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 나라의 선교 동향

가톨릭의 선교

이민자의 이야기를 선교의 역사 속에서 발견하기 위한 시작은 교회에서 소외되어 있었던 이야기를 발견하는 발걸음에서 시작된다.

그렇기에 선교의 역사에서도 개신교 선교운동 전의 흐름을 살펴보아야 한다. 간단하게, 안승오와 박보경의 현대선교학 개론에서 나오는 가톨릭 선교의 내용을 중심으로 살펴보려 한다.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이 있었던 1492년은 세계사에서 큰 획을 긋는 해이다. 이를 통해서 대 항해의 시대가 열리고, 서양 국가의 제국화가 빠르게 진행되었다. 바다 너머의 세상을 향한 권력의 열망과 더불어서 선교에 대한 열망이 불타오르며 가톨릭이 크게 확장되었다. 그러나 이 선교의 열망은 기독교 국가가 비기독교 국가들을 향한 식민지 열망이 표출되는 분출구의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특히 16세기에 들면서 교황은 비기독교 지역을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왕들에게 나누어 주며 선교하며 교회를 세우라는 명을 내림으로써 기독교 국가였던 포르투갈과 스페인에 새로운 땅을 개척하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것이라는 명분이 되었고, 그곳을 정복함으로 교회를 세우는 것이 선교는 중요한 의무가 되었다.

이로 인해 대 항해시대는 가톨릭의 해외선교의 확장과 밀접한 시기가 된다. 이 시기에 중요한 가톨릭 수도회는 예수회로 1540년 이그나티우스 로욜라에 의해서 설립되었다. 예수회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현지의 문화를 존중하는 것이다. 이로 인해서 초기 서방교회의 아시아지역 선교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수 있었다. 우선 예수회와 깊이 관련된 아시아 지역의 선교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인도 선교
인도 선교는 이전부터 존재해 오던 도마교회가 있으나 본격적인 가톨릭의 선교는 1542년 예수회 소속의 프란시스 사비에르가 도착하면서 진행되었다. 그는 당시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던 고아에 토착하여 포르투갈인을 대상으로 선교를 시작하였지만 곧 인도인들을 전도의 대상으로 포함시켰다.


그러나 사비에르의 선교 대상은 인도인 중의 하층민에 속하던 사람들이었기에 이는 상류층에 속하는 인도인들과 갈등이 생기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1590년 무굴왕조의 왕이 기독교를 허용하는 법령을 발표함으로 선교에 발전이 이루어졌다.


사비에르의 선교 사역을 이어서 로버트 드 노빌리가 선교를 하였지만 그는 사비에르와 달리 인도의 카스트제도를 인정하면서 상류층을 대상으로 선교하였다.

중국 선교
중국 선교는 예수회 소속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1552-1662)의 사역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는 1582년 마카오에서 선교를 시작하여 1601년에 북경에 도착하였다. 이때에 여러 과학 기계와 서적 등을 통해 신문물과 선교를 연결하였다.


마테오 리치는 이러한 신문물과 과학 서적 등으로 중국의 지식층과 관리들과 관계를 맺어갔다. 또한 중국 사상인 유교를 연구함으로 전통문화를 배척하기보다는 재해석하는 방향으로 복음과 접목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이를 위해서 그는 적극적으로 현지 문화와 동화되기 위해서 중국식 이름을 사용하며 중국식 복장을 착용하였다.


일본 선교
일본 선교의 경우는 인도에서 선교사역을 하던 프란시스 사비에르가 1549년에 약 27개월간 일본에서 선교사역을 하면서 영향을 끼쳤다. 그는 현지 대중들을 선교하기 위해서 현지 문화를 존중하는 방식을 선택하였다. 그로 인해 일본식 예절과 식문화를 받아들였다. 그의 영향으로 일본 안에서 가톨릭이 빠르게 성장하며 1581년에는 약 200여 교회가 설립되었고, 17세기에는 50만 명이 넘는 신도가 생겨났다.


그러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정책으로 인하여 1597년 나가사키에서 26명의 신자가 처형된 후 30여 년간의 박해로 인해서 수십만의 신자들이 순교했다. 이 내용이 엔도 슈사쿠의 유명한 소설인 “침묵”의 배경이 되었고, 이는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최종적으로 1638년 이후부터는 다시 개항되기까지 일본에서는 기독교인이 없다고 여겨졌었다.

앞에서는 우리에게 가장 낯선 가톨릭의 아시아 선교였다면, 대 항해시대에 가톨릭의 주요 선교지들 가운데 한 곳은 중남미 지역이다. 이 지역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담당하였다. 그 이유는 앞에서 잠시 언급한 것과 같이 1494년 교황 알렉산더 6세가 인위적으로 지역을 나누어 한쪽은 스페인에게 선교의 독점권을, 다른 한쪽은 포르투갈에게 주었다. 그 결과 브라질을 제외한 아메리카를 스페인이 담당하게 되었고 필리핀과 일본을 제외한 아시아 지역은 포르투갈이 담당하게 되었다.

문제는 전쟁을 통한 선교, 정복을 통한 선교가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던 시기였기에 선교사들과 왕의 군사들이 함께 대륙을 건너가게 되었다. 또한 이때에 중요한 것은 복음을 받아들인 가톨릭과 서구사회는 문명화되었지만 이외의 국가들은 미개한 상황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을 통해 그 땅을 정복하는 것이 미개한 사람들을 구원하는 것이라 생각하였다.


이러한 생각들은 군사들이 새로운 지역에서 만나는 원주민들을 무자비한 폭력으로 다스리며 약탈을 일삼을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 더불어서 중남미지역에서 자신들의 경제적인 일을 위한 노동을 위해 아프리카에서부터 노예를 약 1,000만 명을 데리고 오기까지 하였다.

하지만, 한쪽이 강하면 다른 쪽이 반발하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군사 중심의 선교가 힘이 강해지자 반대로 희생과 사랑을 통한 선교의 모습도 나타났다. 왕의 군사들은 원주민들과 아프리카에서 노예로 끌려온 사람들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가한 것에 비해 수도사들은 그들의 권익을 보호하려고 한 것이다.


그 예로 안토니오 몬테시노스, 라스 카사스, 클라버 등은 중남미의 원주민들을 위해서 헌신하였고, 클라버의 경우는 아프리카에서 끌려온 사람들을 도와주며 복음을 전하였다. 이 배경이 유명한 영화 “미션”이 된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교황의 칙령에 의해서 진행된 식민지 사업은 제국주의적 선교의 폐해인 것은 변치 않는 사실이다.

시대마다 선교의 흐름은 바뀌고 선교의 당위성도 바뀐다. 그렇기에 선교의 역사는 언제나 그 시대에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또는 자신에게 있어서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선교의 흐름과 생각에 스스로 질문을 던지며 성장할 것을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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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형균
장로회신학대학교 학부, 신대원, 일반대학원 졸업(한국교회사 전공). 오타고대학교 박사(선교학, 이민자 신학, 종교사회학 전공). 파머스톤노스 한마음교회 담임. 알파크루시스 강사. 현지교회와 이민자를 연결하는 꿈을 가지고, 선교와 이민이라는 주제를 다루려 한다. 관심분야는 선교학, 이민자 신학, 한국교회사와 아시아신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