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겐슈타인의 언어게임(Language game)

종교 언어(religious language)
“신과 사람 사이에 있는 상호성은 증명할 수가 없다. 그것은 마치 신 자체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러나 그럼에도 감히 이 상호성에 관하여 말하는 자는 증언을 하고 있는 것이며, 그가 말을 건네고 있는 사람에게도 그것이 현재의 증언이건, 미래의 증언이건, 증언하도록 부르고 있는 것이다.” – 마르틴 부버의 『나와 너』

아우구스티누스의 “인간이 당신에 대하여 말할 때 무엇을 말할 수 있습니까?”라는 탄식은 유한한 인간의 언어로 무한한 하나님에 대해 말해야 하는 어려움을 드러냅니다. 이 질문은 일상의 유한한 세계를 경험한 것을 표현하기 위한 언어로 일상 경험 밖에 있는 초월적인 하나님에 대한 표현의 어려움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이해 너머에 있는, 완전히 형언할 수 없는 절대적으로 초월적 존재이기에 인간은 하나님을 알 수도 없고 어떠한 인간의 언어로도 하나님을 묘사하기에 적절하지 않다는 의미입니다.

반면에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는 하나님에게나 인간에게 사용될 때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사랑이다’라고 할 때, 이 말은 정도의 차이만 있는 것으로 기본적으로 우리가 사랑한다는 말과 같은 의미로 해석합니다. 그래서 안셀무스는 하나님을 “최고의 존재”, 또는 “최고의 본질”이라고 칭합니다. 이는 “그 이상 위대한(완전한) 존재를 생각할 수 없는 존재”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언어가 유비적(analogical)이라는 견해입니다. 이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점뿐만 아니라 중요한 유사점도 존재하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언어는 이 차이점과 유사점을 모두 반영하는 유비적 언어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선하시다’고 할 때, 하나님의 선함은 인간의 선함과 비슷하면서도 동시에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어떻게 유한하고 제한된 인간의 언어로 영원하며 무한한 하나님을 말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에 답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시도를 한 결과들이 있어 왔습니다.

이러한 종교 언어의 특수성에 질문을 던지며 주목한 사람이 바로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입니다. ‘종교 언어’라는 말은 영어의 ‘religious language’의 번역어입니다. 그는〈종교적 믿음에 관한 강의〉에서 “신의 눈과 관련하여, 눈썹도 이야기될 것인가?”라고 묻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눈이 우리를 감찰하고 계신다면 하나님의 눈썹은 무슨 색인가?”라고 물으면 대부분은 어이없다는 반응을 보일 것입니다. 왜 우리는 하나님의 눈에 대해서는 말하지만, 하나님의 눈썹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 것일까요?

이처럼 종교적인 주제에 대한 ‘신’, ‘거룩’, ‘계시’, ‘죄와 구원’ 또는 종교 영역에서의 사용되는 ‘천국과 지옥’, ‘감사’, ‘찬송’ 등을 일컫는 용어입니다. 특히 기독교 철학에서 중요하게 논의가 되는 문제는 “신은 존재다.”, “하나님은 초월적이다.”, “하나님은 사랑이다.” 등의 하나님에 대한 진술의 문제입니다.

하지만 ‘종교 언어’라고 하면 마치 오직 종교적인 목적만을 위해서 사용되는 언어로 오해를 가질 수 있으나 종교가 인간 삶의 다른 영역들과 완전히 분리된 독자적 영역이 아니듯 종교 언어 역시 독자적인 언어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종교 언어의 중요성은 단순히 언어만의 문제가 아니라 직접적인 신에 대한 개념과 관계되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성경의 진술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의 문제는 하나님 이해의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사 59:1)라는 구절에서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는 진술을 있는 그대로 문자적으로 이해하면, 하나님이 손이 있기 때문에 팔도 있어야 한다는 ‘신인동형론’ 개념으로 연결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영(spirit)이라는 신 개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위와 같은 신인동형론적 언어를 문자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거기서 다른 의미를 찾고자 할 것입니다.

언어게임(Language game)
언어게임은 언어는 규칙이 있는 경기나 게임과 같아서 같은 언어활동 현장의 상황과 맥락 속에서 그 의미가 확보된다는 이론입니다. 즉, 종교적 주장을 과학적, 논리적으로 반증하고자 하는 것은 논리에 맞지 않는다고 합니다.

가령 축구 선수가 ‘공을 잡다’는 표현과 야구 선수가 ‘공을 잡다’는 표현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모든 운동 종목마다 그 운동의 게임 룰과 게임 용어들이 있는 것과 같이 종교 언어는 종교적 가치 안에서 해석되어야 그 의미가 명확히 전달된다고 말합니다.

그에 의하면 모든 ‘언어게임’에는 그 언어게임을 구성하는 역사, 문화, 제도를 비롯한 인간의 총체적 ‘삶의 양식’이 반영됩니다. 따라서 언어란 그 언어가 사용된 언어게임 안에서만 일정한 의미를 갖습니다. 그러므로 “언어게임이 변하면 그때는 개념상의 변화가 생기고 개념과 더불어 단어들의 의미도 변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의 언어를 머리에 떠올린다는 것은 하나의 삶의 양식을 떠올리는 것이다”라고 주장합니다. 이것은 곧 어떤 사람의 언어를 이해하려면 그 사람의 삶의 양식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언어게임을 바꾸는 것은 ‘하나의 사고 차원에서 다른 사고 차원으로 옮겨가는 것’이자 ‘하나의 삶의 형식에서 다른 삶의 형식으로 옮겨가는 일’이 되는 겁니다. 이런 의미에서 언어게임은 삶의 양식, 곧 한 세계에 대한 단순한 정보만이 아니라 그 세계에 대한 삶의 통찰력을 제공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통찰은 우리에게 세계를 보는 하나의 새로운 관점을 형성해 줍니다.

그 결과 “이미 사용할 수 있는 가능한 개념들이 변화하거나 더욱 확장되도록 함으로써 새로운 정보 발견을 가능하게 해주는 진보” 곧 이해의 폭을 넓히고 타인과의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합니다.

‘예수’라는 고유명사는 약 2000년 전에 예루살렘에서 살다가 약 33살의 젊은 나이에 십자가에서 못 박혀 사망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부인하는 기독교인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언급할 때 전적으로 역사적 측면에서만 서술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말함은, 그것은 그리스도인으로 자기 자신을 확인한다는 뜻이고 그러한 인간으로서 삶을 살겠다는 결의의 표시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단순히 역사적, 종교적 사실을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임으로써 거기서 파생되는 이익뿐만 아니라, 불이익을 감수하겠다는 뜻입니다. 더 나아가 어떤 종류의 진리와 거룩함을 추구할 것인지, 다시 말해서 어떤 자세로 삶을 살 것인지를 나타내는 일종의 고백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의 용어는 다른 언어 영역에서 그의 존재 혹은 기능을 발휘하기는 하지만 종교적 언어 영역에서 그의 모습이 가장 잘 전달된다는 것입니다.

삶의 언어(language of life)
하지만 인간이 무엇을 경험한다는 것을 어느 특정한 방식으로만 규정하고 그것을 배타적으로 창조하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또 바람직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므로 종교 용어, 과학 용어, 혹은 윤리 용어, 예술 용어 같은 것도 어느 맥락에서 좀 더 부각되는 점을 강조하는 방식일 뿐이지 그것만이 유일한 방식인 것으로 제시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종교적 언어게임 안에서도 종교용어 그 자체로서 성립되기보다 다른 언어와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제 기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언어 현상을 가능하게 하는 원초적 의미의 ‘삶의 형식’에 뿌리를 내리고 있고 그것은 복합적이며 다양한 성격을 지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것이 종교언어가 오로지 사실적 언어로 혹은 그밖에 비종교적 언어로 환원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비트겐슈타인이 어떤 표현을 다른 표현으로 대체할 수 없다고 했을 때 그것은 종교언어의 완전한 자율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결론을 내려도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종교적이든 과학적이든, 혹은 윤리적이든 예술적이든 언어게임은 그 기본 틀이 일상 경험인 삶의 형식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의 이해를 바탕으로 하는 객관적 사실에 근거해 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 종교적 언어를 검토해 보면 많은 부분 드러나는 것은 주관적 상태이지 객관적 사실이 아닐 때가 많습니다. 그것은 믿기 위한 증거가 필요하지, 납득을 위한 합리성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즉 종교 언어는 개인의 태도, 감정, 신념 등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언어게임의 종교적 용어들은 합리성과 명료성과 실재성을 추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정리하면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과학적으로 철학적으로 분석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분석을 통해, 우리는 ‘신’이라는 종교 언어를 종교 언어 이외의 언어로부터 자양분을 얻을 때 그 의미가 더욱 명확해지고 의사소통이 원활해지기 때문입니다.

이 언어게임에서 중심적 역할을 하는 하나님에 대한 개념도 종교적 맥락에서뿐만 아니라 그 게임의 참여자들이 그 개념을 받아들이는 객관적 사실이나 가치의 실재와 연결되어 있을 때 더욱 설득력 있는 개념이 되기 때문입니다.

출처: 김용규,『신; 인문학으로 읽는 하나님과 서양 문명 이야기』(IVP 출판사, 2021)을 저자와 출판사의 허락을 통해 책에서 다뤄지는 기독교 신학의 내용을 필자의 관점에서 재 인용과 재 해석을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