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저렇게 웃을 수 있어?”

협심증과 스텐트(stent)
지난 오월에 오클랜드 근교의 산에 올랐다가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지고 숨이 막혀서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한참을 쉬었다가 엉금엉금 기다시피 내려와 병원을 찾았더니 협심증이라고 했다. 다시 심장 전문의를 만나 정밀 검사를 한 뒤 결국 심장 근처의 혈관에 스텐트(stent)를 두 개나 주입하는 시술을 받았다.


시술이 끝난 뒤 의사는 스텐트를 주입한 사람들도 정상적인 생활에 문제가 없고 수명에도 지장이 없다고 말했다. 나는 의사의 말을 믿었다, 그리고 믿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내 속에는 나 이외에 내가 제어할 수 없는 또 하나의 ‘나’가 있었다.


그 ‘나’는 시시로 내 머릿속에 나타나 ‘너는 이제 정상인이 아니야. 너의 삶은 이젠 끝나가고 있어,’라고 속삭였다. 나는 그 속삭임을 무시하려고 노력했지만 조금만 몸에 이상이 오면 그 불길한 속삭임은 다시 나를 찾아왔다.

뉴질랜드의 칠월은 한겨울이다. 비가 많이 오고 날씨도 우중충하며 춥다. 시술을 받은 지 얼마 안 돼서 그런지 그해 칠월은 유난히 춥게 느껴졌고 몸이 안 좋을 때가 많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내 속의 다른 ‘나’의 말이 맞는 것같이 느껴졌다.


‘정말 나는 이제 정상인이 아닐까? 이런 식으로 내 삶이 끝나가는 것이 사실일까’하는 생각에 사로잡히면 허탈감과 무력증에 빠지는 경우가 많았다.

도저히 그런 상태로 겨울을 견뎌낼 자신이 없어서 아내와 같이 한국으로 갔다. 한국의 칠월은 한여름이니 추위보다는 더위가 한결 나을 것 같고 또 고국에 가면 분위기가 바뀌어서 우울한 마음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한국에 와서 큰딸 집에 있으면서 손주들과 시간을 보내고 또 가까운 친척과 친구들을 만나 회포를 풀면서 기분이 많이 좋아졌다.

한번은 몇 명의 동창과 만나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내가 두 달 전에 스텐트를 주입했다고 하자 두 명의 동창이 자기들은 이미 몇 년 전에 나와 비슷한 증상으로 스텐트를 주입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아직 건강에 아무런 이상이 없고 정상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며 나를 안심시켰다.

그러면서 기분 전환에는 여행이 제일 좋다면서 기왕 한국에 왔으니 한 곳에만 있지 말고 이곳저곳 돌아다니라고 권했다. 옛날과 달리 한국의 지방이 많이 좋아져서 의외로 가볼 곳이 많다며 특히 여름철엔 강원도 일대가 좋을 것이라고 했다.

양양 오일장에서
그렇지 않아도 한국에 온 김에 여기저기를 다녀보고 싶던 나는 아내와 같이 강원도로 떠났다. 맨 처음 간 곳은 설악산이었다. 까마득한 옛날 신혼여행을 왔던 곳이기에 설악산에 오면 언제나 아름다웠던 추억이 묻어 나온다.


사흘을 설악산에 머물면서 여유롭게 돌아다닌 뒤 양양으로 내려왔다. 양양에서 며칠 머물며 주변 명소들을 둘러볼 생각이었다. 오후 늦게 설악산을 떠났기에 양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저녁때가 다 돼서 우선 숙소를 구한 뒤 저녁을 먹고 밤을 지냈다. 다음 날 아침 일어나 아침 식사를 하러 나가려고 하자 숙소 주인아저씨가 오늘 마침 양양 오일장이 열리는 날이니 가보면 좋을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재미있을 것 같으니 가서 구경도 하고 거기서 아침도 먹자고 하는 아내의 말에 나도 솔깃해서 숙소에서 멀지 않은 장터를 찾아갔다.

장이 열리는 남대천 주차장에는 차들이 빼곡히 서 있었다. 차에서 나와 벌써 걷고 있는 사람들을 따라 남대천을 끼고 걸으며 나는 문득 해마다 남대천으로 돌아온다는 연어 생각을 했다.

남대천은 우리나라로 돌아오는 연어의 70% 이상이 이곳으로 돌아오는 강이다. 남대천에서 태어나 머나먼 바다로 나갔다가 몇 년간 성장한 뒤 갖은 고생 끝에 다시 남대천으로 돌아와 산란을 한 뒤 삶을 마감한다는 연어 생각을 하며 나는 사람보다 낫다는 느낌이 들었다. 연어는 산란을 하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태어난 고향인 남대천으로 돌아오는데 사람인 나는 해야 할 일은 제쳐 놓고 건강만 걱정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이른 아침이었지만 몇 시부터 시작되었는지 둑길 따라 걸어가는 사람들이 엄청 많았다. 곧이어 시작되는 오일장에는 파는 사람들과 그 사이를 돌아다니는 손님들로 북적북적했다. 나물을 파는 할머니로부터 가지각색 과일을 파는 상점, 꽃집, 보기만 해도 침이 도는 먹거리 등등, 장터는 도시의 말쑥한 백화점이나 쇼핑몰과 달리 시끌벅적하면서도 사람 냄새로 그득했다. 바삐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활기찬 모습에 나도 기운이 나는 느낌이었다.

우선 한 바퀴 돌아보며 아침을 먹자는 아내의 말 따라 좀 더 발길을 내밀다가 나는 장터의 한가운데서 함박 웃고 있는 아주머니 한 분을 만났다. 그 순간 나는 가슴이 시원해지면서 무언가가 몸 한가운데를 관통하며 쑤욱 빠져나가는 느낌을 받았다. 아주머니의 함박웃음은 참으로 순진무구한 웃음이었다. 아무런 조건 없이 마음껏 웃는 웃음이었다. 그 웃음을 보면 누구라도 같이 따라 웃고 싶은 웃음이었다. 나도 웃고 싶었다.

그러나 혹시라도 아주머니가 민망해하실까 웃지도 못하며 아주머니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멀리 떨어져 있었기에 나는 아주머니가 파는 물건이 무엇인지 몰랐다. 하지만 물건을 담은 손수레를 휘감은 광고 문구에 ‘정선장터 명물 삼순이’라고 쓴 것을 보니 멀리 정선에서부터 물건을 팔러 오신 것이 분명했다.


정선에서부터 양양까지 오려면 새벽 일찍 나오셨을 텐데 피곤한 기색도 없고 여기저기 장날을 쫓아다니며 장을 보러 다니자면 결코 쉽지 않은 삶일 텐데 어떻게 저렇게 호쾌하게 웃으실 수 있을까 생각할 때 나는 절로 옷깃을 여밀 수밖에 없었다.

조금 뒤 나는 아내의 손을 잡고 다시 장터를 돌았다. 심한 허기를 느꼈다. 아주머니의 호쾌한 웃음에 몸에서 무언가 빠져나간 느낌이 들었기에 그렇게 배가 고팠는지도 모르겠다. 아내와 같이 장터 한쪽에서 아침으로 잔치국수를 먹으며 나는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국수를 먹는 기분이었다. 두 달 전 스텐트를 심은 뒤 떠났던 입맛이 돌아오는 순간이었고 그렇게 끈질기게 머릿속을 떠돌던 ‘불안한 속삭임’이 떠나간 순간이었다.

그 웃음, 장터 아주머니의 그 호쾌하고 순진무구한 웃음, 앞으로 언제든 삶이 힘들어질 때 나는 그 웃음을 생각하며 극복할 것이라고 다짐하며 그날 장터에서 돌아와서 시(詩)를 한 편 썼다.

너 저렇게 웃을 수 있어?
양양 오일장에 갔다
사람 사는 냄새와 소리 그리워
찾아간 장터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다
이 여인의 함박웃음을 만났다.

순간
내 머릿속 장터엔
사람도 냄새도 소리도 사라지고
여인의 함박웃음만 남았다

너 저렇게 웃을 수 있어?
너 저렇게 웃어본 적 있어?
뒷짐 지고 구경이나 하는 너는 평생 저렇게 못 웃어!

나는 옷깃을 여몄다
나는 평생을 못 웃어 본 함박웃음을
온몸으로 웃고 있는 여인에게
고개가 숙여졌다

장터엔 다시 사람 사는 냄새와 소리 그득했다.

추신: 이 글을 읽는 독자 여러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소문만복래(笑門萬福來)라는 말을 믿으시고 2024년 새해엔 언제나 장터의 이 아주머니와 같이 함박 웃으며 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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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동찬
서울대 영문학과 졸업. 사업 하다가 1985년 거듭남. 20년 간 Auckland Christian Assembly를 장로로 섬김. 칠십이종심소욕불유구(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라는 성현의 말씀에 힘입어 감히 지나온 삶 속에서 느꼈던 감회를 시(詩)와 산문(散文)으로 자유롭게 풀어 연재하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