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팔꽃 그리고 수선화

딸네가 아이들 교육 때문에 강남으로 이사 온 뒤에 우리 부부도 한국에 오면 좋든 싫든 서울의 강남에서 머물러야만 했다. 삼 십여 년 전 뉴질랜드로 이민 가기 전의 우리 가족의 삶의 터전은 집도 회사도 모두 강남이었지만 나이 들어 다니러 돌아온 강남은 우리 부부에게는 몸에 안 맞는 새로운 유행의 옷처럼 별로 마음에 와닿는 곳이 아니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뻗어 올라간 고층 빌딩과 아파트군, 그리고 휘황찬란한 쇼핑몰들은 저마다 사람들의 눈길을 빼앗고 있지만 우리에게 강남이란 맨 흙을 찾아볼 수 없는 아스팔트와 시멘트의 거리일 따름이었다.


그 거리를 꽉 채우고 시도 때도 없이 눈을 부릅뜨고 달려드는 자동차의 무리, 그 사이를 용케도 비집고 다니며 한 손엔 커피잔, 다른 한 손엔 핸드폰을 잡고 어딘가를 향해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쏟아내는 엄청난 생활 하수를 감당 못 하는 곳곳의 하수구로부터 풍겨 나오는 역한 냄새, 그 어느 하나도 우리 부부를 반겨주지 않았고 우리도 쉽게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그땐 우리 어떻게 이런 강남에서 살았지?”하고 내가 혼잣말하듯 아내에게 묻자 “그땐 이렇게 복잡하지 않았지요. 차들도 훨씬 적었고요.” 하며 아내가 조심스럽게 한마디 덧붙였다. “애들한텐 아무 말씀 마세요. 젊은 사람들은 이런 델 좋아해요.” 하며 내 눈치를 살폈다. “알았어요. 우린 잠깐 있다 갈 텐데 뭐 좀 참으면 되지.” 하고 아내의 속내를 아는 나는 아내를 안심시켰다. “다행히 우리에겐 양재천이 있잖아. 아침마다 우리 속을 시원하게 뚫어주는 양재천!” 하고 내가 말하자 “맞아요. 그 양재천마저 없었다면 참 견디기 어려웠을 거예요.” 하며 아내도 맞장구를 쳤다.

한국에 온 그 다음 날 새벽부터 우리 부부는 양재천을 중심으로 양쪽 냇가에 마련된 산책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곳에 와보지 않은 누구에게라도 권하고 싶을 만큼 양재천의 산책길은 잘 조성되어 있다.


한가운데로 널찍하게 흐르는 냇물을 사이에 두고 가장 낮은 곳엔 2차선의 도로가 마련되어 있어 자전거와 사람이 서로 방해받지 않고 다닐 수 있고 그보다 사람 키 둘 정도 높은 곳으로 좁다란 산책 전용로가 마련되어 있어 혼자서 혹은 둘이서 호젓하게 걷고 싶은 사람들은 이 길을 이용하면 되고 다시 그보다 사람 키 셋 정도 높은 곳에 사람 대여섯이 함께 다녀도 될 정도로 넓은 산책 전용로가 있어 그 길에서는 삼삼오오 이야기를 나누며 같이 다닐 수도 있다.


한쪽에 3차선(자전거 도로까지 합하면 4차선)의 높이가 다른 도로가 냇물을 중심으로 양쪽에 있으니 모두 6차선의 도로이다. 냇물을 중심으로 잘 정돈된 나무와 풀밭 사이로 벋어 나간 6차선의 산책로는 그 어디서 보아도 그 자체만으로도 장관이다. 더더구나 산책로 곳곳에 가꾸어 놓은 꽃밭, 여기 저기 잘 설치해 놓은 운동기구들, 거기 매달려 운동하는 사람들의 모습들은 합하여 날로 발전하고 있는 한국의 모습을 보여주는 산책길로 손색이 없었다.

그날 새벽에도 동이 트자 곧 우리는 양재천을 걷기 위해 아파트를 나왔다. 양재천을 걷는 아침마다 우리를 맞아주는 한국의 가을 날씨는 정다웠다. 미세먼지와 황사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초가을 한국의 아침 공기는 아직 신선하였고 해가 떠오르려고 하는 아침 하늘은 아이들을 내려다보는 어머니의 얼굴만큼이나 맑기만 했다.


“오늘은 우리 반대편으로 걸어봐요,”라고 말하는 아내의 제안에 그날 아침에 우리는 늘 가던 오른쪽의 도곡동 쪽 산책로 대신 왼쪽의 잠실 쪽 산책로를 택했다. 한 십오 분쯤 걸었을까 머리 위를 지나는 고가차도를 지나기 위해서는 밑으로 내려가는 계단을 따라 내려가야 했는데 계단을 다 내려가 오른쪽으로 돌자 돌연 눈을 찌르듯이 들어온 광경은 오른쪽 비탈길을 꽉 채운 나팔꽃의 무리였다. 아, 그때의 반가움과 예상치 않았던 기쁨이라니!

한 무리의 나팔꽃
양재천의 산책길은 훌륭하였지만 어떤 곳들은 지나치게 인위적인 것이 사실이었다. 한가운데를 흐르는 냇물이나 양쪽으로 조성된 산책길이나 그 길 양옆에 세워진 나무들이나 길 곳곳에 만들어진 꽃밭들이나 모두가 보기 좋았고 잘 어울렸지만 무언가가 조금 과장된 느낌이라 간혹 자그마한 거부감이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었다. 아마도 그런 마음을 갖고 있었기에 그날 아침 비탈길에서 만난 나팔꽃의 무리가 그렇게도 반갑고도 신선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혼자서는 결코 자신이 없다는 듯이 머리에 머리를 맞대고 아니면 잎사귀 속으로 숨다 숨다 터져 오르는 부끄러움을 더 이상 어쩔 수 없어 서로 같이 얼굴을 드러낸 듯한 한 무리의 나팔꽃이 내게 안겨준 감동은 너무도 산뜻하고 소박한 것이었다.


“어떻게 이런 곳에 이렇게 소담스럽게 피어난 나팔꽃이 있지요?” 하고 같이 발걸음을 멈춘 아내가 독백하듯 내게 물었다. “그러게 말이오. 이 번화한 강남에서 돌연 화장도 안 한 맨 얼굴의 순박한 시골 색시를 만난 기분이 드는데……” 하면서 나는 말을 다 마치지 못하였다. 바로 그 순간 번개같이 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시 한 구절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까마득한 옛날 학창 시절에 즐겨 애송하였던 윌리엄 워즈워스의 수선화라는 시(詩)였다.

수선화
‘골짜기와 산 위에 높이 떠다니는 구름처럼 외로이 헤매고 다니다가 나는 문득 무리 지어 활짝 피어 있는 황금빛 수선화를 보았나니
호숫가 나무 아래서 산들바람에 한들거리며 춤추는 모습을


—–중략——-


홀가분한 마음으로 생각에 잠겨 자리에 누워있을 때면 가끔
내 마음속에 수선화의 모습 떠오르니 이는 고독이 주는 축복이라
그때 내 가슴은 기쁨으로 가득 차서 수선화와 더불어 춤을 춘다’

낭만주의의 하늘을 구름처럼 떠돌며 영국의 평원을 방랑하다 한 무리의 수선화를 만난 워즈워스(William Wordsworth: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1770~1850)의 시심을 번잡한 서울 강남의 인공의 냇가 비탈길에서 만난 한 무리의 나팔꽃이 주는 반가움과 감히 비교도 할 수 없겠지만 그 아침 내가 만난 나팔꽃이 워즈워스의 황금빛 수선화만큼 내게 감동을 준 것은 여하튼 사실이었다.

매년 고국을 찾을 때마다 이번엔 꼭 만날 사람들만 만나고 너무 많이 돌아다니지도 말고 가능한 여유로운 시간을 갖겠다고 다짐하고 오지만 막상 오면 왜 그렇게 만날 사람들도 많고 가봐야 할 곳도 많은 지 처음 얼마 동안은 거의 정신이 없었다.

올해 고국 방문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는 바쁜 일정도 거의 마쳤으니 오늘 저녁이라도 잠들기 전에 수선화의 시인처럼 홀가분한 마음으로 생각에 잠기면 어쩌면 내가 만났던 나팔꽃의 무리도 내 마음 속에 떠오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면 나도 워즈워스처럼 기쁜 마음으로 모든 것을 잊고 나팔꽃과 더불어 춤을 추고 싶다.

이전 기사너를 사랑하니라
다음 기사동동구루무
김 동찬
서울대 영문학과 졸업. 사업 하다가 1985년 거듭남. 20년 간 Auckland Christian Assembly를 장로로 섬김. 칠십이종심소욕불유구(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라는 성현의 말씀에 힘입어 감히 지나온 삶 속에서 느꼈던 감회를 시(詩)와 산문(散文)으로 자유롭게 풀어 연재하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