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일이랑 해야 할 공부가 많아서 집에 못 내려갈 것 같아요. 그리고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회계사 자격증만 따면 이 바닥 떠날 거예요, 날 말리지 마세요.”
회계사 4차 시험을 앞두고 강도 높은 회사업무와 시험 준비에 지친 내가 어머니와 전화 중 한 말이다. 어머니는 분명 순간뿐이라고 생각하셨을 것이다. 그냥 현 상황이 너무 힘든 아들이 정신줄을 붙잡지 못하고 잠깐 미친 거라고. 이 상황만 잘 견디고 시험이 다 끝나면 여느 사람처럼 회사 잘 다니면서 승진하고 안정적으로 인생을 살 거라고.
“엄마, 아쉽지만 이번 크리스마스는 뉴욕 비행이 잡혀서 집에 못 내려갈 것 같아요. 헤헤, 뭐라고요? 그게 아쉬운 놈의 말투냐고요? 아, 그럼요, 으하하!”
고등학교 – 오대 회계학 전공 – 빅4 회계법인 – 공인 회계사 자격증 취득. 나는 전형적인 회계사를 지망하는 사람의 코스를 순탄히 밟아 왔다. 별다른 생각은 없었고 ‘부모님께서 나를 위해서 희생하셔서 뉴질랜드에 오셨기 때문에 나는 앞만 보고 달려야 한다. 그리고 성공으로 부모님께 보답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지금도 그 생각이 크게 바뀌지 않았지만, 성공의 기준이 사뭇 바뀌었다.
어릴 적(?) 내 기준에 성공한 사람은 흔히 어르신들께서 말씀하시는 ‘사’짜 직업, 또는 대기업 다니는 전문직이었다. 일단 자격증만 따면, 또는 대기업에만 취직하면, 고생 끝, 행복 시작이고 더울 때 시원한 곳에서, 추울 때 따듯한 곳에서 ‘콤푸타’만 따닥따닥하면 막 돈이 은행에 쌓인다고들 하셨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반은 맞고 반은 틀린 것 같다. 더울 때 시원한 곳에서, 추울 때 따뜻한 곳에서 컴퓨터를 두드리긴 했지만, 행복은 모르겠고, 내 은행도 모르겠고… 확실한 것은, 내가 열심히 따닥따닥한 만큼 우리 사장님은 행복하시고 은행에 돈이 쌓일 것 같기는 했다.
성공이 뭘까?
어느 주일, 청년부 모임까지 끝내고 몇몇 형과 누나들과 끝나가는 주말과 제발 오지 말았으면 하는 월요일을 생각하며 한숨을 쉬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딱 하루만 더 안식하셨으면 어땠을까? 힘드셨을 텐데 아싸리(?) 나흘 휴식하시고 일주일이 열흘이었다면 너무 깔끔하지 않았을까? 라는 말도 안 되는 상상의 나라를 펼치던 가운데 형님 한 분이 나에게는 꽤 충격적이었던 한마디를 던졌다.
“나는 월요일이 너무 기다려진다.”
“?”
“나는 월요일에 우리 학생들 다시 볼 생각에 너무 기대돼.”
이 말은 나에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나는 제정신을 가진 직장인이라면 금요일 저녁이 제일 행복하고, 주일 예배를 드리고 하루가 끝나갈수록 나를 옥죄어 오는 월요일의 기운에 힘이 쫙쫙 빠져야 정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나는 그냥 열심히 일하고, 승진하여 연봉이 올라가고 돈을 많이 벌면 행복할 것이고, 그것이 성공한 삶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내가 현재 행복하지 못한 이유는 돈을 충분히 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조금만 더 벌면 행복할 거라고.
하지만 팩트는 그때 난 이미 평균 이상의 연봉을 받고 있었고 처음 회계 법인에 취직했을 때보다 연봉이 두 배 이상 뛰어 있었다. 처음 일할 때보다 분명히 금전적으로 나아졌음에도 만족하지 못했고 하루하루를 그냥 그저 그렇게 주말만 기다리며 보냈다.
런던에서의 새로운 도전
나에게 승무원은 우리가 흔히 아는 대한항공 승무원들처럼 화려하고 외모가 출중하며 서비스 정신이 투철해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난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승무원을 직업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난 서비스 정신이 투철하지가 않기 때문이다. 그 외에 다른 이유는 없다.
그러다가 승무원의 꿈이 있는 당시 여자 친구, 현 약혼녀를 만났다. 화려하고 외모가 출중하며 마음씨가 참 고운 여자 친구는 코로나로 인한 락다운이 끝나자 당당히 승무원이 되었고 세계 이곳저곳을 누비며 찍은 사진들을 나에게 보여주었다.
여자 친구는 직업 만족도가 상당히 높았고 아주 행복해했다. 그리고 난 충분히 납득이 되었다. ‘승무원이라는 직업이라면 만족도가 높을 수밖에 없겠다. 하루하루가 즐거울 수밖에 없겠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도 새로운 도전을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었다.
뉴질랜드에서 자격증을 딴 후 많은 공인회계사의 다음 목표는 OE(Overseas Experience)이다. 그리고 보편적으로 영국 런던으로 많이 간다. 보수가 상대적으로 높으면서도 시간적 여유가 있어 유럽 여행을 하면서 일할 수 있는 메리트에 젊은 뉴질랜드 회계사들이 많이 찾아간다. 자격증을 따자마자 나에게도 런던에서 일할 생각 없냐는 연락과 오퍼가 종종 왔고, 영국에 이미 가 있는 회사 선배들과 고려 중인 동기들이 많았기 때문에 흔들렸다.
그러다가 새로운 도전을 고민한다면서 회계사라는 타이틀과 금전적인 보수를 놓지 못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 내 자신이 현재 필요한 것은 ‘리셋’ 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내가 지금까지 이야기를 나눈 사람들과 그들의 직업 중 제일 관심이 가고 직업 만족도에 납득이 갔었던 직업을 생각하고 그중 승무원이라는 일을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었다. 그리고 웹사이트를 잠깐잠깐 찾아보던 내가 어쩌다 보니 승무원 트레이닝을 위해 영국 런던에 도착해 있었다.
많은 회계사 동료는 회계사 자격증을 따고 OE를 위해 떠난 런던에 나는 승무원으로서 교육받기 위해 도착해 있었다. 정말 그 당시로부터 1년 전에는 상상도 못 할 자리였을 것이다.
당시에 여자 친구는 내가 고민하고 결정을 내릴 때 반대가 컸고 혹시 자기가 나의 꿈과 커리어를 가로막는 게 아닌가 하면서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에 꿈이 없었고, 오히려 내 생각을 ‘리셋’할 수 있게 도와준 그녀에게 정말 고마웠다.
현재 나는 서비스 정신이 나름 투철하고, 회계사로서는 보지 못했을 승무원으로서의 나의 새로운 모습을 찾아가고 있다. 또한 승무원으로서의 월요일이라고 볼 수 있는 ‘Next Trip’이 너무 기다려지고, 많은 경험을 누리며 만족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
옳고 그른 길
내가 현재 가는 길이 성공의 길인지, 옳은 길 인지는 잘 모르겠다. 남들이 생각했을 때 왜 굳이? 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난 이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인생에 있어서 옳은 길 그른 길이 어디 있겠는가? 하나님 안에서만 걸으면 그 길이 옳은 길이고, 길 걷다 잠시 꽃냄새도 맡고 가고, 넘어져서 무릎도 까여보고, 그러다가 좋은 짝꿍 만나서 손잡고 오손도손 걷다 보면 하나님이 준비해 주신 무엇인가가 있겠지!’라고 생각하면서 조금 내려놓고 걸어가 보기로 했다.
현재 나는 길 가다가 잠시 꽃냄새 맡고 있는 거고, 그러다가 다시 다리 털고 일어나서 걷던 길 걸을 수도 있고, 꽃밭으로 고꾸라져서 뒹굴다 새로운 길을 걸을 수도 있지만 한번 하나님께 맡겨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