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겐슈타인의 언어게임(Language game): 시간

과학적 언어 – 우주적 자연의 시간
보통 해가 뜨고 지면 하루가 지난다고 할 때 그것은 우주적 시간입니다. 과학의 영역에서 진화를 말하고 천체의 운동을 말하는 시간입니다. 그것은 자연의 시간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우주적 시간, 자연의 시간, 객관적 시간은 같은 뜻으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자연의 시간으로 최소의 단위인 눈 깜빡하면 지나가는 1초는 처음 천체의 운행에 그 기초를 둔 자연적 시간으로, 지구가 한 바퀴 자전하는 데 걸리는 시간을 86,400으로 나눈 값입니다. 그러나 지구의 불규칙한 자전과 조석(Tide)의 영향으로 자전 주기가 조금씩 느려지는 문제가 있어, 1967년 국제도량형총회(CGPM)에서 세슘(Cs)-133 원자의 9,192,631,770번의 진동수를 기준으로 1초가 재정의 되었습니다. 그리고 1초는 1/60 분, 1/3,600 시간, 1/86,400 일로 정의합니다.

우리는 흔히 누구에게나 공평한 길이가 있는 시간을 경험하고, 그런 시간 ‘안에서’ 계획하고 살아간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끊어지지 않고 연속해서 이어지는 하나의 시간 안에서 살아가는 것으로 인식합니다. 이른바 시간의 균질성과 연속성의 문제입니다. 그럼에도 오늘날 물리학 분야에서는 시간의 객관성과 실재성을 의심하는 움직임이 종종 있습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 의하면 모든 물체는 상대적 관계 안에서 움직이는 각각 고유한 시간을 가집니다. 즉 서로의 입장에 따라 시간의 경과를 다르게 체험하는 것입니다. 이는 언제 어디서나 동질적으로 균일하게 흘러간다는 절대시간이 아닌, 중력의 작용과 물리적 운동 관계에 따라 변하는 상대적 시간이 존재함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사실은 시간의 실재성에 대한 모호함의 근거가 됩니다.

‘제2의 스티븐 호킹’이라고 평가받는 물리학자이자 우주론자인 카를로 로벨리(Carlo Rovelli, 1956~)의『시간은 흐르지 않는다』(2017)에 따르면, 시간이란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단지 물질들이 만들어 내는 사건들 사이의 관계일 뿐이라 주장합니다.

그에 따르면, 인간 지각 능력 너머에 있는 우주의 원초적인 시간, 즉 천체의 움직임으로 야기되는 통상적인 시간의 ‘흐름’이란 개념은 없습니다. 그저 사물의 운동과 변화만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시간의 흐름에 따라 물리적 사건이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물리적 사건의 전개에 따라 시간이라는 개념이 인간 지각 능력에서 구성된 것이라 주장합니다.

하지만, 실상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시간만의 독특한 본질은 ‘흐름’입니다. 흔히 세월이라고 하는 것도 시간을 표현하는 말인데, 흘러가는 시간 또는 시간의 흐름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어떤 면에서 흐름이라는 본질이 없다면 그것은 시간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흐르지 않는 것은, 하나의 시점 혹은 공간의 단면입니다.


그런 면에서 바라보면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는 말 자체가 모순인 셈입니다. 우리는 공간을 포함한 시점이 한 방향으로 연속적으로 흐를 때, 그것이 내재적이든 외재적이든, 비로소 그것을 시간이라고 인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철학적 언어–현상학적 체험의 시간
철학의 영역에서 시간은 단순히 하나의 정의, 하나의 명제로 결코 다루어질 수 없는 주제입니다. 우리는 시간을 인지하고 느끼기 때문에 시간은 실재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시간을 인지하는 주체가 사라지면 그 시간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에 ‘그 시간은 실제로 실재했던 것일까?’라고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시간은 미래에서 현재 그리고 과거로 사라짐으로써 존재하는데, 또 그 존재함은 인지하기도 전에 사라져 버립니다. 이처럼, 시간은 존재하면서도 존재하지 않는 매우 복잡하고도 미묘한 아포리아(aporia)¹를 담고 있습니다.

인간에게 의미 있는 시간을 찾기 위해서 철학자들은 현상학적 시간의 전통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현상학적 시간은 인간이 주체적으로 의미를 부여하는 시간으로 체험적 시간입니다. 우리의 일상은 보통 자연적 시간에 익숙해 있습니다. 그러나 현상학적 시간은 그 점을 각자의 체험을 중심으로 한 주관성으로 극복하려고 합니다.

결과적으로 우리의 일상인 자연적 시간을 초월하는 ‘인간적’ 시간이 되게 하는 데 의미를 부여합니다. 철학에서 현상학적 시간을 중시하는 이유는, 자연적 시간 그 자체는 인간의 삶에 아무런 의미 부여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일 시간을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전 1:1)와 같이 ‘기한’과 ‘때’로 이해한다면 시간은 인간의 시간임이 틀림없습니다. ‘기한’과 ‘때’는 언제나 인간의 행위와 관련된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때가 되었다’의 그 ‘때’는 인간의 어떤 사건이나 일과 연관된 시간입니다. 즉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되었다거나,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좀 더 생각해 보면, ‘때’도 흘러가는 시간 속의 한 지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말의 시간(時間)이라는 말 역시 ‘때와 때의 사이’라는 뜻으로, 시간의 길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시간의 길이를 가진다는 말은 또한 시간의 공간화를 의미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주적 시간은 시간적·공간적 거리를 측정하는 도구로써 사용되는 시간입니다.

이는 우리 일상의 통속적 시간을 가능하게 하는 토대가 되는 자연의 시간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반면에 현상학적 시간은 체험 세계의 시간으로 경험적 시간, 실체의 시간, 역사적 시간으로 표현됩니다. 그리고 이는 대상에 대한 지각자의 주관 안에서 해석되는 시간이며, 개인별 의식의 경험 속에 있는 시간으로 심리적 시간, 인생 시간으로 부를 수 있습니다. 때문에, 현상학적 시간은 시간의 비 실재성에 대한 문제와 관련됩니다.

종교의 언어–영적 영원의 시간
아우구스티누스는『고백록』 11권의 첫 문장을 “오, 주님, 당신은 영원하신데, 내가 당신께 말하는 것을 모를 수가 있습니까? 아니면, 당신은 시간 안에서 일어나는 것을 보시되, 그것이 일어나는 그때에 보시는 겁니까? 그래서 시간 안에서 아시는 겁니까?”로 시작하면서 ‘영원’과 ‘시간’을 대비합니다.


‘시간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란 하나님께 고백하는 행위를 가리키는 것으로, 시간 안에서 일어나는 피조물의 삶입니다. 그의 다른 표현을 빌리자면 “시간 안에서 이루어지는 피조물의 운동”입니다.

고백의 말을 하기 위해 생각하고, 마음먹고 말하는 것이 모두 운동입니다. 운동은 변화를 일으키고, 변화는 시간의 간격(interval)을 만들고 우리는 그것을 측정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흔히 시간의 길고 짧음을 생각하는데, 그런 시간은 운동이 일으키는 변화와 함께 있어야만 존재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시간은 운동이나 변화 없이 존재할 수 없다”라 말합니다. 즉 그에게 있어서 운동과 변화는 같이 쓰이는 짝 개념입니다.

이것만 보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적 시간을 생각하게 하지만, 그는 시간의 본질을 우주적 자연 시간에서 찾지 않고, 영혼의 활동에서 찾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 이해란 시간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으로, 시간을 ‘시간 안에서’ 이해하지 않고 ‘영혼 안에서’ 이해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시간에 끌려가지 않고 시간을 주도하는 주체를 형성하려고 한 것으로 이는 앞서 언급한 서구 철학자들의 현상학적 시간론의 기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어서 시간은 영원한 현재인 하나님과 비교됩니다. 피조물인 인간의 시간이 미래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과거로 흐르는 것은 ‘영혼의 분산’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 그런 시간의 흐름은 현재를 중심으로 경험됩니다. 그러기에 과거의 시간은 현재의 기억으로 존재하고 미래의 시간은 현재의 기대로만 존재합니다.


또한 그는 “현재는 연장(extension)이 없다”고 말합니다. 현재는 연장이 없는 순간으로, 삶이란 순간의 지속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순간에 집중하는 영혼의 활동인 셈입니다.

그렇게 영원한 현재인 하나님과 소통하는 지점을 찾고자 했고, 그 결과 현재 중심의 시간 이해를 형성한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피조 된 인간이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갈 것인가?’, ‘죄에 빠질 것인가?’의 갈림길에 선 현재적 인간을 보여줍니다.


세상 죄의 종이 되어 분열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종이 되어 자유롭게 될 것인가? 그러한 동시에 죄에 빠져 분열에 처해 있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실존적이고 구원론적인 관점이 그의 시간 이해에 들어 있으며, 그 점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아우구스티누스가 파악한 시간은 영적 영원의 시간으로, 죄의 종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종이 되고자 하는 종말론적 구원의 의도를 보여줍니다. 시간이 가며 늙어 죽는 것은 자연 현상입니다. 그러나 흘러가는 시간에 끌려가지 않고 주체적으로 시간을 살려는 게 누군가에게는 내적 의식의 시간이 되고, 누군가에게는 자기를 창조한 존재에 대한 관심이 된 것입니다.

1)아포리아란, 하나의 명제에 대해 증거와 반증이 동시에 존재하므로 그 진실성을 확립하기 어려운 상태를 말한다. 즉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와 모순을 의미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같은 물음에 대한 대답으로 두 개의 서로 전혀 다른 합리적 의견이 제출될 때 아포리아가 있다고 한다. <철학 사전>에서

출처: 김용규,『신; 인문학으로 읽는 하나님과 서양 문명 이야기』(IVP 출판사, 2021)을 저자와 출판사의 허락을 통해 책에서 다뤄지는 기독교 신학의 내용을 필자의 관점에서 재 인용과 재 해석을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