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 데우스(Homo Deus) 시대의 인간학

용어가 사유를 가능하게 한다
유발 하라리의 전망에 기초한 ‘호모 데우스’ 시대의 인간 이해에 대한 담론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소개하고 싶은 현대 철학 이론이 있습니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 1889~1951)이 『철학 탐구』에서 언급한 ‘언어 놀이’입니다. 비트겐슈타인에 의하면 “하나의 언어를 머리에 떠올린다는 것은 하나의 삶의 양식을 떠올리는 것이다”라며 언어는 생활양식의 산물임을 주장합니다. 즉 모든 언어에는 그 언어를 구성하는 풍습, 제도, 역사, 문화를 비롯한 인간의 ‘총체적인 삶의 양식’이 반영된다는 의미이지요. 그 때문에 그 언어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 시대의 생활양식을 이해해야 합니다.

언어란 그 언어가 사용된 언어영역 안에서만 일정한 의미를 갖는 셈입니다. 그래서 언어영역을 바꾸는 것은 하나의 사고 차원에서 다른 차원으로 옮겨가는 것이자, 하나의 삶의 형식에서 다른 삶의 형식으로 옮겨 가는 일이 되기도 합니다. 그 결과 이미 사용하고 있는 개념들이 변화하거나 더욱 확장되어 새로운 관점을 형성해 줍니다. 그리하여 이해의 폭을 넓히고 타인과의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이해의 진보’를 선물하기도 하지만, 반면에 본뜻을 왜곡하는 오해의 소지도 남깁니다.

그럼에도 우리의 사고로 접근하기 어려운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전문 용어’(Terminology)의 사용입니다. 각 분야의 전문 용어는 사유의 기본 단위로 마치 벽돌이 건물을 짓게 하는 것처럼 우리의 사유를 가능하게 합니다.

앞서 살펴보았던 히브리적 사상을 헬라의 언어를 사용해 기록한 신약성경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하지만 철저히 자연과학의 논리를 따르며 자연주의(Naturalism) 진화론에 입각한 기술 인본주의 내지는 데이터주의(Dataism)를 기반으로 하는 ‘호모 데우스’ 시대의 인간 이해를 기독교 신학의 인간학과 연결해 비교하기는 다소 한계가 있음을 인정해야 할 듯합니다.

호모 유스리스(쓸모없는 인간) vs 호모 데우스(신적 인간)
유발 하라리의 호모 데우스 시대의 인간 이해는 “수백만 년의 진화를 거치며 자연 선택된 유기적 알고리즘들의 집합”(호모 데우스 437)으로 밝히듯 인간의 지능과 의식은 오랜 진화의 과정을 통해 고도화된 알고리즘으로 이해하는 데이터 중심 세계관입니다. 이는 진화론적 역사의식에 기초한 이해로, 종교적 인간 담론은 철저하게 해체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현실이 미래에 좀 더 확장되어 구체화되면 인간은 불평등한 두 그룹으로 나눠지게 될 것이라고 하라리는 전망합니다.

첫째 그룹은 우월한 비의식적 알고리즘의 지배를 받는 “쓸모없는 계급”(Useless class)입니다. 이 쓸모없는 계급을 김용규는 “호모 유스리스”(Homo Useless)라는 용어로 표현합니다. 인류의 대다수가 속하게 될 이 그룹은 대부분의 일자리를 알고리즘에 내어주고 한때 세계를 지배했던 사피엔스의 신성한 지위를 상실하게 될 것을 예상합니다.

두 번째 그룹은 생명공학, 사이보그 공학, 인공지능과 같은 첨단 과학을 통해 슈퍼 휴먼이 된 극소수의 부자들, 즉 “전능한 알고리즘을 소유한 소수 엘리트 집단”(P482)으로 이들이 바로 호모 데우스가 될 것입니다.

호모 사피엔스에서 진화된 호모 데우스는 마치 올림포스산 정상에서 ‘불멸’, ‘행복’, ‘신성’을 누리며 사는 그리스 신들처럼 첨단 과학으로 업그레이드된 소규모 특권 그룹으로서 모든 부와 권력을 독점할(P474) 것이라 주장합니다.

이는 현재의 구글과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유튜브, 블록체인과 같은 인공지능 알고리즘들이 “모든 것을 아는 신탁이 되며, 그다음에는 대리인으로 진화하고 마침내 주권자로 진화”하는 “그 알고리즘들이 스스로 주인이 될지도 모르는 상황”(P467)이 초래하게 될 것이라는 주장은, 실현 가능성이 점점 커 보이는 가설입니다.

데이터주의에 따르면 “인간은 그저 사물인터넷을 창조하는 도구이며, 사물인터넷은 결국 지구에서부터 은하 전체를 아우르고 나아가 우주 전체로까지 확장될 것이다. 이런 우주적 규모의 데이터 처리 시스템은 마치 신과 같을 것이다.

이런 시스템은 어디에나 존재하며 모든 것을 통제할 것이고, 인간은 그 안으로 흡수될 것이다.”(P522)라는 그의 주장은 마치 우주적 규모의 데이터 처리 시스템인 사물인터넷은 무소 부재하며, 전지전능하여 숭배의 대상이 될 것이라는 종교적 개념을 차용한 진술로 미래 데이터주의 인간 이해의 본질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인간은 단순한 데이터처리 시스템으로 우주적 사물인터넷 안으로 흡수되어 신성화된 사물인터넷을 의지하고 데이터를 숭배하는 새로운 신앙을 가진 “호모 렐리기오수스”(Homo Religiosus)(P534)가 될 것을 예상합니다.

여기서 명명된 호모 렐리기오수스는 데이터와 알고리즘을 신봉하는 의존적 존재로서 비인격적, 비의식적으로, 전체 중 일부에 불과한 하나의 부품과 같은 존재입니다.

즉 하라리가 전망하는 호모 렐리기오수스는 종교적 차원의 존재가 아니고, 사회기능적 차원에서의 의존적 존재입니다. 이는 기존의 종교에서 전개한 신을 숭배하는 종교적 인간과는 전혀 다른 개념으로 데이터의 지배를 받은 인간을 종교적 인간으로 정의하고 있는 용어입니다. 이것이 인간 역사에 대한 하라리의 종말론입니다.

자율(autonomy)과 타율(heteronomy) 그리고 신율(theonomy)
일반 철학이나 신학에서는 이성과 계시의 대립을 주로 논하였지만, 현대 신학자 폴 틸리히(Paul Tillich, 1886~1965)는『문화의 신학』에서 “신앙은 현대 문화를 수용해야 할 필요가 있고, 현대 문화도 신앙을 수용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언급하면서 문화와 신앙, 이성과 계시가 어떤 상관관계를 가지고 서로 상응할 것을 추구했습니다.

따라서 틸리히의 신학은 평범한 일상적인 삶에 적용할 수 있는 구체적인 신학적 답변을 추구합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답으로 계시를 향한 이성의 모습을 “자율”, “타율”, “신율”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합니다(개인적으로 틸리히의 신학 특히 기독론을 지지하지 않습니다).

“자율”은 ‘자기 법칙성’으로 인간은 신의 형상으로서 창조주의 일부분을 나타낼 수 있다는 인간의 자율성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즉, 개인이 독립적으로 도덕적이고 합리적 판단이 가능하다는 개념입니다.

반면에 “타율”은 ‘타인의 법칙성’으로, 종교적인 규범, 사회적인 규칙, 윤리적인 원칙 등 외부적인 규범이나 권위에 의해, 인간이 행동을 결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기에 개인의 자율성은 상대적으로 제한됩니다.

“신율”은 하나님의 섭리와 은총에 의해 모든 상황과 여건이 성숙하여 자기를 폐기하지 않고 오히려 초월적으로 실현되는 자율을 말합니다. 신율은 종교적 권위에 의해 인간의 자율을 전적으로 폐기하는 타율과는 다릅니다. 신율의 이러한 추구에, 바로 계시가 필요로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틸리히는 “자신의 신적 근거를 알고 있는 자율이 곧 신율”이라고 규정합니다.

기독교 신학은 이런 전망 속에서 신율에 기초한 희망적 인간학 담론을 추구할 수 있습니다. 틸리히의 신율은 신의 존재와 인간의 도덕적 행동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개념입니다. 이는 종교적인 관점에서 도덕적인 원리와 가치를 신의 명령에 근거하여 결정하고 행동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율에 따르면 신은 존재 그 자체로서 절대적인 도덕적 규범을 나타내며, 이러한 신의 규범은 인간의 도덕적 행동의 기초와 지침으로 개인의 자율성과는 다소 구별되는 개념입니다.

‘자율’은 개인의 내부 도덕적 신념과 가치에 기반을 두고 결정되는 반면, ‘신율’은 외부적인 신의 규범과 명령에 따라 행동함을 강조합니다. 틸리히의 신율 개념은 호모 데우스 시대의 신학적 인간학 담론으로서 적합할 듯합니다.

하라리가 전망하는 호모 데우스 시대는 데이터와 알고리즘을 규범으로 삼는 타율적 시대입니다. 소수의 업그레이드된 인간이든, 사물인터넷이든 타율의 문화가 낳은 결과는 파국적으로 그려집니다. 그 이유는 신율이 제거된 데이터와 알고리즘은 세계를 인간의 궁극적 관심으로 이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주적 데이터처리 시스템인 사물인터넷을 구축하는 일이 포스트 휴먼에게 맡겨져 있는데, 신율을 제거한 문화 속에서 포스트 휴먼이 만들어 낸 데이터는 비인격적이기 때문에 궁극적 가치보다는 효율성을 지향합니다. 따라서 가치지향적이 아닌 데이터 중심 시대는 진보와 희망이 아닌 디스토피아적 전망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의 협력은총(Cooperative Grace)
기독교 신학 역사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틸리히보다 먼저 자신의 삶을 신율적인 것으로 파악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의 『고백론』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그는 매 순간 스스로 선택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 누구도, 심지어 어머니 모니카마저 그를 말리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그는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과정이었음을 고백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자기 삶의 신적 근거를 깨달았을 때, 다시 말해 자기 삶의 바탕에 언제나 하나님이 계신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자율적으로만 인식되었던 자신의 모든 과거가 하나님의 섭리와 은총에 의해 이뤄졌다는 것, 곧 신율적인 삶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이는 죄인에서 회심을 이룬 다음에 하나님은 새로워진 인간의 의지와 협력하여 성화의 과정을 이루기 위해 일하신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죄의 굴레에서 인간의 의지를 해방하기 위해 하나님은 그 해방된 의지와 협력하여 우리의 삶을 인도해 가시는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이는 창세 전에 택하신 성도의 삶 전체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주님, 주님은 위대하시고 크게 찬양받으실 것입니다”로 시작하여 “모두가 당신에게 구할 일이요, 당신 안에서 찾아야 할 일이며, 당신만을 두들겨야 합니다. 오직, 이렇게 하는 데서만 받을 것이고 찾을 것이고 열릴 것이다”로 끝나는 『고백론』에 대해 우리가 맨 먼저 내려야 할 평가가 바로 이것입니다.

출처: 김용규,『신; 인문학으로 읽는 하나님과 서양 문명 이야기』(IVP 출판사, 2021)을 저자와 출판사의 허락을 통해 책에서 다뤄지는 기독교 신학의 내용을 필자의 관점에서 재 인용과 재 해석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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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봉조
총신대 신대원 졸업. 세계선교교회 담임. “언어는 존재의 힘이다”는 통찰을 빌려 신학을 기반으로 한 인문학의 언어로 하나님과 우리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이를 통해 하나님 사랑에 대한 삶의 귀중한 자리를 확인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