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 시 엘리베이터 사용 금액 500만원 주차 요금 50배”

얼마 전 한국 일간지들의 일면을 장식한 어느 아파트 분쟁에 붙여진 공고문이라고 했다. 기존 입주자들이 공식 분양가 보다 할인된 금액으로 잔여 세대를 분양받은 가구의 이사를 막기 위한 조치라고 하던데 선뜻 이해되지 않았다.

자신이 지불한 금액보다 적게 지불한 이를 샘내 하는 것을 막을 수야 없겠으나, 그렇다고 그들에게 집단적 불이익을 가하겠다는 발상이 어떻게 가능한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아파트 가격이 다시 원분양가로 오를 때까지 싸게 분양받은 이들의 입주를 막겠다는 주민 결의가 있었다는 기자의 취재 내용을 보고 나서야 이들의 목적이 아파트 가치의 하락을 걱정한 자구책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오래전 서울 강남의 어느 아파트에서는 입주자 회의에서 정한 금액 아래로 아파트를 매매하는 중개인과 급하게 집을 팔아야 하는 이웃에 대한 집단 따돌림이 있었다는 기사를 접한 적도 있었는데 이 정도면 현대판 요새 전쟁(Pā Wars)이라 칭할 만할 것이다.

“가족 간에 사랑과 믿음을 서로 나누고…(중략)… 이러한 생활을 통해서 직장 또는 학교생활에서 얻은 긴장감을 해소시키고 안정을 얻을 수 있다.”

위키 백과에서 ‘집’을 검색하면 대략 이 정도의 의미가 기술된다. 우리 머릿속에도 크게 다르지 않은 집에 대한 그림이 그려질 것이다. 하지만 이제 전쟁터가 되어버린 그 아파트 주민들은 그 집이 가지고 있는 가치를 더 이상 발견할 수 없을지 모르겠다.

언젠가부터 우리 주변의 모든 것은 그 본래의 가치를 잃고 재산을 증식시키거나 아니면 그 재산을 자랑하기 위한 도구로 전환되고 말았다. 그 가치가 숫자로 환산되기 시작하면서 우리 사회 곳곳에서 ‘그것’의 본래 가치를 찾기 힘든 시간을 맞고 있다.

가치는 무엇이고 그것은 누가 결정하는가?
기독교 세계관에서 가치는 존재와 맞닿아 있다. 우리 각자의 삶에 부여된 존재의 가치는 그 가치를 부여하신 하나님을 통해 인정된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살아가면서 일하고 경험하며 소유하는 모든 것에는 그 가치가 담겨있다. 그 본연의 가치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주어진 그 본래 가치는 인간의 욕망과 함께 역사를 통해 흐르는 시대의 가치에 의해 왜곡되고 훼손되어 버렸다.

그 역사의 한편에서, 현재 인류는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이 견인한 자본주의의 발현 이후 지금껏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물질적 풍요에 젖어 있다. 그리고 자본은 모든 것의 가치를 일거에 뒤틀어 버리고 말았다. 거대 맘몬의 출현 앞에 인류는 그가 제공하는 풍요의 달콤함에 빠져 더 이상 다른 어떤 가치도 대수로울 수 없었던 것일까?

가정의 안전과 마을 공동체의 기초단위가 되는 집의 가치가 돈으로 환산되는 순간 이웃과의 관계는 정이 아닌 이익으로 뭉쳐진 이익 공동체로 남을 뿐이다. 공동체는 개인의 이익을 위한 수단이 되고 목적이 사라진 관계는 그 본연의 가치를 잃고 만다. 노동이 아닌 자산이 부를 결정하는 우리 시대가 낳은 왜곡의 단면인 것이다.

그렇다면 노동의 가치는 어떠할까?
노동은 창조와 함께 시작된다. 하나님께서 일을 통해 만드신 창조 세계에 인간에게 부여하신 관리의 역할이 더해져 이 땅은 그저 아름답고 하나님의 거룩함이 드러나는 그런 공간이었다. 인간의 욕망이 단절시킨 하나님과의 관계가 이 땅의 노동을 더욱 고되게 했을지라도 인간은 그 노동을 통해 성취의 보람과 생산의 기쁨을 허락받는다.

노동의 히브리 원어인 ‘아보다’는 예배와 섬김, 그리고 봉사의 의미를 함께 담고 있다. 하나님과 함께 일하고 그 노동을 통해 영광 받으실 하나님을 기다리는 히브리인들의 간절함이 담겨있는 것이다.

이 원어는 또한 인류 스스로 서로가 서로를 위해 일할 기회를 허락받았음이 노동의 근본 가치임을 나타내고 있다. 타자를 위한 나. 나의 시간과 노력을 통해 타자를 이롭게 하는 행위로서 노동의 의미를 함께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크리스천들의 예배가 스스로를 위함이 아닌 오롯이 하나님을 향한 헌신의 강력한 표현이듯 그들의 노동 역시 스스로를 향해 있지 않다고 고대 히브리인들은 믿고 있었던 것이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창조 세계를 통해 인간과 함께 일구고자 하셨던 모든 수고로움의 근원과 그 관계에 뿌리를 두고 있다. 우리 인류가 허락받은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이루기 위한 삶이 오롯이 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던 것이다.

‘이타적 삶’
우리의 존재는 타인을 이롭게 함으로 하나님께 온전한 영광을 드릴 수 있는 그 관계에 철저하게 묶여있다. 물론 인간에게 부여된 모든 시간은 각자에게 자유롭게 부여된 의지에 의해 선택 가능하겠으나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선택한 삶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소망할 수 없음은 자명하다.

그러한 삶에서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는 또한 얼마나 공허할 것인가?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 없이 하나님 나라를 정의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이웃 없이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바르게 정의할 수 없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본연의 가치를 시대에 따라 왜곡하거나 훼손할 수 없다. 그 가치가 임의로 전도될 때 우리는 그것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으로부터 분리되는 경험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 입으로 쉽게 ‘사악하다’ 정의하는 세상의 일부로 우리 스스로를 밀어 넣고 마는 것이다.

가치의 회복은 그렇기에 단순히 우리 삶의 회복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그렇게 변화된 우리 삶을 통해 하나님께서 다시 이루실 그의 나라와 그곳에서 영원토록 그치지 않을 그의 영광을 이 땅 가운데 이루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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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익형
레이드로 대학에서 성서연구와 공공신학으로 학부와 대학원 석사 과정을 마쳤고, 현재 취약계층을 대상으로 사역하고 있는 나눔공동체 낮은마음의 대표 간사로 일하고 있다. 성도와 교회가 함께 섬기고 있는 낮음의 사역 안에서 교회와 세상의 연대를 통해 이루시는 하나님 나라에 비전을 두고 세상의 낮은 곳에서 일함을 즐거워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