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십자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두 단어 ‘왕’과 ‘십자가’, 가장 높으신 분이 가장 낮아져야 했던 복음의 비밀을 이 시대 용어로 맛깔스럽게 풀어내고 있는 책이다. 그리스도의 삶을 깊이 들여다봄과 동시에 세상 나라의 역사와 더 나아가 목적까지 밝혀준다.

팀켈러는 마가복음을 치밀하게 강해하면서, 예수님의 삶을 깊이 파헤친다. 그 결과 나사렛 내러티브가 우주적이며, 동시에 지극히 개인적임을 보여준다. 성경을 해석할 때 그때의 언어와 상황을 여기 지금으로 개연성 있게 동시에 생생하게 가져오는 것이 해석자들의 고민일 텐데 팀켈러는 복음의 비밀을 지금의 용어로 맛깔나게 풀어내고 있다. 책을 읽다 보면 가장 비참하고 가장 잔인하게, 그러나 가장 영광스럽게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신 예수님의 이야기가 가슴 깊이 새겨지고 이해될 것이라 믿는다.

이번 책까지 총 4권의 켈러의 저서를 소개하면서 반복해서 느끼는 것은 그가 대단히 폭넓고 깊은 지식을 소유했음에 놀라고, 이를 위해 얼마나 성실하게 매일을 살아왔을지 감탄하게 된다. 팀켈러는 보수적인 신학과 성향을 가진 목회자다. 그러나 가장 진보적인 지역인 뉴욕의 한복판에서 영적부흥을 이끌어내었다.

그 비밀을 이 책을 통해 어느 정도 엿볼 수 있게 된 것은 예상치 않았던 큰 유익이었다. 이 책이 그의 설교집이기 때문이다. 단순히 학문적 유희가 아니라 살아 숨 쉬는 회중들과 나누었던 치열한 영적 소통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책은 멀리 2천 년 전 그때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 여기의 고민들과 삶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묻어나온다. 상처받은 사람, 마음이 괴로워 사랑을 갈구하는 사람, 신세 한탄에 땅이 꺼지는 사람, 그들과 함께했던 시간들에 대해 켈러는 이렇게 말한다.

‘그야말로 진이 빠진다. 하지만 나의 감정적 샘이 고갈될 때까지 진정한 사랑으로 귀를 기울여 줘야 그들이 조금이라도 치유될 수 있다. 나의 기쁨을 어느 정도 포기해야 한다. 나만 마음 편하게 살려고 그런 사람들을 피하면 그들은 점점 죽어 갈 수밖에 없다. 그들을 사랑하는 유일한 길은 그들을 대신하여 희생하는 것이다.’

팀켈러는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탄식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소개한다. 예수님은 단지 소원을 들어주시는 분이 아니다. 예수님의 공감은 더 깊은 차원까지 들어갔다. ‘깊은’ 탄식. 탄식보다는 신음 소리로 번역해야 더 옳다. 신음은 고통의 표현이다. 예수님은 왜 그토록 고통스러워하셨을까? 예수님과 내가 분리된 타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때때로 풍랑을 맞은 제자들과 같이 원망과 탄식이 터져 나올 때가 있다. “어찌 우리(나)를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지만, 그럴 때 기억하자.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하기 위해 최악의 풍랑에 빠지셨다는 사실이다. 십자가의 풍랑 속에서도 우리를 버리지 않으신 분이 현재의 시시한 풍랑 속에서 우리를 버리시겠는가?

예수님과 함께 할 때 우리는 참된 평안을 얻는다
과거에 저지른 실수 하나 때문에 말할 수 없는 죄책감에 시달리며 살고 있는가? 평생 그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발버둥을 쳤는가? 특별히 악하지도 않으면서 열등감과 싸우고 있는가? 종교나 정치, 아름다운 외모로 이 열등감을 치유하려고 애쓰고 있는가? 심지어 기독교 목회를 통해 존재의 의미를 찾으려는가? 하지만 외적인 노력은 아무리 해도 소용이 없다.

길은 하나밖에 없다. 당신의 치명적인‘행위’를 가지고 열정을 갖고 자비로운 분께 과감히 나아가라
사람들이 예수님을 구주로 삼지 못하는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너무 교만해서다. 우월감에 사로잡혀서 예수님의 직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다른 이유는 열등감이다. 자의식에 사로잡혀 “나 같은 죄인을 하나님이 사랑하실 리가 없어!”라고 말한다. 자신이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자격이 없다는 말은 자신이 그분의 용서를 받을 만큼 잘못한 것이 없다는 말만큼이나 큰 잘못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면전으로 나아가야 한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행하셨고 지금도 행하고 계신 일을 똑똑히 봐야 한다. 하나님이 언젠가 우리에게 해 주실 포옹을 미리 맛보아야 한다. 머리로 아는 하나님의 사랑을 몸으로도 느껴야 한다. 영광스러운 창조주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고 지켜 주신다는 사실을 아는 것과 그것을 실제로 느끼고 경험하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무엇이든 실제로 맛보아야 거기서 영양분을 얻고 강해질 수 있다.

“저는 믿음이 없습니다. 제 안에는 의심이 가득합니다. 제 도덕적, 영적 능력은 보잘것없습니다. 그래도 저를 도와주세요.” 이렇게 자신이 아닌 예수님을 의지하는 믿음이 바로 구원하는 믿음이다. 우리에게 완벽한 의는 불가능하다. 완벽한 의에 이를 때까지 기다리다가는 평생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 자신이 의롭지 않다고 도움이 필요하다고 인정해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하나님 앞에 나아가 예배하게 된다. 회개하고 자복하는 심정으로 하나님을 추구하면 바로 그것이 예배다.

날마다 예수를 먹고 마시라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우리가 받아 마땅한 형벌을 받으셨다. 세상의 모든 죄가 그분을 뒤덮었다. 그분은 형벌이 우리를 영원히 넘어가도록 스스로 모든 형벌을 받을 만큼 우리를 사랑하셨다. 다시 말하지만 모든 진정한 사랑은 대속과 희생의 사랑이다. 대속의 희생을 감수하지 않으면 상한 심령과 죄인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없다.


“나는 사형선고를 받은 노예였소. 하지만 어린 양의 피 아래 숨은 덕분에 종살이에서 탈출할 수 있었지요. 지금은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거하십니다. 우리는 그분을 따라 약속의 땅으로 가는 중이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희생을 믿는가? 그렇다면 약속된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한 만찬에 참여하는 날, 당신의 가장 간절한 소망이 마침내 이루어질 것이다.

대역전의 날을 소망하라
빈 무덤, 무수한 증인의 증언, 제자들의 놀라운 변화. 이 세 가지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예수님의 부활은 사실일 수밖에 없다. 이 세상이 유일한 세상이 아니다. 이 몸이 유일한 몸이 아니다. 이 삶이 끝이 아니다. 언젠가 ‘완벽한’ 삶, 진짜 삶을 얻을 것이다.


이 사실을 생각하면 남들이 우리를 어떻게 대하든 상관없다. 이 사실을 생각하면 모든 걱정이 순식간에 사라진다. 상처를 이해하고 나면 그 상처의 기억으로 인해 남은 삶이 영광과 기쁨으로 가득해진다. 제자들은 상처 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그리며 그분이 해 주신 일을 떠올렸다. 자신들을 망쳤다고 생각했던 상처가 알고 보니 자신들을 구원한 상처였다.

하나님이 세상만사를 바로잡으실 날, 모든 슬픔이 사라질 날, 바로 주의 날, 우리의 상처도 영광스러워질 것이다. 최악이라고 생각했던 고난이 오히려 영원한 기쁨을 더해 줄 것이다. 그날, 모든 것이 역전되고 측량할 수 없는 기쁨이 밀려올 것이다. 영광의 기쁨이 우리가 겪은 상처보다 훨씬 더 커질 것이다.


그러니 이 세상의 부활과 회복이라는 빛 속에서 살자. 돈이나 권력이 생기면 하나님 나라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서 좋다. 돈이나 권력이 사라져도 하나님이 또 다른 방법으로 역사하실 테니 아무런 걱정이 없다. 우리는 그저 날마다 예수님과 함께 영광스럽고 영원하고 즐거운 은혜의 춤 속에서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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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성훈
뉴질랜드 Bible College를 졸업하고, 현재 LIGHT CHURCH의 담임으로 섬기고 있으며, City to City 복음 도시 운동에 참여하여 훈련중이다. 알고 있었지만 모르고 있었던 ‘복음’을 재발견하는 기쁨을 Tim Keller의 Book Review를 통해 나누기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