장만을 자랑삼는 번영주의 신앙으로부터의 결별이었습니다. 그런 번영주의 신앙에 찌든 사람들로부터의 결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공동체에 몸담고 있었던 ‘과거의 나’로부터의 결별이었습니다.

감사선교교회의 주보에는 이런 문구가 있습니다. “교회간 수평 이동을 지양하고, 영혼 구원하여 제자 삼는 일을 사명으로 알고 집중하는 교회입니다. 이미 구원 받으신 방문자 분은 필요로 하는 곳에 가서 섬기시길 권합니다.”

주님 주신 은혜가 커서 한 영혼이라도 구원으로 인도하겠다는 동역자면 모르되 이교회 저교회 기웃거리며 은혜를 구걸하는 사람들과는 함께 할 수 없었습니다. 번영주의 신앙과 결별하기 위해서입니다.

선교적교회에는 두 종류의 성도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비신자와 뜨겁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동역자, 두 종류의 성도들입니다. 이런 성도들이 모인 곳이 성경적인 신약교회의 모습이고, 태생적으로 선교적인 교회의 참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뉴질랜드에서도 진정한 성경적인 신약교회의 가치를 위해 도전하는 교회와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복하며 감사합니다.

참고자료: 김주표 풀러선교대학원 선교학석사(M.A) 논문 “레슬리 뉴비긴의 선교이론을 통한 선교적 교회 개척 방안 연구: 뉴질랜드 오클랜드 North Shore지역 한인교회 개척사역을 중심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