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티, 하나님의 말씀이 내 삶을 해석해 주는 것

성경은 해석이나 연구를 위해 주신 책이 아니라 순종을 위해 주신 말씀이다. 순종하기 위해 읽으면 성경이 내 눈앞에서 열리게 된다. 큐티는 묵상이 아니라 묵종 훈련이다.

성경을 읽고 큐티하는 목적이 바뀌면 큐티가 쉽고 지속적이 된다. 큐티의 중요한 목적 가운데 하나가 말씀으로 내 인생의 사건을 해석하는 것이다. 말씀이라는 안경을 쓰고 내 삶을 들여다보면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 큐티는 내가 말씀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내 인생과 문제를 해석해 주는 것이다.

내 인생에 ‘바로’가 있다
제자훈련을 하다 보면 인간관계의 어려움을 호소하는 일이 많다. ‘저 사람만 없으면 직장 생활이 편할 텐데…’ 이럴 땐 출애굽기의 바로를 묵상하면 좋다.


모세가 광야 40년 후에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돌아왔을 때 혀가 둔한 자였고 동족들은 여전히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하나님은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심으로 모세를 연단시키시고, 재앙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한다.


바로는 모세를 성장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특별 캐스팅이었다. 400년간 살아온 삶의 터전인 비옥한 고센을 떠나는 일이 쉽지 않았다. 바로는 모세를 이스라엘의 리더로 세우기 위해 수고(?)한 셈이다.

이런 관점으로 나를 힘들게 하는 ‘바로’ 같은 사람을 보면 해석이 된다. 바로 역할은 어디나 존재한다. 가족 중에도 있고 교회 안에도 있게 마련이다. 어쩌면 하나님께서 내 믿음과 인격의 성장을 위해 붙여 주신 바로는 아닐까?

큐티는 말씀으로 내 삶을 비추어 보고, 내 인생의 문제를 해석하는 것이다. 평소에는 신앙생활을 잘하다가 고난이 닥치면 그대로 주저앉고 넘어지는 이유는 말씀으로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성경도 많이 읽고, 성경 지식은 많은데 실제로 그 말씀이 내 삶을 조명해 주지 않기에 자주 넘어진다.


‘바로’가 해석되지 않아 인생이 망가지는 경우도 있다. 풍랑을 통하여서 은혜의 항구에 더 빨리 가는 사람이 있고, 그 풍랑 때문에 좌절하는 사람이 있다. 바람이 불어오면 은혜의 날개를 펴고 창공 높이 날아오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것 때문에 주저앉는 사람이 있다.


큐티를 통해 말씀으로 우리 인생의 문제를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자. 믿음의 날개를 펴고 창공을 날자.


환경은 변하지 않았지만
큐티선교회 총무로 섬기던 시절 경험한 일이다. 서울 구로동에서 우유를 배달하면서 어린 아들을 키우던 미화(가명) 자매 이야기다. 남편이 공장에서 일하면서 어렵사리 살던 미화 자매에게 날 벼락같은 일이 생겼다. 남편의 외도.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단다. 남편에 대한 실망은 미움으로 변하고, 하루에도 몇 번이나 이혼을 생각하던 중에 수요 큐티 모임을 소개받아 나오게 되었다.


‘바로’에 대한 말씀을 듣고 나의 거룩을 위해 수고하는 남편(?)을 다른 관점으로 보게 되었다. 공장에 나가면서도 셔츠를 다려서 옷걸이에 걸어 놓고 자는 남편이 미워죽겠어도 셔츠 주머니에 용돈과 손수건을 넣어두며 ‘바람난 남편이라도 감사하다’고 기도하니 그녀의 지옥 같은 마음이 천국으로 변하더란 간증을 했었다.


말씀으로 해석하고 나니 상황은 변하지 않았지만 이미 승리한 것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말씀을 펼치고 겸손히 내 삶을 내려놓자. 읽고 묵상하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내 문제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씀하실지를 기대해 보자.


내 체면이나 이해타산이 아니라 말씀의 프리즘으로 통과시켜 보면 보지 못했던 면이 보이기 시작한다. 믿음의 눈이 열려 인생의 문제가 해석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이 아니던가. 큐티를 통해 날마다 새롭게 열리는 하루를 기대해 보자.

완벽함이 아닌 솔직함
큐티는 말씀의 거울에 나를 비추는 과정이다. 큐티하면서 다른 사람이 생각나기도 한다. 이 말씀은 A가 들었으면 정말 좋겠다 싶다. 아니다. 큐티는 말씀으로 ‘내’ 사건을 해석하는 과정이다. 그러려면 ‘솔직함’이 필요하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완벽함보다 솔직함을 원하신다. 하나님께는 숨김이 없이 나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내어 보이면 좋겠다. 비로소 말씀에 비추인 내 삶의 문제가 제대로 보이게 된다.

아주 오래전 이야기다. 아들이 고열로 여러 날을 고생하다 원인이 밝혀지지 않아 뇌파검사를 받게 되었다. 검사실 앞에서 기다리는데 기도해도 마음이 힘들었다.


문득 아침에 큐티한 말씀이 생각났다. 역대하 22장 34절 “이 아하스왕이 곤고할 때에 더 여호와 앞에 범죄하여…” 내 마음이 곤고한데 더 범죄한 일이 무엇일까를 묵상하는데 한 집사님의 얼굴이 생각났다. 수련회 준비하면서 서로 마음이 상했던 분이다. 전화를 드려 사과하라는 하나님의 마음이 느껴지는데, 머뭇거리다 전화 드려 “죄송합니다.” 정도로 얼버무려 사과를 드렸다. 신기하게 마음에 평안이 찾아왔다.


그 일로 교회 안에 내가 그 집사님에게 무릎을 조아려 용서를 빌었다는 다소 과장된 말이 돌았는데, 전혀 마음의 미동조차 없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적용했고, 말씀으로 내 사건이 해석되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솔직하지 않으면 말씀이 내 문제를 해석해 주지 않는다.

치우침이 없는 겸손으로
하나님의 말씀은 우로나 좌로나 치우지지 말라고 하신다. 치우침은 고집과 편견이다. 자기의 생각을 내려놓지 않으면 내 인생의 문제가 말씀으로 해석되지 않는다. 겸손은 하나님의 항상 옳으심을 인정하는 것이다.


‘하나님 이렇게 하면 안 되지요. 이번엔 하나님이 틀렸습니다.’고 하는 말을 들었던 적이 있다. 인생을 살면서 경험과 지식으로 축적된 지기만의 생각을 내려놓는 순간 말씀이 열리고, 내 인생이 해석되기 시작한다. 큐티는 내 마음을 비우고, 하나님의 말씀을 채우는 시간이다.

부산에서 목회할 때, 이사 심방을 간 적이 있다. 오후에 다소 애매한 시간에 심방을 했는데, 이유는 어디서 좋은 시간을 받았단다. 심방 중에 들은 충격적인 이야기, 남쪽으로 이사 오려고 집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고 한다. 함께 사시는 시어머니의 영향인 듯했다. 미신이나 우상은 사람을 옭맨다. 지시하고 명령한다. 하나님은 어디로 가든지 함께 하시겠다 약속하신다. 형통하고 평탄하게 하신다(수 1:7-9).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면 하나님께서 내 인생의 어떤 사건도 해석해 주시고, 고난이 변하여 축복이 되게 하심을 경험한다.

큐티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내 인생의 고난과 문제를 해석하여, 축복으로 변화되는 신비한 여정이다. 막힌 곳이 뚫리는 ‘형통’, 골짜기가 돋우어지는 ‘평탄’, 큐티하는 자에게 약속된 하나님의 복임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