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황찬란한 악덕
그리스도인들에 ‘예배’는 익숙한 개념입니다. 주일과 주중에 교회에서 그리고 가정에서도 예배를 드리면서 자신의 삶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기를 위해 부단히 애를 씁니다. 하지만 익숙한 개념일수록 그 개념의 진정한 본질과 속성에 대해 깊이 묵상하지 않는다면, 습관을 좇아, 혹은 형식주의에 빠져 무의미한 행위로 반복할 확률이 높습니다.
특히 예배를 ‘존재’와 ‘행함’의 관계에서 ‘얼마나 많은 예배 행위를 하느냐?’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누가 어떻게 예배를 드리느냐?’입니다. 그 이유는 아직 존재가 해결되지 않은 존재, 즉 하나님을 알지 못한 존재가 드리는 예배는 이교도의 ‘휘황찬란한 악덕’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중세교회처럼 아무리 휘황찬란하게 종교 행위를 하더라도, 만약 예배자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신앙, 확고한 소망이 없다면 그런 예배는 본질이 치명적으로 결여된 무의미한, 심지어 악한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현대의 인간이 흥미를 느끼는 종교는 예배에 더 이상 신적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있는 듯 보입니다. 예배를 일반 사회의 문화 정도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실 예배를 더 이상 종교의식의 행위로 이해하지 않고 단순히 인문 교양 정도의 문화 활동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더 짙어지고 있습니다. 즉 ‘예배(cultus)’가 아니라 단지 ‘문화(culture)’만을 원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예배 생태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래전부터 ‘실험적 예배’의 한 유형으로 열린 예배라는 유행을 따르는 가치관이 예배의 기획과 운영에 깊숙이 들어와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예배가 마치 문화 센터에서 펼쳐지는 문화 공연 식의 흐름으로 뒤바뀌는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복음보다는 인본주의적이고 실용주의적인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중심으로 예배 공동체라는 교회의 정체성을 희석하고 있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을 지나 새롭게 맞이하는 AI 인공지능 시대의 변화를 따라 교회 공동체의 예배 의식에 대한 새로운 수정과 개정을 시도하는 일은 정당한 일이며, 동시에 필수 불가결한 시대적 요청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사회·문화적 분석을 기초하여 시도된, 예배 갱신 운동들이 비록 비판되어야 할 부분도 있지만 예배자로서의 청중들을 고려한 시도들로 마땅히 존중되어야 할 필요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배인지 공연인지, 하나님을 경외하는 행위인지 찬양 콘서트장인지 모를 정도의 신학적 애매모호함이 예배 현장 가운데 가득 차 있는 형편이기도 합니다.
예배의 주체요 대상인 하나님께서 예배의 중심에서 주변으로 밀려나고, 오히려 인간이 예배의 중심으로 올라섰습니다. 교회가 문화에 순응하고 예배자들에게 민감한 척하면서, 사람을 예배의 중심에 올려놓은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날 문화의 지배적 성향의 하나인 ‘감각적’ 문화는 사람들의 마음에 오락과 즐거움을 추구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 인식되면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엄위에 잠기는 시간보다 자기들의 만족과 즐거움이 충족되는 그런 예배 아닌 예배를 추구하게 되었습니다.
예배와 계시
무엇보다 예배의 본질은 오로지 하나님이, 하나님으로서 영광을 받고 칭송을 받는 데 있습니다. 이를 결핍한 모든 예배는 하나님의 영광에 전혀 미치지 못하며 마찬가지로 참된 예배가 될 수 없습니다.
중요한 점은 예배를 인간의 노력과 창조적 해석의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문화적 산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모든 행위가 종교적 행위라고 불리는 것은 그 행위들이 우리를 한 인격적 존재에게 연관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 관계의 속성은 하나님이 자기 형상을 따라 창조한 인간에게 하나님 자신을 객관적 그리고 주관적 두 가지 방편으로 계시한다는 사실을 포함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개입과 역사가 동시에 진행되는 과정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곧 예배를 단순히 문화의 시각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 안에서 지니는 그 의미와 역할로 이해해야 합니다. 즉 예배와 예배자의 삶이란, 전적인 하나님의 일하심에 인간이 참여하는 의식적 행위이며 삶의 방식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전통적 예배가 없는 종교란 존재하지 않고, 또한 이 모든 것은 계시 개념과 한데 어울려 있습니다. 계시에 대한 이해가 없는, 즉 계시에 대한 신뢰 없이는 종교도 존재할 수 없으며 가장 대표적인 종교적 행위인 예배도 응당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 기독교 신학의 입장입니다.
특히 ‘초자연적인 계시’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하는데 그 이유는 자연적인 계시에만 근거한 예배는 정령 숭배처럼 우상숭배로 전락할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종교는 자연적 계시만이 아니라 항상 실재적인 초자연적 계시에도 근거합니다.
여기서 실재적이란 의미는 특별하게 계시된 초자연적 성경 계시로, 우리의 실제적 삶을 이끌고, 인도하고, 주도해 나가는 현실적이고 사실적이란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인간은 천성적으로 초자연적인 것을 인정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예배자의 삶을 존재와 행위의 관계로 재해석해 보면, 계시 의존 사색을 적극적으로 하지 않는 존재가 드리는 예배 행위는 비성경적이라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삶의 모든 순간마다 계시를 관통하지 않는 행위는 의미가 없는 삶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계시 의존 사색을 적극적으로 하는 삶은 하나님 앞에 겸비하게 엎드려 은혜를 겸손히 갈망하며 올바른 예배자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즉 계시 앞에 선 존재가 계시에 근거한 예배를 할 수 있습니다.
예배자의 삶
구약성경에서 예배에 대한 대표적인 용어로 “아바드”는 그 의미는 “봉사” 또는 “섬김”입니다. 이 용어는 영어의 service라는 예배 용어의 유래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두 번째 용어는 “샤하아”라는 것으로서 그 의미는 “굴복하는 것”, “자신을 엎드리는 것”으로서 숭배, 순종, 봉사의 종교적인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표현은 “머리를 숙여 경배했다”라든가, “엎드려 경배했다”하고 구약에 여러 곳에서 쓰인 것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공통적으로 구약에 나타난 용어들을 종합해 예배의 의미를 정리해 보면 곧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자주성을 버리고 그의 뜻을 따르며 섬겨야 할 존재라는 사실과, 경배와 복종의 생활이 예배자들의 주요한 삶의 근본이 되어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예배의 본질은 ‘하나님께 순종하며 경외함’을 의미합니다. 또한 예배를 나타내는 용어들은 하나님에 대한 이스라엘 사람의 내적인 마음의 기질을 표현한 것인데, 이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의 자세를 나타냅니다.
그러나 주를 경외함이란 라틴어 ‘종교(religio)’에 담긴 놀람과 두려움의 대상으로서 이스라엘에 초월하여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사랑의 대상이 되므로, 다른 종교적 태도들로 전이되어 나타납니다. 그래서 예배란 믿다, 의지하다, 신뢰하다, 피난처를 삼다, 기대하다 심지어 하나님을 사랑하다 등으로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이처럼 참된 예배자의 근본적인 구성 요소는 ‘절대적 의존에 대한 의식’입니다. 절대 주요, 무한 주이신 하나님을 향한 절대 의존 의식이 없는 한 그 어떤 외적인 예배 행위도 큰 의미가 없습니다. 기독교적으로 표현하자면 믿음이 없는 한 하나님을 향해 드리는 그 어떤 행위도 무가치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절대 의존 의식이 없이 드리는 예배자의 삶은 ‘말로만 하는 공허한 예배’이며 ‘차갑고 죽은 형식주의’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배를 위해 부름을 받았고,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한 존재입니다. 그리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공동체인 교회의 가장 중심되는 목적은 구약에 나타나는 이스라엘 삶의 이야기를 통해 드러나고,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돌아가심, 부활과 승천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알려진 성 삼위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 있습니다.
예배의 목적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께 영과 진리로 말씀 안에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배를 통해 영광 받으시려고 인간을 창조하시고 구원하셨습니다. 그리고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경외함’이며 하나님을 믿고 의지함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신앙의 원칙’으로만 가능한데 그 이유는 신앙의 대상을 신뢰하지 않은 채 경배의 행위를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예배하는 행위보다 반드시 우선시되어야 할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경배하는 행위보다 반드시 우선 되어야 할 것은 하나님을 먼저 알아야 하며 그 앎에 근거해 하나님을 신뢰해야 하며, 그 신뢰에 근거해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즉 하나님을 아는 존재, 하나님을 신뢰하는 존재, 하나님을 사랑하는 존재가 곧 ‘그리스도인’이라는 존재이며, 이 존재성이 먼저 담보되어야 비로소 하나님을 경외하는 예배를 할 수 있게 됩니다.<끝>
출처: 김용규,『신; 인문학으로 읽는 하나님과 서양 문명 이야기』(IVP 출판사, 2021)을 저자와 출판사의 허락을 통해 책에서 다뤄지는 기독교 신학의 내용을 필자의 관점에서 재 인용과 재 해석을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