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 그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행 11:19-21)
미국에서 한 젊은 선교사가 백인들의 무덤으로 알려진 아프리카 대륙에 선교 길을 떠나며 모 교회에서 작별 인사를 하며 이런 말을 남겼다.
“내 아내와 나는 먼 길을 떠나는 데서 오는 이상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우리는 마치 무덤으로 내려가는 심정입니다. 그러나 교우들이 우리 부부가 들고 가는 이 밧줄을 같이 붙들어 준다면 어떠한 모험도 무릅쓰고 이 길을 힘차게 가겠습니다.”
그 말을 듣고 모든 사람이 하나같이 약속했다. 그 후로 두 해가 지나지 않았을 때, 그 선교사의 아내와 어린 아기가 무서운 열병으로 죽었다. 젊은 선교사는 자기의 날도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본국에 통지도 하지 않고 곧장 미국으로 돌아와서 모처럼 수요일 예배를 같이 드렸다. 아무도 모르게 교회에 들어와서 뒷좌석에 앉아 있다가 예배가 마칠 때쯤 앞으로 나아갔다. 교인들은 곧 죽을 것 같은 그의 얼굴을 보고 매우 놀랐다. 선교사는 교회 앞에 나서 말했다.
“나는 여러분이 파송한 선교사입니다. 내 아내와 아이는 아프리카에 묻혔습니다. 나는 이곳에서 죽으려고 왔습니다. 오늘 저녁 나는 여러분이 기도할 때 여러분들이 나에게 약속한 것을 지키는지 무척 듣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교우들은 여러분 자신과 교회에 관계되는 것은 기도했어도 선교사를 위해서는 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나는 여기 실패한 선교사로 서 있습니다. 그 까닭은 여러분이 나와 함께 밧줄을 잡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선교사의 말 속에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담겨있다. 교회와 성도에게 있어서 선교는 사명인가, 유행인가, 형식인가, 책임인가, 아니면 부담인가? 여러 모습으로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사명이라는 것과 책임이라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지만, 그래서 형식에 그칠 때가 있고 나아가 불편한 말이 될 수도 있겠지만 생색내기와 유행에 머무는 것도 볼 수 있다. 또한 하긴 해야 하는데 능력이 되지 않아서, 준비가 되지 않아서 부담으로만 여기는 교회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교적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위와 같은 모든 것을 극복해 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움직임이 있을 수도 있다. 그것을 예루살렘 교회의 경우에서 볼 수 있다. 우리는 가장 이상적인 교회 생활을 말할 때 예루살렘 교회를 말한다. 초대 교회로 돌아가자고 하면서 말이다. 예루살렘 교회는 그만큼 시대를 넘어 모든 교회와 모든 성도에게 이상적인 교회 생활에 대하여는 모범적이었다. 과연 하나님의 나라에 가기 전에는 이런 현상이 다시 나타날 수 있을까 할 정도로 이상적이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행 2:44-47)
그러나 교회의 사명에 대하여는 무관심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예루살렘 교회에 주신 하나님의 사명은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인데, 예루살렘 교회는 예루살렘에만 머물러 있었다. 온 유대와 사마리아 그리고 땅끝에 대하여는 관심이 없었다.
교회가 핍박당한 것은
“사울은 그가 죽임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행 8:1).
예루살렘 교회는 스데반의 순교, 그 기점으로 핍박을 받기 시작한다. 그 결과 모든 예루살렘 성도들이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진다. 사도행전 1장 8절의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강제적인 집행의 시작인 셈이다. 그뿐만 아니라 교회를 잔멸하기 시작했다.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 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행 8:3) 했다. 이런 핍박은 예루살렘 성도들로 하여금 교회에 발을 붙이지 못하게 만들고 어쩔 수 없이 흩어지고, 다른 지방으로 가게 되었다.
하나님이 흩어진 사람들의 특징
사도행전 8장을 보면, 흩어진 사람들의 특징을 말해준다. 흩어진 사람들, 그들은 두루 다니며 복음의 복음을 전했다 했으니, 흩어진 사람들은 곧 선교사였다. 또한 흩어진 사람들은 경건한 사람들이었다.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행 8:1) 했으며,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행 8:2) 했다. 하나님께서 교회가 선교 사명을 감당하지 않고 있을 때, ‘경건한’ 많은 성도를 준비하셔서 선교의 도구로 사용하셨음을 보는 장면이다. 교회가 사명을 감당하지 않으니,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사용하셔서라도 하나님은 선교를 이루어 가신다.
사도행전에서 고넬료는 경건한 사람의 대표적인 모범이다. 사도행전 10장 2절을 보면, 고넬료는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했다고 했다. 경건은 하나님을 경외함인데, 하나님을 경외함은 백성 앞에는 구제함으로, 하나님 앞에는 기도함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런 경건으로 준비되어야 하나님의 쓰임을 받을 수 있다.
빌립처럼 이름이 알려진 사람들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행 8:5)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초대 교회는 일곱 집사를 세웠다. 그중 스데반은 이미 순교했고, 빌립은 사마리아 땅으로 복음을 전하러 갔다. 초대 교회의 집사는 모든 면에 있어서 이미 검증을 받은 사람들이다.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행 6:3).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을 하기에 충분하게 준비된 사람이니, 사마리아를 향한 첫 번째 증인이요, 숨겨진 선교사가 되었다.
그리고 이름 모를 흩어진 사람들
“그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행 11:19)
드디어 흩어진 사람들을 통하여 ‘땅 끝’을 향한 복음의 진군이 시작되었다.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라는 지명이 의미하는 것은 이름 모를 흩어진 사람들이 유대인과 헬라인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전파하였다는 데 있다. 이런 일을 기뻐하시는 하나님께서 주의 손으로 함께 하여 주시매, 복음의 역사가 날마다 확장된다. 숨겨진 선교사들의 역할이 얼마나 위대한가?
예루살렘 교회는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다가 큰 핍박을 만났다. 교회에 핍박이 있을 때, 그 원인을 다른 데서 찾을 수도 있겠지만, 하나님의 명령이요, 교회의 사명인 선교와 관련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오늘날의 모든 교회가 깊이 생각해야 할 영적인 교훈이 깃들어 있다.
하나님은 유명한 사람만 사용하지 않으신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회 경험이 있는 사람만 선교사로 보내지 않으신다. 무명의 사람이지만 하나님을 경외하고 순종하는 사람도 사용하신다. 오늘날 선교 현장에는 목회자 선교사보다 평신도가 더 많고 더 많아야 하는 것이 정상이어야 한다. 흩어졌다는 말을 생각하며 선교지의 안타까운 현실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부끄러운 이야기이지만, 선교지가 어느 한 곳에 집중해 있다는 것을 숨길 수 없으니 소위 선교지도 인기 선교지가 있다. 이를 흩어져 선교하는 모습이라 볼 수 있겠는가? 선교사 재배치 문제는 수십 년 전부터 나온 이야기이지만 이는 정책으로 해결할 문제가 아니다. 선교사의 사명과 자질 문제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