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신교 선교의 시작

지난 호까지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선교의 역사를 돌아보았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익숙한 개신교 선교의 역사는 왜 이제까지 안 다루었을까? 그 이유는 종교개혁을 통해 시작된 개신교는 처음에 힘이 미약했기에 선교에 집중할 수 없었다. 즉, 자신들의 세력을 구축하기 위해서 외부로 시선을 돌릴 여유가 없었고, 지금의 개념으로는 국내 선교로 이해될 수 있는 자국 안에서의 선교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개신교를 지원하던 나라들은 신생 국가들이 많았기 때문에 당시 해상권을 가지고 있던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견제로 해외 선교를 할 수 없었다. 이후 개신교 국가들의 부의 상승과 개신교회들의 안정화에 따라 자국을 넘어서서 선교를 시작할 수 있게 되었고, 개신교 선교의 흐름을 바꾼 대표적인 인물이 윌리엄 캐리이다.

분명, 윌리엄 캐리 이전에도 개신교의 선교가 있었고, 그 흐름에 윌리엄 캐리에 영향을 주었다. 그중 중요한 운동이 경건주의 선교운동으로, “경건주의는 정통주의와 형식주의에 대한 반발”로 시작되었다.

필립 스페너(Philip Jacob Spener, 1635-1705)는 독일의 “할레”라는 지역에 1964년에 “할레 대학”을 세웠고, 그곳은 경건주의 교육센터가 되어 18세기의 개신교 선교의 요람이 된다. 할리 대학은, 개신교의 중요한 한 축인 성서의 권위와 경건생활과 실천을 강조한다. 경건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선교의 특징은 “교회와 학교를 함께 세워 복음선교와 학원선교를 병행”하는 것과 “선교지의 언어”로 성경을 번역하는 것이다.

선교지의 언어로 성경을 번역하는 것이 지금은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지만 자국어로 성경을 가지고 읽으며 예배에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세계 기독교 역사 속에서 최근의 일이다. 더불어서 선교지의 문화를 연구하여 복음을 전파하였지만, 선교의 목표는 집단 개종보다는 개인 구원에 집중하게 되고 이를 위해서 현지의 교역자를 양성하는 것이 중요한 전략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할레 대학에서 생긴 첫 개신교 선교단체의 이름은 덴마크 할레 선교회이다. 이는 제도화된 교회를 넘어서 자발적인 운동이 되었고, 이때 덴마크 할레 선교회로 이름이 지어진 이유는 재정적인 지원을 교회가 아닌 덴마크에서 하였기 때문이다. 더불어 인적 지원은 할레 대학이 주가 되었다. 그 결과가 덴마크 할레 선교회가 된 것이다. 1707년 11월 29일에 인도로 치켄발크과 플위차우가 파송받은 것이 개신교의 공식적인 첫 해외 선교가 되었다.

또 다른 경건주의의 한 축은 모라비안 교회이다. 모라비안 교회는 종교개혁가들 중 한 명인 얀 후스의 영향으로 모라비안 지방에서 시작된 교회이다. 얀 후스의 처형으로 극에 달해 박해를 피한 사람들에게 친첸도르프가 땅을 나누어 주며 시작되었다. 이로 인해서 헤른후트 공동체가 설립되었다. 이 공동체의 특징은 강력한 선교적 열정이다.


이들에게 있어서 “선교는 선교적 사명을 받은 선택된 사람에 의해서 진행되는 것이 아닌 교회의 사역이라 생각하였고, 교회는 결단한 사람들을 함께 도와주는 공동체라는 의식이 강하였다.” 즉, 소수의 사람에게 선교가 달려 있는 것이 아닌, 모든 사람의 삶이 선교사의 삶이라는 최근의 BAM(Business as Mission)과 LAM(Life as Mission)의 시초라 볼 수 있다.

또한 이들은 기본적으로 자비량 선교를 강조하였다. 이것은 개인이 교회에 얽매이지 않고 더 적극적인 선교를 하도록 도와주는 도구가 되는 장점이 있었지만, 그와 반대로 교회 넘어 자신들을 지원해 줄 수 있는 경제적인 단체와 연결되어 선교를 할 수밖에 없었다는 문제점도 등장하게 되었다. 즉, 선교의 후원이 개인의 능력에 달려있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라비안 선교운동이 현재 선교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은 “선교가 성직자의 전유물이 아닌, 구원을 얻은 모든 사람에게 당연한 의무”라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경건주의를 기초한 할레 대학과 모라비안 운동은 19세기가 선교의 위대한 세기가 되도록 만드는 원동력이 되었다. “선교의 위대한 세기”라 불리는 이유는 약 150년이라는 기간 동안 전 세계에 복음이 전파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선교의 범위가 확대되었기 때문이며, 동시에 파송된 선교사의 숫자도 급격하게 성장기 때문이다.

많은 선교사가 더 넓은 지역에 선교를 떠날 수 있게 된 이유는 무엇보다 교통과 통신의 발달에 있고, 신생 국가들이었던 개신교 국가들이 가톨릭 국가들과 더불어서 경제적인 부와 힘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뜻을 반대로 표현하면, 많은 힘을 가지고 식민정책을 펼쳐 나갈 수 있게 되었기 때문으로 표현할 수 있다.


이 시기에 복음이 넓은 지역에 전파되면서 많은 선교사들의 헌신과 순교가 요구되었다. 여러 질병과 미전도 지역에서의 신변의 위협, 정치적인 낯섦, 문화의 낯섦 등으로 생명을 잃는 경우가 많았다. 그 결과 “19세기 초반 아프리카에 파송된 선교사들의 평균 생존 기간은 단 2년이었으며, 10년 이상을 사역지에서 생존할 확률은 20명 중 단 1명뿐이었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위대한 선교의 시기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위대한 선교사들이 많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근대 선교의 아버지 윌리엄 캐리, 미얀마 선교의 아버지 아도니람 저드슨, 아프리카 선교사 데이비드 리빙스턴, 중국 선교를 위한 로버튼 모리슨, 중국 내지 선교의 창시자 허드슨 테일러, 이슬람 선교의 대부 사무엘 즈윔머, 네비우스 선교정책의 창시가 네비우스 등이 19세기 선교사들이었다.

이 시기에 두 중요한 흐름으로는 하나는 일명 건초더미 기도 운동(The Haystack Prayer Group Meeting)과 학생자원운동(Student Volunteer Movement, SVM)이다. 건초더미 기도 운동이란, 19세기의 기도 운동으로 미국 매사추세즈주에서 윌리엄스 칼리지를 다니던 사무엘 밀즈(Samuel Mills)를 주축으로 시작하였다.


건초더미 기도 운동에 참여하던 이들이 졸업 후 신학교에 입학하였고, 이후 미국 회중교회의 지도자들과 함께 “1810년에 미국 해외 선교부(American Board of Commisioners of Foreign Missions)가 설립되는데 기여하였다.

더불어서 학생자원 운동은 세계 선교를 위한 학생자원운동 (Student Volunteer Movement for Foreign Mission, SVM)은 1886년 헐몬 산에서 모였던 학생 수련회에서 시작되었다. 주 강사는 디엘 무디와 아서 피어선으로, 아서 피어선은 참여한 학생들에게 “모두가 가야 합니다. 모두에게 가야 합니다(All should go, and go to all).”라고 선포하였다.

그 결과 수련회 후 100여 명이 선교를 위한 모임에 참석하였고, 성장하여 SVM이 설립되었다. 학생자원운동의 지도자가 된 존 모트(John Mott)는 “이 세대 안에 이 세계의 복음화(The Evangelization of the World in this Gneration)”을 표어로 삼고, 세계 선교에 힘을 쏟았다. 한국에 왔던 많은 선교사들도 이 운동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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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형균
장로회신학대학교 학부, 신대원, 일반대학원 졸업(한국교회사 전공). 오타고대학교 박사(선교학, 이민자 신학, 종교사회학 전공). 파머스톤노스 한마음교회 담임. 알파크루시스 강사. 현지교회와 이민자를 연결하는 꿈을 가지고, 선교와 이민이라는 주제를 다루려 한다. 관심분야는 선교학, 이민자 신학, 한국교회사와 아시아신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