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틴 부버의 『나와 너』. 2

인간의 삶은 신의 섭리이며, 신의 운명이다
지난 글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부버가 여타의 실존주의자들과 구별되는 점은 그가 인간을 고립된 실존으로 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에게 있어 인간은 두 가지 관계, 즉 나와 너(Ich-Du)의 관계 속에서 ‘나’이거나, 나와 그것(Ich-Es)의 관계 속에서 ‘나’입니다.


그러나 이 두 관계에 있어 ‘나’는 상대, 즉 ‘너’와 ‘그것’과 만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나-너’와의 관계 때의 ‘나’와 ‘나-그것’과의 관계의 ‘나’가 각기 서로 다른 ‘나’입니다.

예를 들면, ‘나-너’의 관계에 있어 나는 사람을 ‘만난다’입니다. 즉 한 사람을 현재 존재하는, 그대로의 상태에서 인격으로서 대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그 사람과 상호 긴밀한 인격적인 관계 속의 대상이 된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나-그것’의 관계에 있어 나는 사람을 ‘인식’합니다.


다시 말해 한 사람을 그의 사회적 역할과 특징에 기초하여 경험과 이용의 대상으로 분석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부버는 ‘나’의 이 두 가지 존재방식 중 ‘나-너’와의 만남을 통해서만 전체적인 인격체로서의 ‘진정한 나’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가 진정한 ‘나’가 될 수 있는 것은 단순히 우리가 ‘너’와의 일방적 관계에 들어가기 때문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진정한 ‘나’가 될 수 있는 것은 ‘너’가 있기 때문이요, 그 존재가 ‘나-너’의 관계로 맺어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진정한 ‘나’가 될 수 있는 것은, 찾아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이루어진다고 말합니다.

또한 이러한 너와 만남은 사람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3가지 영역 즉, 자연, 사람, 정신적 실재(spiritual beings)와의 관계에서 이루어진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 있는 모든 ‘너’는 ‘그것’으로 변할 수밖에 없는 위험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에 있어 ‘너’라고 불렀던 그 귀한 대상들도 시간이 지나고 나면 언젠가 ‘그것’으로 변해버립니다. 사랑했던 그 사람, 즉 그 ‘너’가 떠나갈 수도 있고, 내게 감동을 주었던 콘서트 음악도 콘서트가 끝나고 나면 언젠가 ‘너’의 자리를 잃어버립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는 영원히 ‘너’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는 없습니다.


3부로 구성된 『나와 너』의 대미를 장식하는 <영원한 너> 편에서 부버는 인간에게 있어 영원한 ‘너’로서 하나님을 소개합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소개하고 있는 인격적인 하나님입니다.

예컨대 출애굽 사건에서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을 향해 자신을 호소하고 하나님과 더불어 변론할 수 있는 그런 대화의 관계를 엿볼 수 있습니다. 더불어 하나님은 우리를 그의 ‘너’로 만들기를 간절히 소원하는 ‘나’로 우리 앞에 서시는 분입니다.


요컨대 철학자들이 말하는 단순한 하나의 우주 법칙이나 절대적인 존재로서 우리에게 나타나는 ‘그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우리와 인격적 관계를 맺기를 원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입니다.

또한 성경이 소개하고 있는 하나님은 시·공간적으로 무소부재한 하나님으로, 언제 어디서나 어느 형편에서든 우리의 영원한 ‘너’로서 있는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전 존재를 바쳐서 우리를 ‘너’로서 부르시는 하나님께 응답함으로써, 영원한 ‘너’와의 만남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우리는 이 땅에서의 진정한 관계 형성으로 ‘나’의 삶이 의미를 얻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다른 영역에 있어 ‘너’와의 만남이 무가치한 것은 아닙니다. 부버에 따르면 영원한 너와 만남은 개별적인 너와의 만남을 통해 가능하기 때문으로, 그는 “모든 개별적인 ‘너’와의 만남은 영원한 ‘너’를 만나게 해주는 창문(틈바구니)이다.”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이 세계의 모든 개개에는 창조주로서의 하나님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며, 또한 본질적으로 인간이 하나님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면에서 이는 일종의 범재신론 성향을 보이기도 합니다.

영원한‘너’(Das ewige Du – Eternal Thou)
영원한 ‘너’는 세상의 여느 ‘너’와는 다른 특성을 갖습니다.


첫째, 영원한 ‘너’인 하나님은 완전한 타자이면서 동시에 완전한 자기이기에, 하나님과의 관계는 무조건적인 배타성과 무조건적인 포괄성을 함께 지닙니다. 이는 하나님은 우리를 ‘너’라고 부름으로써 인류와 세계를 초월하는 동시에 포함한다는 의미입니다.


“영원한 ‘너’는 모든 관계들을 연결하는 영원한 중심이자 모든 관계 사이의 사이, 즉 모든 사이의 사이이다. 모든 관계 사건은 결국 영원한 너와의 관계를 보여주는 중간 정거장이다. 목적지에 이르기 위해 중간 정거장을 생략할 수 없듯이 영원한 타자인 하나님은 세상을 초탈하거나 부정함으로써 추구하고 발견할 수 없다. 영원한 너와의 순수한 관계에 들어선다는 것은 모든 것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너 안에서 보는 것이며 세계를 단념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그의 근저에 세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 영원한 ‘너’는 대상화, 사물화, 개념화가 불가능한 ‘완전한 현전자’입니다. 영원한 ‘너’인 하나님은 영원한 현재로 ‘나’의 탐색과 소유와 인식의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자아를 능동적이고 자율적인 주체로 말하는 근대의 인간론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부버의 목소리는 고조에 달합니다.


이는 만유 가운데 충만한 하나님을 특정한 시간과 장소와 사건에서 찾을 수 없기에, 하나님을 추구하고 대면하는 길은 수동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먼저 택하고 부르고 다가오고 우리는 택함을 받고 불려지고 기다림으로 맞이합니다.


그러므로 “신은 정당하게는 오직 부를 수 있을 뿐 진술될 수 없다.” 말합니다. 나를 불러주고 찾아오는 은총에 기대야 하는 관계 사건의 수동성은 근본적으로 영원한 ‘너’와의 관계에 기인하고 수렴합니다.

셋째, 영원한 ‘너’는 다른 ‘나-너’의 관계와 달리 ‘그것’으로의 전환이 불가능합니다. 영원한 ‘너’는 그 본질상 ‘그것’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영원한 ‘너’는 그 본질상 척도와 한정 속에 또한 측량할 수 없는 것이라는 척도와 한정 속에도 놓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영원한 ‘너’는 ‘그것’이 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하나님을 시간과 공간 속에서 연속적으로 소유하여 삶의 의미를 움켜잡고 조장하길 열망합니다. 하나님과의 현재적 마주 섬의 순간을 시간적 연속성과 공간적 확장으로 채우려는 인간의 욕망은 하나님을 사물화하는 역사를 이뤘다고 부버는 지적합니다.


부버에 따르면 영원한 ‘너’와의 만남을 포획하여 소유하고 보존하려는 사람은 우상에 의해 지배당하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영원한 ‘너’와 우상 사이에는 어떠한 전환성도 성립되지 않고 그저 양립불가능성만 있을 뿐입니다.

우상숭배에 대한 부버의 통렬한 비판은 철학적 신개념을 향합니다. 철학자들은 신을 사유의 대상으로 전락시켰습니다. 철학은 주체와 객체의 이원성을 바탕으로 전개되기 때문에 신을 인식의 대상으로 파악하고 규정할뿐 ‘나-너’의 근원어로 신을 부르며 관계로 들어서는 법을 알지 못합니다.


더 나아가 부버는 현대문명을 꼬집어 우리 시대에 신이라는 말은 인간의 광기로 인해 헤쳐지고 망가졌다 합니다.


‘너’에게로 나아가지 못하고 휘어 돌아오는 극단적 확장이 낳은 현대성의 괴물이 파시즘과 나치즘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현대성은 끊임없이 ‘그것’의 영역을 확장하면서 우리 시대의 가장 강력한 종교로 탈바꿈되었다고 주장합니다.

매일의 일상에서
부버는 ‘그것’의 세계에 포박되어 ‘너’라고 부를 수 있는 진정한 하나님의 현존을 알지 못하는 현대인에게 우리가 사는 세계가 생각보다 훨씬 신비하고 영적인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고 일깨워 줍니다.


부버는 “황홀한 신비”, 즉 절대 존재를 만났을 때, 특별한 감정이 하나님과 만나는 데 있어서 중요한 동기가 된다 할지라도, 그 감정은 만남에서 파생되어진 부차적인 것으로 말하며 신비주의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생활 속에서 매일 만나는 순간적인 ‘너’가 ‘영원한 너’에게로 가게 하는 작은 빛의 역할을 한다고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실체, 즉 진정한 삶은 매일매일의 생활과 단풍나무 잎사귀에 비치는 태양의 광선속에서 영원한 ‘너’의 모습을 찾는 것이지, 불가사의한 신비한 수수께끼 속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생의 본질, 신비의 실체는 인간의 삶과 지식의 한계를 넘어선 무아의 황홀 경지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온전한 인간의 생활 속에서 그리고 매일 매일 일상의 삶 속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 안에 계시며, 우리 삶의 일상적인 사건과 장면 속에서, 그리고 인류 역사의 사건들 속에서 자신을 나타내시기 때문에 하나님에게 응답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 영원한 ‘너’는 항상 가까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에게 응답할 준비가 덜 되어짐으로, 하나님의 자리에 유한한 것을 두어 하나님과 관계하는 것이 아니라, 우상과 관계하게 됩니다. 심지어 아무리 경건한 관념 또는 개념적 존재로서의 신에게 접근하는 철학과 신학이라 할지라도 그것들은 무신론을 향하는 첫걸음이 되는 것입니다.


부버는 인간은 하나님과의 만남에서 수용성을 필요로 하는데 그때 그가 수용하는 것은 어떤 내용이 아니라, 신의 현존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오직 관계적으로만 만날 수 있는 인격적인 존재로서의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부버의 신학은, 우선적으로 하나님과의 대화의 삶을 표현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관한 철학적 사상 체계가 아닙니다. 부버는 구약성경의 인격적-언약적 하나님의 살아있는 관계를 묘사합니다. 부버에게 영원한 ‘너’라는 말은 하나님 존재 자체와 피조물을 구성하는 영원한 말로, 인간들은 ‘너’라는 말로 응답할 수 있는 관계임을 말합니다.


출처: 김용규,『신; 인문학으로 읽는 하나님과 서양 문명 이야기』(IVP 출판사, 2021)을 저자와 출판사의 허락을 통해 책에서 다뤄지는 기독교 신학의 내용을 필자의 관점에서 재 인용과 재 해석을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