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인문학(Christian Humanities)

종교는 문화의 실체이고 문화는 종교의 형식이다
“어느 문명에서든 신은 종교 안에만 머물러 있지 않는다. 신은 언제나 종교 밖으로 나가 종교 아닌 것들 속으로 스며들어 간다. 세속적인 것, 일상적인 것, 문화적인 것 안으로 과감히 침투해 들어간다. 신은 사회제도와 전통 안으로, 생활 규범과 관습 속으로, 학문 안으로, 문학 속으로, 미술과 건축안으로, 음악과 공연 속으로, 부단히 파고들어 문화와 문명의 심층을 이룬다.”(『신』들어가는 글 중에서).

언제부터인가 인문학이 여러 영역에서 진지하게 다루어지며 그리스도인들의 관심도 높아져 왔습니다. 하지만 이런 관심을 불편하게 바라보는 시선도 있는 것 같습니다. 과거 교회 안에서 ‘인간적’이라는 말은 암묵적으로 금기시 되어온 경향이 있습니다. ‘인간적’이라는 단어는 왠지 신앙이 없어 보이거나 세속적으로 이해되어졌기 때문입니다.

목회자의 삶에서도 ‘인간적’인 모습보다는 오히려 어떤 신적인 모습(?)을 기대하기도 합니다. 설교에 문학이나 예술, 영화, 소설 등을 인용하면 ‘인간적인 설교’라고 비판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경향은 2세기에 테르툴리아누스가 “아테네와 예루살렘이 무슨 상관이 있는가?”라고 했을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교회와 세상, 신앙과 이성, 그리고 신학과 인문학이 무관하다고 판단했습니다. ‘바른 신앙’에 대한 정의를 ‘하나님 중심’ 혹은 성경 중심의 ‘신본주의’로 만 여긴 까닭입니다.

하지만 종교개혁자들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방법으로 ‘신앙’과 ‘이성’이라는 두 개의 양식을 취합니다. 신학 역시 인간을 둘러싼 사회적이고 문화적 상황에 관심을 두고 다른 학문과의 대화를 바탕으로 현실 안에서 복음의 의미를 새롭게 조명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아우구스티누스나 안셀무스에게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으로 불렀던 것입니다. 안셀무스는 “신앙을 전제하지 않는 것은 오만이며, 이성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태만”이라면서 평생 두 가지 태도를 균형 있게 유지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때 거기에’만 아니라 ‘지금 여기에’ 들리도록, 하늘에 닿기 위해 땅에 뿌리를 내리도록, 왜곡되고 잘못된 것 속에서 진리를 분별하도록 이성을 신학의 도구로 사용한 것입니다. 칼빈도 ‘기독교강요’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인간을 아는 지식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향하게 한다”라고 말합니다.

사실, 지난 2천 년간 기독교 신학은 하나님 나라와 세상(인간, 사회, 자연)을 이어주는 교량으로, 신앙과 이성 둘 중에 어느 하나도 소홀히 여기지 않고, 이 두 가지 입장을 통해서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학문체계를 이루어 왔습니다. 즉 기독교 신학이 응답해야 하는 상황은 단순히 심리적이거나 사회적인 상태만을 의미하지 않고, 실존에 대한 인간의 창조적인 해석을 표현하는 정치, 경제, 사회, 과학, 예술 분야의 형식을 포괄한 것입니다.

무엇보다 기독교는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인간에게 친히 내려오신 예수의 ‘성육신(Incarnation)’ 사건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육신’은 어떤 면에서 하나님이 인간과 소통하기 위하여 인간으로 오신 사건입니다. 인간과 소통하고자 한 방법은 인간의 육체를 통하여 인간의 문화와 언어를 사용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과 소통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친히 인간이 되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출발부터 인간적, 즉 인문학적 성격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는 하나님과 인간의 대립구조가 아닙니다.

특히 예수님과 바리새파를 포함한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의 논쟁은 종교에 있어서 인간이 핵심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안식일 날 배가 고파 밀 이삭을 잘라 먹은 제자들을 비판하는 바리새인들을 향해 예수님은 안식일의 중요성은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역설하고(마 12:1-8), 역시 안식일 날 손 마른 사람을 고치는 행위를 통해서 종교의 핵심은 인간을 살리는 것임을 설파합니다(마 12:9-13).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막 2:27)”이라며 그들의 주장을 물리칩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가르침의 핵심은, 바리새파들이 강조하는 형식적으로 ‘하나님 중심’의 ‘신본주의’를 외치고 외형을 추구하는 율법 종교가 아니라 인간의 삶에 관심을 가지고 인간을 구원하시는 일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의 주된 관심은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와 더불어 죄인 된 인간의 구원에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 연구에서 하나님을 발견하는 길은 인간을 발견하는 일과 결코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것과 더불어 인간다운 삶이 무엇인가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예수님 사역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알기 위한 신학은 인간과 결코 분리될 수 없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신학과 인문학(Humanities)의 만남
신학과 신앙에 대한 중요한 오해 중 하나가 ‘신 중심’, ‘교회 중심’이라는 것이, 그리고 ‘신령한 신앙’을 갖기 위해서는 마치 세상과 사회와는 거리를 두는 것이 좋은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실 1~2세기 초대교회는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계 22:12)라는 말씀에 의한 임박한 종말론으로 세상과 사회에 대해 큰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가 곧 오며, 이 세상 나라는 다 무너져 버릴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러기에 미련 없이 목숨을 버리고 순교할 수 있었고, 불타 없어질 세상과 현재의 통치 질서에 관해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불의한 사회구조와 세상 악에 대해서도 의지를 가지고 싸우려 하지 않았습니다.

주후 2000년이 지나도록 이 약속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초대교회의 이러한 이원론적 신앙과 문화는 지금까지 교회 공동체의 신앙을 가르는 중요한 지표가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기독교 신앙을 신과 인간의 대립, 교회와 사회의 분리라는 틀로만 바라보는 ‘신앙 제일주의’는 바른 신앙일 수 없습니다. 시간이 점차 흐르면서 교회가 정치적, 경제적 생활에 대해 책임져야만 하는 상황이 닥쳐오자 기독교적 이상이란 이름 아래 기존의 사회관습과 관계들에 대해 도전하는 경향이 생겨났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인문학은 하나님과 인간이 함께 가고, 교회와 사회는 소통해야 하며, 바른 신앙은 상식이 통하고, 모든 부분은 아닐지라도 이성적 설명이 가능해야 함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중세의 안셀무스는 “나는 이해하기 위해 믿는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을 해석하고 기독교 신앙을 전수함에 있어 인문학적 소양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국어로 번역된 성서는 보통의 교육을 받은 사람은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쉽게 읽는다고 모든 내용이 쉽게 이해되거나 해석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기에 성서를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학적 통찰력 및 건전한 인간 이성이 필요합니다.

오히려 신학적 기반도, 인문학적 소양도 없이 아전인수 격으로,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성경해석은 위험하기 그지없습니다. 많은 경우에 이단 사이비들의 가르침이 여기에 해당된다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 인문학은 특정한 학문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진정한 가치 탐구와 표현활동, 즉 인간에 대한 삶의 이야기, 사상과 문화, 예술에 대한 폭넓은 표현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은 어떤 존재인지, 인간 삶의 본질은 무엇이고, 인간의 본성과 인간다운 삶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은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이해하는 중요한 길이 됩니다.

어떤 면에서 인간을 발견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발견하는 길이고,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는 인간을 통해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을 깊이 이해하는 폭을 넓히는 하나의 길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인문학적 이해가 없는 ‘신 중심’, ‘신본주의’ 신앙과 신학은 세상에 대한 깊이 있고 균형 잡힌 이해를 불가능하게 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치 예수님 시대의 바리새인처럼 인간을 종교를 위한 희생물이나 소모품 정도로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물론 인간을 탐구한다면서 성경이 제시하는 길이 아닌 인본주의 길로 가는 경우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인문학을 절대화, 우상화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인문학은 진리를 찾는 한 도구가 될 수 있고 인문학을 접할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 인문학은 추상적인 활동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면서 부딪히고 느끼고 즐거워하고 아파하는 인간 현실 삶에 대한 것입니다. 이는 인간의 모든 인문학 영역이 종교적 실체에 근거하고 있음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요컨대 인문학적 표현 속에 나타난 종교적 실체에 대한 분석, 그리고 그 실체에 대한 인문학적 해석이 기독교 인문학을 통해 수행될 수 있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성경에 기록된 말씀만큼이나 이 땅의 문제에 귀 기울였습니다. 세상의 소리, 곧 사람의 소리에 귀를 여는 일입니다. 물론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음성에 온 마음으로 귀를 기울이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사람의 소리를 무시하지 않아야 합니다.

출처: 김용규,『신; 인문학으로 읽는 하나님과 서양 문명 이야기』(IVP 출판사, 2021)을 저자와 출판사의 허락을 통해 책에서 다뤄지는 기독교 신학의 내용을 필자의 관점에서 재 인용과 재 해석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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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봉조
총신대 신대원 졸업. 세계선교교회 담임. “언어는 존재의 힘이다”는 통찰을 빌려 신학을 기반으로 한 인문학의 언어로 하나님과 우리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이를 통해 하나님 사랑에 대한 삶의 귀중한 자리를 확인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