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청년의 고난

우리 학교를 다녀간 한 청년이 있었다. 목회자 자녀로 믿음도 좋고 성품도 좋은 흠잡을 데 없는 아름다운 청년이었다. 명문 기독교대학을 다니면서 목회자의 길을 준비하고 있었다. 특별히 복음을 모르는 외국 영혼들을 사랑하고 잘 챙겼다. 


그런데 이곳에서 학업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간 후 안타까운 사연이 들려왔다. 


어느 날 학교에서 외국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하다 학교 통학버스 시간이 임박해져서 자전거를 타고 급히 정류장으로 달려갔다. 안타깝게도 그만 자전거가 넘어져 뇌를 크게 다쳤다. 서울 유명 종합병원으로 옮겨서 대수술을 받았으나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다. 


너무 마음이 아팠다.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던 청년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마음속에서 계속 이 질문의 답을 생각했으나 하나님의 그 깊고 깊은 뜻을 도저히 헤아릴 수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형제에 대한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계실 줄 믿었기에 회복의 소망을 버리지 않고 늘 기도했다.


이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생각했다. 형제의 아픔도 크지만 그 가족들이 겪을 아픔을 생각하니 더욱 마음이 아팠다. 우리 학생들과 함께 매년 두 차례 특별헌금을 하고 늘 기도했다. 


그리고 한국에 돌아가면 꼭 병원에 찾아가서 위로해 주도록 했다. 나 역시 한국 집회차 나가게 되면 시간을 내어 병원을 찾았다.


그렇게 벌써 8년째 접어들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때를 알 수 없다. 그저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하며 묵묵히 기다릴 수밖에 없다. 형제의 아버지는 가슴속에 있는 아픔을 글로 담아 보내왔다. 

7년
다시 가라 하면 못 갈 우리들의 7년
‘계시 의존적 사색’을 외치며
영혼 구원에 바쁜 나날이었고
사랑 그게 쉽지 않아 아파하고
사회구조에 불만이던
만 7년 전에 너는

병상이 등판 되어 엄마는 물론
말할 줄도 웃을 줄도 모르며
그냥 사람인 채로 마냥 7년을
냅다 보냈구나

계절은 제대로 굴렀고
하나님의 사람들이 순번대로 찾아왔고
우리는 살아 내어
오늘도 정직하게 숨을 쉰다

앞으로의 7년을 기대할 수 없는 일이나
포기하지 않고 절망 또한 않고
웃으며 너를 볼게

주님의 8년차 계급을 단 너를
약속한 적 없지만 입 모아 모두들
희망이라 부른다
너를……

이 시를 보면서 같은 아비로서 가슴이 메어지는 아픔이 있었다. 그러나 죽은 자도 살리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에 오늘도 소망을 버리지 않는다. 형제의 아버지는 늘 감사의 인사를 잊지 않으셨다

“목사님, 보내 주신 사랑의 헌금 잘 받았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라는 말보다 더 좋은 말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한두 번도 아니고 매년 몇 차례씩 감당하지 못할 큰 금액을 헌금해 주시니 너무 감사드립니다. 풍족한 가운데 보내 주신 것이 아니라 살을 깎는 심정으로 힘에 겹도록 도와주신 줄 압니다. 그래서 저희들에게는 목사님과 섬기시는 교회와 모든 성도님들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따뜻한 손길입니다.
인간의 생각을 뛰어넘는 사랑으로 늘 저희들에게 감동과 위로를 주시는, 하늘 아버지의 어루만짐입니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아파하는 자들과 함께 아파하는, 그리스도의 몸 된 지체가 뭔지 실제적으로 알게 해주시는 모델입니다.
그래서 너무너무 항상 고마운 마음은 있지만 어찌할 수 없어 이렇게 글로만 인사드리게 되어 송구스럽습니다. 앞으로도 저희들은 이 큰 사랑을 잊지 않고 절
망하지 않는 모습으로 주님의 치료의 역사가 일어나는 때를 기다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기도해 주시고 사랑으로 헌금해 주신 목사님을 비롯한 모든 교회 성도님들께 하늘의 신령한 복과 각양 좋은 은사가 차고 넘치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섬기시는 교회가 더욱 주님의 은혜로 부흥하고, 성도들의 기업이 주님의 복으로 충만하고, 복음 전파 사역에 귀하고 아름다운 열매가 가득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소나타 타세요
뉴질랜드에서의 처음 삶은 참으로 초라했다. 돈 나올 곳이 전혀 없었던 유학 시절에는 단 1달러 쓰기도 두려웠다. 살림은 전부 개러지 세일(garage  sale)에서 저렴하게 구입한 물건들이었다. TV 받침대는 사과 궤짝 같은 것을 주워서 사용했다. 모든 살림을 구입하는 데 200달러가 채 들지 않았다. 


집은 오래된 난민촌 같은 곳이었다. 오래된 카펫에서는 곰팡이 냄새가 진동을 했다. 한국에서 부족함 없이 살다 하루아침에 거지가 된 것 같았다. 


그러나 워낙 굳은 결심을 하고 왔기에 견딜 만했다. 오죽하면 교회 식구가 찾아와서 사과 궤짝 같은 TV 받침대에 비닐 커버를 씌워 주고 갔다. 


참으로 초라한 삶이었지만 그나마 내 마음에 큰 위로를 주는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자가용 승용차였다. 경매에서 5년 된 일본 중고차를 8천 달러에 구입을 했다. 남들 눈에는 하찮게 보였을지 몰라도 나에게는 평생 타보지 못한 고급차였다. 일본 마쓰다에서 만든 루이스라는 차종이었는데, 한국의 기아자동차에서 포텐샤라는 이름으로 판매한 적이 있다. 


그 당시 이 차는 중소기업 사장들이 주로 타는 고급차였다. 비록 중고차였지만 이 차를 탈 때만큼은 아주 행복했다. 그리고 특별히 차를 아꼈다. 


주일날 현지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데, 평상시 잘 보지 않았던 교회 소식이 그날따라 눈에 확 들어왔다. 큰 글자로 급히 자동차가 필요하다고 쓰여 있었다. 내용인즉 피지에서 선교하는 선교사님 가족이 한 달간 안식차 나왔는데 급히 차량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사실 그때 우리 가족은 방학을 맞이하여 잠시 한국을 방문하기로 계획되어 있었다. 당연히 차는 집에 세워 둬야 했다. 그러나 나의 유일한 기쁨이고 재산목록 1호인 차를 누구에게도 빌려줄 마음이 없었다. 


애써 광고를 외면하려고 했다. 예배를 마치고 집에 왔는데 계속 귓가에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그 차가 네 차냐?”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인데 내 차인 양 도움을 외면하려 했던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곧바로 교회에 전화를 해서 내 차를 빌려주겠노라고 했다. 


그동안 돈을 쓰기가 두려워 지도책 한 권을 사지 못했다. 그 당시는 지도책이 없으면 어느 곳도 찾아갈 수 없었다. 그래서 먼저 지도책을 사서 넣어 두고 깨끗이 세차하고 기름을 가득 채워 선교사님에게 전해 드렸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이런 기대감이 있었다. 하나님께서도 분명 한국에서 내가 탈 차를 준비해 주실 거라고….


한국으로 갈 날이 다가왔다. 사실 나는 교통사고로 다리에 장애가 있어서 대중교통을 이용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더구나 한국은 겨울이라 조금의 염려가 있었다.


그 당시 한국에서 잠시 뉴질랜드를 방문했던 장로님이 한 분 계셨다. 장로님은 늘 자기 차를 자랑하곤 했다. 소나타가 처음 나올 시기인데 새 차를 구입했다고 행복해했다. 그리고 자기는 마누라보다 차를 더 아낀다고 농담을 하곤 했다. 


이번 뉴질랜드 방문 때에도 교회 성도가 돈을 주겠다고 해도 빌려주지 않았다고 했다. 그런데 출국 하루 전날 이 장로님이 나를 찾아와서 그렇게 아끼던 소나타 키를 주었다. 자기 아파트 주차장에 세워 두었으니 잘 사용하라고 했다. 


하나님은 참으로 빈틈이 없으시다. 정확하게 나의 필요를 채워주셨다. 내 삶을 뒤돌아볼 때 하나님은 한 번도 그냥 넘어가신 적이 없다. 반드시 심은 대로 갚아 주셨다. 이렇게 신실하고 오류가 없으신 하나님을 믿고 살아감이 얼마나 큰 은혜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