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 얼굴

잠언 15:13

“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하여도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하느니라”
A happy heart makes the face cheerful, but heartache crushes the spirit.

어느 날 자녀를 학교에서 픽업하면서 차 안에서 대화를 나누던 중이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행복이란 무엇인가’라는 매우 철학적인 대화로 이어졌다.

당시 초등학교에 갓 입학한 둘째 아들에게 물었다. “사람이 행복한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아들이 잠시도 고민하지 않고 바로 답했다. “스마일 하면 행복한 거야.” 그러면서 입술이 귀에 걸리듯 웃어 보였다. 아들의 그런 사랑스러운 모습을 보니 절로 웃음꽃이 피었다.

그렇게 행복을 전해 받은 것을 보니 아들 말이 맞는 것 같다고 답했다.

행복하면 웃는다는 것은 어린아이도 아는 사실이다. 얼굴이라는 단어가 본래 “얼-꼴” 곧 우리의 얼(정신 또는 마음)을 담은 그릇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지 않은가? 오늘 잠언은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하고 반대로 마음의 근심 또한 얼굴을 통해 알 수 있다는 것이다.

하루에 자신의 얼굴을 몇 번이나 보는가? 적어도 서너 번 이상은 볼 것이다. 많이 보는 자는 수십번도 더 볼 것이다. 그렇다면 얼굴을 볼 때 마음도 함께 살펴보려 노력하는가? 하루에도 여러 차례 얼굴을 보지만, 마음도 함께 보려는 시도는 잘 안 하게 된다. 마음 상태를 가장 잘 보여주는 거울이 얼굴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는 얼굴을 통해 마음을 보는 방법을 몰라서가 아니다. 남의 얼굴 살피는 일은 아주 잘한다. ‘피곤해 보인다. 안색이 안 좋아 보인다. 얼굴 좋아 보인다,” 등 꽤나 섬세하게 상대의 마음을 살핀다.

그러나 자기 얼굴을 보며 자신의 마음 상태를 진단하는 일에는 왜 그리 무심하고 게으른 것일까? 직시하고 싶지 않은 것들이 쌓여있기 때문일 수도 있고, 가면 뒤에 숨어 있는 본심을 대면할 자신이 없어서 일 수도 있다.

우리는 타인의 얼굴과 마음을 살피기 전에 내 얼굴과 마음을 먼저 살펴야 한다. 마음을 정돈하고 Calm Down 시켜야 한다. 이것이 선행되지 않으면, 세상과 타인을 왜곡된 시각으로 보게 된다. 오해하고 착각하고 상처받고 상처를 준다.

과대망상이라는 정신병은 왜곡된 시각을 진실로 받아들이면서 시작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이면을 정확하게 보기 위해선 먼저 내 마음의 호수가 깨끗하고 고요해야 한다. 용기를 내어 내면이 무엇으로 가득한지,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지,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 살펴야 한다. 근심, 욕심, 탐심, 분노, 원망, 불신, 음란, 무정함, 돈을 사랑하는 마음이 뿌리내리지 못하도록 지켜야 한다.

참되고(True) 경건하며(Noble) 옳으며(Right) 정결하며(Pure) 사랑받을 만하며(Lovely) 칭찬받을 만하며(Admirable) 덕(Excellent)과 기림(Praiseworthy)이 있는 것으로 채워야 한다(빌 4:8).

그렇게 마음을 아름답게 가꾸는 일에 노력하다 보면, 오늘 말씀처럼 우리 얼굴은 빛이 날 것이다. 하나님을 뵙고 산에서 내려온 모세의 얼굴처럼 광채가 날 것이다. 변화산에서의 예수님의 얼굴처럼 빛나는 빛의 자녀 되길 축원한다.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시편 15:1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
LORD, who may dwell in your sanctuary? Who may live on your holy hill?

어떤 장소에 계속해서 머무르거나 거주하기 위해선 그에 맞는 자격조건을 반드시 갖춰야 한다. 잠시 방문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지속해서 머무는 일은 아무에게나 허락되지 않기 때문이다.

간단한 예로, 손님이 집에 방문할 수 있지만 허락 없이 거주할 수는 없다. 내 집에 거주할 수 있는 사람은 내 가족이든지 그럴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하나님의 성전은 더더욱 그렇다. 거룩한 하나님이 집이기에 아무나 발을 들일 수 없을뿐더러, 거주할 수 없다. 오직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택하신 자만이 머무를 수 있다. 시편 기자는 본 시편에서 그 자격조건을 나열하고 있다.

먼저 마태복음 22장 기록된 예수님의 천국 비유를 상고해 보자. 임금이 아들을 위해 혼인 잔치를 열었다. 명성과 위치에 걸맞게 유명하고 유력한 사람들을 초대했다. 그러나 무슨 일인지 그들은 초대에 응하기를 거부한다. 임금은 종들을 통해 잔치의 풍성함과 성대함을 알리며 재차 초대한다.

허나 이번에도 사람들은 자기 할 일을 하느라 바빠 듣는 둥 마는 둥 한다. 심지어 임금이 보낸 종을 모욕하고 죽이려는 이도 있다. 이에 격노한 임금은 다소 극단적인 명령을 내린다.

“길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가리지 말고 초대하라.”

이에 종들이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모두 데리고 온다. 우여곡절 끝에 잔치의 모양은 갖춰졌다. 그러나 임금이 손님들을 만나러 돌아다니다 예복을 갖춰 입지 않은 사람을 발견하곤 그를 즉시 쫓아낸다.

이 비유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이스라엘 민족만이 아닌 모든 이에게 주어진 것을 보여주는 동시에 오직 은혜로 초대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적절한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은 참여할 수 없음을 경고하신다.

그렇다. 주의 장막에 머무르고 주의 성산에 살 수 있는 자는 거룩한 예복을 갖추어 입은 자다. 시편 기자는 그 예복을 구성하는 요소들을 아주 상세하게 설명한다.

그것은 곧, 정직, 공의, 진실, 입으로 죄를 범하지 않는 것, 하나님을 경외하고 또 경외하는 자를 존대하는 것, 불의한 재물을 멀리하는 것 등등 아주 구체적인 삶의 행위들이다. 이런 삶의 실천들이 우리가 갖춰야 할 예복이다.

계시록에서 구원받은 주의 성소들이 입은 옷을 그들의 옳은 행실이라 표현했다(계 19:8).

우리는 주의 영원한 잔치에 초대받았고 주의 성소에서 살도록 부름을 받았다. 그곳에 계속해서 머무르기 위해선 격식에 맞는 예복을 늘 입고 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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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 경헌
레이로드 칼리지 졸업. 장신대신학대학원 목회학 석사. 왕가누이 한인교회 담임. 분주한 일상 중 잠시 시간을 구별해 잠언과 시편 말씀을 꾸준히 묵상하다 보면 우리 안에 영적인 지성과 지적인 영성이 형성될 줄 믿는다. 주의 말씀으로 풍성한 복이 되기를 소망하며 연재를 하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