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삶 동심

우리에게 복음은 하나님 창조하신 모습을 회복하는 힘이다. 잃어버린 처음 창조하신 인간의 아름다움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회복이 가능하다.

이를 위해 찾아야 할 잃어버린 자신이 있다. 어렸을 적에 더 많이 경험해 보지 못한 ‘동심’이다. 상대적이기에 한 번도 없는 이들도 있다. 단순히 위로와 사랑이라 할 수 있지만 동심은 어른이 되어 살아가는 이들이 쓰러졌을 때 다시 일어나게 하는 많은 원동력 중 하나이다. 어려서부터 하나님 사랑과 가족들의 사랑을 다양한 방법으로 가득 채운 이들은 쉽게 넘어지는 법이었다. 흔들리지만 뿌리를 깊게 내린 바닷가의 팽나무와도 같다. 넘어질 듯 흔들려도 훌훌 털고 일어나 걷는다. 다른 말로 자존감이 높아 크게 흔들리지 않는다.

어려서 안정적인 가정에서 크지 못한 아이들은 쉽게 포기하고 좌절하는 십대를 지난다. 분노가 쌓이면 악착같이 살거나 속이 단단하지 않으면 마음 중심이 심하게 흔들리는 그런 삶을 반복한다. 습관적으로 그러한 사람이 된다. 포기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있거나 늘 그렇게 사는 만사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거대하거나 힘들게 느껴지는 삶을 산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으로 화석처럼 굳어버렸다.

힘을 다해 살다가 어느 시점에 하나님을 만나 신앙생활도 온 힘을 다해 악착같이 한다. 하나님을 의지하거나 내려놓거나 맡겨드리지 못한다. 어쩌면 그렇게 열심히 사는 매일은 값지다. 그러나 그렇게 악착같이 살아온 사람이 신앙생활을 하면 한 가지 문제가 있다. 열심히 살았다. 그 탓에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너무 험난한 삶을 살았다. 늘 다투어 얻어야 했고 반복적인 싸움에 어디에도 행복했던 순간이 없었다. 결국 동심이 전무하다. 행복했더라도 너무 희미하고 뚜렷한 기억이 섬세하게 각인되어 있지 않다.

어른이 되어 시간이 흘러 잃어버린 젊음에 허탈해한다. 아이들은 시간이 흘러가며 동심을 쌓아야 할 지금을 잃고 사랑받고 있다는 확신은 없다. 사회에 발을 들인 젊은 우리는 처리해야 할 일들과 버텨야 할 일상과 사랑받지 못하는 시간은 높은 압박 속에서 살게 한다. 지치는 도시의 삶이다.
낭비도 Entropy는 물리학 용어이다. 도시 속 낭비도는 낮다. 반면, 자연 속 낭비도는 높다. 열역학법칙 2 법칙에 속하는 용어는 물리학뿐만 아니라 천문학 및 철학에서도 쓰인다.

한국 사회와 다양한 분야의 한국인들은 지난 고도성장의 결과로 오늘의 선진국 모습을 하고 있지만 여전히 성장에 목말라 있다. 성장을 위해 나와 내 주변을 심하게 압박한다. 결과 마음의 병을 얻기 시작했다.

지범 함께 서핑하는 지범은 마음에 큰 구멍이 나 있다고 표현했다. 오랜 시간 동안 방치해두어서 어떻게 채워야 할지 모르겠다 했다. 교회도 갔었고 열심히 신앙생활도 했지만, 더 열심히 하라는 압박에 마음의 병이 더욱 심해졌다고 했다. 그때였다. 압박은 낮추고 낭비는 극대화할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했고 자연 속에서 물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서핑이 그의 돌파구였다. 우린 서핑하러 다니며 정말이지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이야기를 나누며 펑펑 운다. 자기도 왜 이런지 모르겠다고 한다. 좋은 친구들을 만나고 가족을 얻었다. 예수님의 모습처럼 한 가정을 돌보는 남편의 모습으로 걷는다.

주안 뉴질랜드에서 10년을 넘게 살며 바닷가에 나와 물장구 쳐 보지 못한 청년이 이야기한다. “한국에서의 삶과 똑같은 삶을 살았어요. 장소만 옮겨졌을 뿐이지 삶은 같았습니다. 교회, 일, 집의 반복이었으니 무엇이 더 나아졌는지 모르겠습니다. 신앙에 대한 배움은 있지만 이것을 실천하고 이야기를 만들어갈 장이 회사밖에는 없는데 아시잖아요. 어른밖에 없는 회사에서 전도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삶이 막혀 있어요. 시간은 이렇게 지나고 있는데 기억에 남는 추억이 많지 않습니다.” 이곳에서의 생활이 추억이란 것이 없었다.

퀸란 선생님 예순을 훌쩍 넘긴 지긋한 선생께서 자신의 젊었을 때 서핑 할 생각을 왜 못했을까 싶다며 서핑을 배우고 싶다고 했다. 신앙은 없으시다. 자녀들을 키우고 결혼시키기까지 일하는 것에 몰두해서 시간이 지난 것도 모르던 3년 전 즈음, 늙어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칠 줄을 모르고 강습을 받고 있다. 웃음도 멈추질 않는다.

르위스 11살 르위스는 농구 외에 다른 취미가 없단다. 의사인 아버지와 좋은 추억들을 만들었을 것으로 보이는 행복한 기독교인 가정의 아이이다. 지금 서핑이 최고라 한다.

빅터 하나님을 대학생 선교회에서 열심히 섬긴 빅터는 한참 하나님 없이 일하는 것에 몰입이 되어있었다. 서핑을 통해 크리스천 서퍼들을 만나 다시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단얼 한인 교회에 오래 몸담고 있었고 키위 교회에도 나갔었던 단얼은 익스트림 스포츠에 푹 빠져 있다. 겨울이면 퀸스타운에서 시즌 방을 잡고 오래 지냈다. 교회는 나가지 않았다. 그러다 다시 크리스천 서퍼들을 만나고 오래전 교회에 다시 돌아가 늦은 30대에 귀한 자매와 결혼해 두 자녀와 함께 믿음의 가정을 꾸리고 있다.

옥히 고등학교 선생이다. 오랜 시간 미술 선생으로 있었던 이는 예술이 어떻게 사회에 복음을 나타내는 도구로 쓰일 수 있는지 물어본다. 서핑을 선교의 도구로 삼는 것이 궁금한 모양이다. 늘 답은 똑같다. 자신의 동심을 찾으라 이야기한다.

동심으로 돌아가는 것은 말씀으로 돌아가거나 ‘다시 복음으로’라는 구호와 비슷하다. 잃어버린 본질을 찾는 과정이 매우 그렇다. 이러한 우리의 일상에는 하나님의 복음과 삶의 여유를 찾을 낭만이 필요하다. 꼭 서핑이어야 할 필요가 없다. 다만 단순한 낭만이 아닌 하나님께서 가득히 부어 주시는 기쁨과 환희가 넘치는 행복과 깨달음이어야 한다. 그렇게 동심을 찾을 때 우리는 다시 함께 멀리 걸을 수 있다.

은혜를 경험한 자들의 고백과 똑같다. 그렇게 하나님을 전한다. 말씀이 살아있는 교회 공동체가 살아있는 곳으로 인도한다. 성령세례와 물세례로 새롭게 출발하는 이들의 걸음을 함께한다. 복음은 하나님의 창조하신 처음 아름다운 사람의 모습을 회복하는 힘이다. 최후 승리인 부활을 믿는다. 잃어버린 본모습을 찾고자 하는 이들은 후회에 자신을 잃었을 가능성이 높다. 미래에 대한 막연함도 한 몫 한다.

그러나 복음은 과거와 미래의 문제를 해결하고 더 나아가 지금의 나를 찾고 잃어버린 나를 찾게 하는 힘이다. 하나님을 발견한 사람에게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죄에서 자유를 얻고 삶의 끝에서 만나게 될 개인, 지역과 온 우주적인 최후에 부활을 믿는다. 그렇게 소망하며 신앙인으로 삶을 살도록 이끄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우린 오늘도 이러한 일을 기도한다. 믿으며 소망하며 사랑으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