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와 교회, 그 관계

2022년부터 뉴질랜드의 휴일이 새로 생겼다. 마오리 새해 마타리키(Matariki)가 그것이다. 뉴질랜드에서 한국 사람으로 살다 보니, 새해 인사를 무려 세 번이나 나누는 셈이다.

마타리키(Matariki)는 천문학에서 플레이아데스 성단(Pleiades star cluster)이라 부른다. 이는 황소자리와 함께하며, 서양에서는 흔히 일곱자매별(Seven Sisters)이라 부른다. 이 별자리는 남반구와 북반구 모두에서 관찰할 수 있는데, 남반구에서는 6월 말에 나타나기 시작하고, 북반구에서는 2월 말에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래서 고대로부터 태평양의 마오리와 호주 원주민 어보리진뿐만 아니라, 고대 페르시아, 한국, 중국, 일본, 마야, 아즈텍 문명에서도 이 별자리를 알고 있었다.

성경에서도 세 번 언급한다. “북두성과 삼성과 묘성과 남방의 밀실을 만드셨으며”(욥 9:9), “네가 묘성을 매어 묶을 수 있으며 삼성의 띠를 풀 수 있겠느냐?”(욥 38:31)했고, “묘성과 삼성을 만드시며 사망의 그늘을 아침으로 바꾸시고 낮을 어두운 밤으로 바꾸시며 바닷물을 불러 지면에 쏟으시는 이를 찾으라. 그의 이름은 여호와시니라.”(암 5:8)했다.


묘성과 삼성이 함께 언급되고 있는데, 묘성이 바로 플레이아데스(Pleiades), 마오리가 말하는 마타리키(Matariki)이며, 삼성은 오리온(Orion)자리를 가리킨다.

조선시대 세시풍속을 기록한 <열양세시기>에는 작다는 의미로 ‘좀생이별’이라 했는데, 이 별자리가 나타나는 2월에는 별의 상태를 보고, 한 해의 농사 준비를 하기도 했다. 겨울이 다 지나고 새로운 한 해의 농사를 준비하는 어느 한 날, 해가 지고 초승달이 뜨면, 초승달 모양을 밥을 이고 가는 여인의 광주리로 연상했고, 좀생이는 밥을 얻어먹기 위해 따라가는 아이들로 비유했다. 풍년이 들 것이라는 예감! 일본 자동차 Subaru의 상표가 Pleiades이며, 8세기 일본의 고서에는 ‘무츠라보시’라고 했다.

그러고 보면, 우리 생활 대부분은 양력을 사용하면서도 음력을 사용해야 하는 경우도 있으니, 마오리 새해 마타리키도 그렇고 부활절도 그렇다. 올해는 기독교 최고의 명절인 부활절이 여느 해보다 빨랐다.

부활절은 매년 그 날짜가 다르니 춘분(春分)이 지나고 맞이하는 첫 보름이 지난 주일을 부활절로 지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부활은 복음의 핵심이다. 성경을 들여다보면 선교는 바로 이 복음을 전하는 것임을 분명하게 가르친다.

부활의 아침,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던 여인들은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하는 천사의 말로 예수님의 부활을 확인한 후, 곧장 이 부활 소식을 전하러 내달렸다. 어느 교회, 어느 기독교인 할 것 없이 이 복음을 전하는 선교적 사명을 다해야 한다.

많은 교회를 보면, 한 해의 교회 표어라면서 ‘선교하는 교회’라 내거는 것을 많이 본다. 그 표어 자체가 잘못된 것은 결코 아니다. 이것으로 시비를 따질 일도 아니다. 오히려 박수를 쳐주고 감사할 일이다. 교회가 선교하는 교회가 되어야 함은 당연하다. 그러나 선교가 교회의 여러 활동 중의 한 가지 정도로 생각하여, 즉 선교가 교회의 프로그램이 된다면 그 표어는 맞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선교가 교회에 속한 것인가? 아니다. 선교가 교회에 속한 것이 아니라면 선교는 어디에 속한 것인가? 선교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기독교인들 대부분은 선교가 교회에 속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즉 선교는 외지를 향한 전도 활동이며, 많은 교회의 활동 중에 하나라고 생각하고 있다.

교회보다 선교가 먼저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눅 24:46-47)

‘하나님의 선교’는 단순히 전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광범위한 개념을 갖는다. 즉 하나님이 이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펼치는 모든 활동이 선교이며, 이 활동의 절정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시고, 십자가에서 구속하신 사건이다. 이는 신약 교회의 존재 이전에 이미 구약에 선포되고, 예언된 말씀이다.

그러면 교회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도록 부름 받은 존재이며, 이로써 교회가 존재할 이유를 갖는다. 그러므로 교회보다 선교가 먼저임을 하나님의 백성들은 알아야 한다.

선교는 교회의 활동이 아니고 하나님의 활동
사도행전 2장에서부터 초대 예루살렘 교회 생활이 기록된다. 사도행전 6장까지 초대 예루살렘 교회가 발전하는데, 사도행전 7장에서 스데반이 순교와 함께 큰 핍박이 찾아오고, 결국 예루살렘 교회와 온 성도가 흩어지게 된다. 왜 하나님이 예루살렘 교회를 어렵게 만드셨는가? ‘하나님의 선교’를 이룰 다른 방법을 찾지 못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교회를 중요하게 여기신다. 동시에 교회가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면 과감히 ‘흩으시는’ 선교 정책을 쓰신다. 예루살렘 교회는 부흥과 함께 내적인 일들로 문제가 생기고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해야 하는 ‘하나님의 명령’을 잃어버린다. 단지 자기들의 교회 생활이 너무 즐겁고 좋아서, 하나님의 선교를 잊었나? 하나님은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일지라도 흩으시면서 선교하신다. 혹여 교회 스스로 흩어졌다면 교회의 활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지만, 하나님이 선교를 위하여 흩으셨으니, 선교는 하나님의 활동임이 증명되었다.

하나님의 선교는 예수 구속 중심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눅 24:46-48)

하나님의 선교는 ‘예수 구속 중심’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입각한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을 중심으로 선교하는 일을 교회가 반드시 이루어야 한다. 그러므로 선교의 주체는 하나님이시요, 선교의 도구는 교회이다.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48절)했다. 교회가 제대로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면 하나님은 종종 ’하나님의 선교‘를 위하여 ’교회를 흩으실 수‘도 있다는 사실을 두려워해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들은 열심히 모든 곳에 ‘예수 십자가 구속’을 전해야 한다. 하나님의 선교는 창조질서의 회복을 지향함으로써 이 땅 위에 하나님의 나라의 실현을 이루고자 하는 확고한 목표를 가져야 한다. 또한 하나님의 선교의 다양성을 교회가 수용해야 한다. 다양하게 선교하는 것이 개 교회가 베푸는 선심이 되어서는 안 된다. 직접 선교를 하든지, 간접 선교를 하든지, 기능 선교와 평신도 사역을 통하든지, 하나님의 선교를 이루고자 하는 하나님의 열심을 교회가 선교 의식의 부족으로 미루거나 거절해서는 안 된다.

선교할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선교하고자 하는 열심이 생길 때마다, 선교 현지에서의 부르심을 들을 때마다, 다양함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분명한 것은 선교는 하나님이 이 땅 위에 있는 교회들을 통해서 하신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교회의 잘못된 선교 개념이 하나님의 선교를 방해할 수도 있기에 많은 생각이 머리와 가슴에 가득 쌓인다.


지금 우리 교회는 선교하는 교회로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가? 그 일들이 선교사에게 어떤 도움이 되는가? 더 나아가 우리가 해야 할 선교 사역은 무엇인가? 나 자신이 선교하는 성도가 되기 위해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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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명균
총신신대원 졸업, 24년째 한인을 대상으로 목회를 이어가고 있으며 총회세계선교회(GMS) 뉴질랜드지부장을 맡고 있다. 크리스천라이프에는 를 연재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성경일독을 이어가는 을 5년째 집필하고 있고 뉴질랜드 초기 선교사들에 대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번 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선교적인 시각으로 다시 보면서 이 이야기를 펼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