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와의 대화

전주에서
먼 옛날 군복무 하던 시절 휴가를 받으면 달랑 장교 신분증 하나 주머니에 찔러 넣고 서울역에 나와 -아직 고속버스가 없던 시절이었다- 기차 시간을 보곤 행선지와 상관없이 제일 빨리 탈 수 있는 기차를 집어 타고 이곳저곳 다녔었다. 젊은 그때나 나이 든 이때나 역마살이 끼어 있긴 마찬가지였나 보다. 그때 어느 여름날 호남선을 타고 남으로 내려가다 다시 시외버스로 갈아타고 무심코 들려 하룻밤을 잤던 기억이 아직도 머릿속에 남아있는 도시가 전주이다.

사십여 년이 지난 올해 이번엔 혼자가 아니라 아내의 손을 잡고 만추의 가을에 호남을 돌아다녔다. 여기저기 다니다 여행 끝 무렵에 군산에서 이틀 밤을 자고 사흘째 되는 아침에 시외버스를 타고 전주로 향했다. 버스를 타기 전부터 내리기 시작한 함박눈을 보며 아내는 어린 소녀처럼 즐거워했다. 마음이 들뜨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이십여 년이 넘도록 눈이 안 내리는 나라에 살다가 와서 맞는 눈이니 비록 나이가 들었어도 정말 반가웠다(이 글을 쓸 때 필자는 뉴질랜드에 살고 있었다). 우리가 좋아하는 것을 보고 옆에 앉은 아주머니가 올해 첫눈이라고 말해 주었다.


첫눈이라는 말에 우린 둘 다 더욱 흥분했다. 버스 창밖으로 눈은 계속 내리고 있었고 우린 목소리가 커지는 것도 모르고 마음껏 눈에 얽힌 옛이야기를 나누었다. 아침나절이라 버스 안에 승객이 많지 않았던 것이 다행이었다.

눈은 계속 내리고
버스에서 내려 택시를 타고 예약해 놓은 한옥마을의 숙소에 가서 짐을 맡긴 뒤 점심을 먹으러 갔다. 눈은 계속 쏟아졌고 숙소에서 알려준 전주비빔밥을 잘하는 음식점을 찾아 걸어가는 길은 마치 설국(雪國) 속의 여행길 같았다.


주먹만 한 눈송이가 앞이 안 보일 정도로 내리는 길을 걸으며 나는 문득 백석의 시가 생각났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 밤이 좋아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라는 시구(詩句)를 머릿속으로 외우며 나는 아내의 손을 꼭 잡았다.

숙소 주인이 알려준 종로회관이란 음식점은 역사가 오래된 집이었다. 태조 이성계의 어진(御眞)이 보관되어 있는 경기전(慶基殿)의 돌담을 끼고 난 옆길에 자리 잡은 집이었는데 음식도 정갈하고 맛있었지만 창밖 풍경은 더욱 일품이었다.


경기전의 돌담 위로 소복하게 쌓여가는 흰 눈, 가지 위로 쌓이는 눈 무게에 겨워 더욱 고개를 숙인 담벼락 안의 늙은 소나무들, 눈이 와서 더욱 흥겹다는 듯이 짝을 지어 지나가는 한복차림의 젊은 남녀들이 모두가 합하여서 한 폭의 그림이었다. 우리 부부도 그 그림 속의 일부가 되어 맛있게 점심을 먹었다.

전주 한옥마을엔 생각보다 볼거리도 또 역사적으로 배울 거리도 많았다. 경기전, 정동 성당, 오목대와 이목대, 향교 등등 모두가 시간과 관심을 갖고 보고 듣고 생각할 것이 많은 곳들이었다. 아내와 나는 수학여행 간 학생들처럼 열심히 다니면서 보고 또 문화재 해설위원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렇게 꼬박 이틀을 한옥마을의 구석구석을 돌아다니고 사흘째 되는 날은 아침 식사 후에 전주의 또 하나의 명물인 덕진공원을 향했다. 덕진공원에 간 김에 공원에서 가까운 곳에 있다는 최명희 작가의 혼불 문학공원도 들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덕진공원에서
덕진공원은 생각보다 컸다. 연꽃이 만발할 때가 가장 아름답다는 덕진공원의 연못엔 비록 연꽃은 다 지고 없었지만 늦가을 이곳저곳에 흩날리는 갈대의 무리와 더불어 공원의 풍경은 곱게 나이 든 초로의 미인마냥 아름다웠다. 공원의 구석구석 아름답지 않은 곳이 없었지만 덕진공원에서 맨 처음 나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공원 입구를 들어서자마자 서있었던 늙은 나무 한 그루였다.


두 갈래로 땅에 뿌리를 박고 있는 몸통은 긴 세월을 어찌 견뎌냈는지 뼈만 남은 노인네의 정강이 같았다. 그나마 늙은 가죽이 터져서 속살이 삐져나오는 느낌이었는데 그 쇠약한 몸통 위로는 다시 몇 개의 가지들이 뻗어 나왔고 그 가지에선 다시 수없이 많은 잔가지가 새끼 쳐 나왔고 그 잔가지들은 제각기 채 떨구지 못한 가을 마지막 나뭇잎들을 잔뜩 지고 있었다.

덕진 공원 입구의 나무
그 나무를 보는 순간 나는 가슴이 철렁하는 것을 느꼈다. 그 나무가 무슨 나무인지 그 이름도 모르지만 그렇게 서있는 나무는 내게 무언가를 생각하도록 만들었다. 마치 그 나무와 닮은 누군가를 기억의 뒤안길에서 생각해 내려는 듯 아니면 그 나무와 비슷한 운명에 놓인 어느 역사적 사건이 머릿속을 섬광처럼 오가는 듯 나는 잠깐 그 나무 앞에 섰었다.


그러나 무언가를 꼭 집어서 생각해 낼 수는 없었다. 가슴 한구석이 허허로워 늦가을 찬바람이 드나드는 느낌이 들면서 머릿속은 왠지 정리가 안 되었지만 그런 느낌을 계속 지닌 채 덕진공원을 둘러보았다.


공원을 거의 다 둘러보았을 때 너무도 조용한 내 태도가 이상했던지 “무슨 일 있으세요?”하고 아내가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나는 선잠에서 깨듯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미안한 마음으로 아내에게 답했다. “무슨 일은? 공원이 하도 예뻐서…… 자 이제 우리 혼불 문학공원으로 건너갑시다.”


우리는 돌아서 공원의 후문 쪽을 향했다. 때마침 후문을 통해 젊은 남녀들이 몇 명 몰려들어왔다. 아마도 가까운 전북대학교의 학생들이었을 것이다. 싱그러운 그들의 젊은 모습이 늦가을 햇볕 속에 빛났다. “우리도 한때는 저랬겠지? ‘하며 나는 아내의 어깨를 감싸고 그들의 곁을 지나쳐갔다.


그 저녁 잠들기 전에 나무를 생각하며 시를 한 편 적어보았다.

나무와의 대화
세월(歲月)마저 너를 비껴갔구나
너의 뒤틀림은 거룩한 몸짓
나무야
너를 비껴간 세월은 모두 어디 있는가

가을도 이미 떠난 공원
초겨울 이른 추위를 뒤틀린 그 몸으로 받아내며
나무야
너는 가장 낮은 몸짓으로 그 자리에 서 있구나

너는 알고 있다
네 주위의 키 크고 곧은 나무들의 운명을
나무야
그들은 사라져도 너는 이 자리에 남아있을 것이다

너의 뒤틀림은 알고 있다
살아남기 위한 쓸모 없음(無所可用)의 쓸모를
나무야
그렇게 너는 세월을 비껴갈 줄 알았구나

내 다시 너를 찾을 때
그때도 너는 지금 같이 낮은 몸짓으로 나를 맞겠지
나무야 나무야
내가 너를 찾을 수 없을 때도 너는 여기 있겠지

너의 낮은 몸짓을 배우고 싶다

*이 나무가 장자(壯者)의 ‘장석(匠石)의 역사수(櫟社樹)’를 생각나게 했나 봅니다. 그 느낌을 써봤습니다.
2017 겨울 전주에서 석운 김동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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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동찬
서울대 영문학과 졸업. 사업 하다가 1985년 거듭남. 20년 간 Auckland Christian Assembly를 장로로 섬김. 칠십이종심소욕불유구(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라는 성현의 말씀에 힘입어 감히 지나온 삶 속에서 느꼈던 감회를 시(詩)와 산문(散文)으로 자유롭게 풀어 연재하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