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이들이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고민을 한다. 하나님은 과연 하나님을 닮게 만든 인간이 ‘나는 누구인가?’를 고민할 때 어디에 계실까? 아마도 가장 가까이서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주기 원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이 고민은 참 할만한 고민이다. 하지만 바쁜 현실 때문에 분주해진 마음은 깊이 있는 생각을 할 기회를 주지 않거나, 또는 수많은 지식들 때문에 도리어 분산되어 나를 향한 하나님의 음성을 있는 그대로 듣기가 쉽지 않다.
여러 매체가 존재하고 자신을 찾는 도구들이 즐비하지만, 아쉽게도 오늘날 다음 세대는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다. 겉잡을 수 없이 빠른 변화 속에서 나를 찾기는 커녕 되려 무언가를 지속해서 추구하지 않으면 뒤쳐지는 느낌을 주는 사회적 분위기 안에 살고 있기 때문일까.
나라는 존재는 나 혼자만으로 정의되는 것이 아닌, 내가 속한 사회나 공동체의 문화적 정체성에 큰 영향을 받아 정의 내려진다. 하나님이 자신의 모습이 투영된 다양한 사람들을 창조하시고, 다양함이 어우러져 서로 이해하며, 존중하며, 사랑하며 하나님을 알아 가기를 바라셨으리라. 그러니, 내가 속한 공동체 즉, 가정, 교회, 직장, 나라 등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르다.
하지만, 우리는 자주 속한 사회와 공동체에서 도리어 길을 잃곤 한다. 이민와서 교포로 살면서, 두 개의 정체성 가운데 혼란을 겪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을 하는 것 같지만 때로는 떠돌이 인 것 같은 생각도 든다. 뉴질랜드에서 대부분을 자란 다음 세대와 이야기하다 보면 이 정체성에 관련된 문제는 항상 가장 뜨거운 주제로 긴 시간을 소비하게 된다. 그럴수록 공동체의 역할이 매우 중요함을 느낀다.
하지만, 지금 세대는 공동체를 위한 개인이 아닌, 나에게 이익을 줄 수 있는, 나에게 맞는 공동체를 찾는다. 이 모습은 신앙생활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일차원적인 공급이 풍족하기 때문일까? 오늘날 신앙생활이란 예전처럼 함께 공동체를 발전시켜가고 공동의 이익을 위해 희생하기 보다는, 나의 안정에 중심을 두고 있는 경우가 많다. 내가 하고 싶을 때, 내게 필요한 것 위주로,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접근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교회 또한 만남의 장소,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한, 또는 감정의 위로를 받기 위한 곳이거나, 개인적인 취향이 존중되는 곳이 되어가고 있다. 그러다 보니, 개인의 취향보다는 하나님의 진리가 중심인 신앙생활은 자연스럽게 이 세대를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만들었다. 변하지 않는 진리는 여전히 우리에게 편한 얘기만이 아닌, 유혹에서 피하고, 절제하며 사랑하고, 부단히 지켜내야 하는 등 불편한 모습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자유롭고 개인의 존중을 요구하는 이 세대와의 사이에서 큰 격차가 존재한다.
물론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진리는 세대를 넘어서서 지속되어 왔고, 우리에게 참 자유를 주었지만, 하나님의 뜻과 마음이 결여된 진리는 껍데기만 남은 율법주의적인 신앙은 하나님의 마음을 규율만 요구하는 억압하는 모습으로 잘못 인식하게 했다. 그러므로 다음 세대에게 내가 알고 있고, 경험한 신앙이 안전하고, 옳다고 강요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재미있는 사실로 결혼을 예로 들자면, 역사적으로 결혼의 목적은 다양하게 변해 왔는데 꼭 세대와 문화의 차이만으로 치부할 순 없지만 경향은 존재하는 것 같다. 불과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에는 재산을 증가시키거나 힘을 기르기 위한 경제적 정치적 동맹이 목적인 적도 있었다. 한 때는 결혼의 목적이 서로를 향한 순전히 사랑과 지지인 적이 있었고, 주로 대부분 그렇듯 자녀 생산과 가문의 지속이 최근까지도 주 목적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면, 요즘은 결혼을 하는 대표적인 목적이 자신이 편하고자 해서라고 한다.
한 때는 먹고사는 문제가 급급해서 하나님을 찾을 수밖에 없던 세대가 있었다. 가정을 살려내야 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매달릴 수밖에 없던 세대, 주변을 돌아봐도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곳이 도저히 보이지 않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디든 손을 뻗으면 공동체나 시설이 잘 되어 있어 기본적 공급은 문제가 없는 세대다. 과연 이 세대는 무엇 때문에 하나님을 찾을까? 하나님은 이 세대에 어떻게 역사하실까?
아이러니 한 것은 도리어 다음 세대는 이전 세대를 보고 규율을 잘 지켜내는 것이 옳은 신앙 생활이라는 표면적인 모습에서 이제는 그 내면을 궁금해하는 세대이다. 과연 마음 깊은 곳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그 마음으로 규율을 즐거이 따르는 것인지, 혹은 맹목적으로 헌신하고, 믿다 보면 잘 된다는 그저 오래된 신념 때문인지. 이것이 진정으로 궁금해하는 것이다.
겉으로만 지켜지는 신앙에는 힘이 없다. 도리어 억압과 가스라이팅으로 진정성을 찾는 세대에게 반감을 줄 뿐이다. 과연 다음 세대에게 내 신념 속에 정립된 하나님이 아닌, 지금도 살아서 생명력있게 역사하고 있는 하나님의 진리를, 매일마다 새롭게 배우며 열어 가시는 하나님을 어떻게 전해줄 수 있는지 고민해야 한다.
최근 교회 공동체에서 ’내가 예수를 믿지 않았다면, 혹은 신이 없다면 나는 과연 어떻게 살고 있을까?‘ 라는 질문을 나눴다. 이 질문의 요지는 이미 익숙해 있는 하나님을 믿는 삶이란 과연 실제적으로 어떤 것인지라는 정체성에 질문을 던진 것이었다.
그 대답이 참 다양했다. 어떤 이는 모두가 신봉하며 따르는 교주로 살고 있을 것이라고 했고, 어떤 이는 다른 사람들도 다 그럴테니 나와 내 가정을 보호하기 위해 더 악랄한 살인자나 강도가 되어 살고 있을 것이라고 했고, 어떤 이는 이성을 무작정 많이 사귀며 마음껏 즐기고 있을 것이라고 했고, 어떤 이는 줄창 마약과 술을 즐기면서 고통 없이 죽기를 바라고 있을 것이라고 했다. 하나님이 없다고 가정하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사는 내가 중심된 삶은 어떤 모습일지 독자들도 한번 생각해 보면 좋겠다.
가짜 신이 아닌, 그저 어딘가에 존재하는 신이 아닌, 율법으로 나를 가두어 놓으려고 하는 신이 아닌, 참으로 내가 고백하고 믿는 하나님은 이 세상을 이렇듯 통치하고 계시고, 내게 의로운 삶을 살 수 있는 원동력을 주시고, 하나님의 모습을 나와 우리 공동체에 투영하셔서 서로의 연약함을 돌보고 위로하며, 참 하나님의 성품을 경험하는 일들을 허락하셨다. 그 안에 절제와, 내려놓음과, 지켜냄 등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는 건강한 율법들이 방법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지금 나와 내 공동체가 전능자이신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존중하며, 아버지이신 하나님이 내 삶에 속속들이 개입하시는 것을 인정하고 경험하기 때문에 내가 원하는 대로만 살지 않고, 나의 취향대로 살지 않고, 내게 주어진 것에서만 나의 정체성을 찾지 않으며,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에게서 그리고 하나님이 이루어 주신 가정과 교회 공동체 안에서 나의 정체성을 찾아갈 수 있는 것이다.
내 마음에 안정을 줄 수 있는 하나님을 찾는 지극히 자기 중심적인 이 세대에 참으로 그 중심을 하나님께 돌이키는 능력 있는 말씀이 선포되고, 성령이 함께하는 생명력 있는 삶이 교회에서 가정에서 전해지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