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는 대로 살지 말고 생각하는 대로 살라!

조지 오웰이 1948년에 발표한 『1984』는 전체주의가 지배하는 가상의 미래 세계를 배경으로 인간성을 지키려는 마지막 한 남자, 윈스턴 스미스를 그린 소설이다. 소설 앞부분에서 흥미로운 점은 윈스턴 스미스가 중고품 가게를 가는 장면이 나온다. 거기에서 당원이었던 그가 공책을 구입한다. 이 이야기가 왜 소설에 등장하는 것일까? 궁금하다.

‘생각하는 사람’은 그 삶이 아름답다
소설의 주인공, 윈스턴 스미스는 이 공책에 일기를 쓴다. 일기를 쓰는 것은 아주 소박한 일이지만 굉장히 중요한 의미가 있다. 왜냐하면 일기를 씀으로써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기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설에서 묘사하는 ‘생각하는 사람’, 윈스턴의 삶이 아름다워 보인다. 이는 자유를 표현한다거나 자기 의견이나 주장을 어필하는 것과 연관되어 있다.

‘생각하는 사람’은 전체주의 국가에서 ‘눈엣가시 같은 존재’
사람들이 아름다움을 느끼게 되면 그것이 많은 것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따라서 전체주의 국가는 이런 아름다운 모습을 금지한다. ‘생각하는 사람’이 당의 지시를 반대하기 때문이다. 생각하는 사람은 당에 골치 아픈 존재다. 이런 사람은 어느 날 쥐도 새도 모르게 그 존재가 사라진다. 당이 이 사람을 처형하거나 수용소에 감금해버린다.

당은 ‘생각하지 않는 사람’ 프롤레타리아를 무시한다
전체주의 국가는 최고의 지도자 ‘빅 브라더’가 있고 그 아래 고급 당원(2%)과 하급 당원(13%)이 있다. 그 밑에는 프롤레타리아(85%)가 있다. 당은 이 프롤레타리아에 대해서는 신경을 쓰지 않는다.

이들이 아무리 인원이 많거나, 행동이 거칠어도 감시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들은 당에 전혀 위협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들은 당에게 대항하지 못한다. 프롤레타리아에는 ‘생각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이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당은 관심을 두지 않는다.

당은 ‘생각하는 사람’ 하급 당원만 감시한다
당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하급 당원들만 사상 통제를 하며 감시한다. 그 통제는 텔레스크린이라는 송수신을 동시에 할 수 있는 기구와 마이크로폰, 사상경찰 및 어린이들로 조직된 스파이단에 의해 이루어진다. 결국 감시를 받던 하급 당원인 윈스턴이 걸려들었다. 윈스턴은 생각하지 말고 살았어야 했는데 말이다.

당은 결국 ‘생각하는 사람’ 윈스턴을 제거했다
윈스턴은 감옥으로 끌려갔다. 거기서 갖은 고문을 당한 끝에 만신창이가 된다. 원스턴은 마음으로는 ‘빅 브라더 타도!’를 외치고 싶었을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나중에는 빅 브라더를 사랑한다고 고백하기까지 한다. 원스턴이 심한 고문을 당했기 때문이다. 인간으로서 윈스턴은 너무나 무기력했다.

윈스턴은 ‘2+2=4’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당은 윈스턴을 ‘2+2=4’가 아니라 ‘2+2=5’라고 세뇌시켰다. 비록 소설 마지막 부분에서, 윈스턴이 총살당하는 것으로 끝을 맺지만 윈스턴은 자기의 생각을 삶으로 표현한 아름다운 사람이다.

우리는 지금 감시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다
우리는 종종 온라인으로 물건을 검색하며 광고를 본다. 이후에 휴대폰으로 광고를 보면 검색했던 물건들이 광고판에 그대로 뜬다. 집요하게 계속해서 팝업 창을 보여준다. 참 섬뜩하다 못해 정말로 세상이 무섭다는 생각마저 든다. 내가 무의식적으로 본 여러 가지 광고라도 알고리즘으로 기억하고 있다가 지체 없이 보여준다. 이런 시대가 이미 우리 앞에 도래했다. 지금은 나의 이메일과 검색어, 나의 관심사가 그대로 노출된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보배롭고 존귀한 우리에게 사고하는 능력을 선물로 주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냥 대충대충 사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며 살아야 한다. 우리가 하루하루 분주하게 살다 보면 아무 생각 없이 살게 된다. 그러면 내 생각은 죽어간다. 하지만 의식적으로 생각하고 살면 나의 생각 근육이 단련된다. 그러면 나의 인생이 달라질 수 있다.

사울의 비뚤어진 생각이 문제였다
사울은 예수 믿던 자들을 죽이고 고문하던 자였다. 그러던 그가 다메섹으로 가던 중에 부활하신 예수를 만났다. 그 후로 그는 복음을 전하는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다. 그 이후로 사도 바울은 고백한다.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디모데 전서1:13).

이전에 사울이 행했던 것들은 뭘 몰라서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했었던 것이라고 시인한다. 그가 자신의 생각에 문제가 있었음을 인정한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생각을 바꿨다. 그리고 그의 인생이 180도 바뀌었다.

생각이 인생을 바꾼다
1982년 호주에서 태어난 닉 부이치치에게는 양팔과 양다리 없이 발가락 두 개가 달린 작은 왼발만 있었다. 이로 인해 삶을 비관하며 살았던 닉은 3차례에 걸쳐 자살을 시도했지만 다행히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은지성의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라는 책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어느 날, 닉의 어머니가 닉에게 신문기사를 보여주었다. 신문에는 장애를 딛고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실려 있었다. 닉은 그 기사를 보면서 자신이 장애를 안고 태어난 것은 누구의 죄도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닉의 어머니가 닉에게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은 왜 너를 그렇게 태어나게 하셨을까? 그런 너에게 특별한 목적이 있어서야. 그걸 찾아보자.’ 닉은 그때부터 생각을 바꿨다. 자신 안에 있던 열등감도 버렸다. 닉은 두 개밖에 달려 있지 않은 발가락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다행이야. 발가락이 두 개나 있어서.’ 닉은 큰소리로 웃었다.”


현재 닉은 미국 LA에서 ‘사지 없는 삶’(Life without Limbs)이라는 장애인 비영리 단체를 만들어 세계를 돌아다니며 절망에 빠진 세상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고 있다. 닉은 자신의 생각을 바꾼 이후로 새로운 세상을 살고 있다.

성경은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골로새서 3:2)고 말씀한다
우리는 하늘에 소망을 두고, 하늘나라의 가치를 생각하며 살아야 한다. 성경이 “위의 것을 생각하라”고 했으니 우리의 생각도 하향평준화가 아니라 상향평준화로 맞추어 살아야 하지 않을까? 그러면 어제보다 오늘이 더 아름답고, 미래가 더 기대가 될 것이다. 우리 모두 사는 대로 살지 말고 생각하는 대로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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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지겸
감리교신학대학교 신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목회트렌드 2024』및『다음세대 셧다운』공저. 오클랜드감리교회 담임목사. 하나님이 사람과 소통하시려고 성육신 하신 것처럼, 기독교인도 세상과 소통할 통로가 필요하기에 인문학을 통해 세상과 만나는 이야기를 나누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