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2장 20절의 말씀으로 사는 믿음이 역사가 돼

이해풍 장로<크라이스트처치 장로교회 은퇴 장로>

그림 설명/2021년 11월 더니든 오래된 성을 구경했다. 돌아오는 길에 화려해진 도시의 모습을 보며 시간은 항상 늙지 않고 시간 속 색깔 이야기를 그대로 가지고 있는데, 왜 세상 사람들은 시간에 옷을 입혀 놓고 다르다고 생각할까? 그래서 나는‘옛날과 지금이 항상 아름다운 친구야’라고 느끼도록 그려 보았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라디아서 2장 20절)

나의 소원 가운데 70살에 주례를 서는 소망이 있었다. 그런데 70살에 가장 소중한 주님과 성도 간의 주례의 자리에 있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의 말씀을 의지하여 <이름을 기념하라>는 제목으로 설교와 간증을 하려고 한다.

지금 꿈꾸고 행동하며 역사 만들어라
성경과 사람은 통으로 보아야 한다. 인간사나 세상사는 사람 이름의 역사이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유다, 베레스, 헤스론, 나손, 살몬, 보아스, 오벳, 이새, 다윗.

사람이 발명한 것 중에 최고의 걸작품이 무엇인지 아는가? 바로 의자이다. 힘들 때 그 사람이 앉을 수 있도록 우리가 의자가 되자. 그 다음의 걸작품은 부부이다. 부부는 사랑해도 싸운다. 그 이유는 ‘서로 맞추며 더 열심히 살아갈게요’라는 아름다운 신호이다.

진통 없는 출생은 없다. 성장에는 성장통이 있고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대가를 지불해야 하며 시련과 단련을 해야 한다. 광야를 즐겁게 통과함으로 성숙해지는 것이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의 말씀으로 사는 믿음이 역사가 된다.

착한 생각(빌립보서 1장 6절)과 꿈을 꾸는 사람(데살로니가전서 5장 16절-18절), 그리고 행동하는 사람(역대상 11장 17절-19절)이 역사를 만들어 가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자기 이름을 기념하는 사람이다.

또 하나의 이름이 기념되는 현장
얼마 전 크라이스트처치에서 66살의 장로가 소천했다. 이 장로는 이미 1976년 대학에서 후배로서 만났지만 한국에서 각각 살다가 뉴질랜드로 이민 와서 서로 가까이 지낸 지 수년이었다. 이 장로는 크라이스트처치에서 한인교회 개척에도 동참했고 크라이스트처치 한인회를 통해 여러 모양으로 봉사했다.

이 장로는 주일 예배 후 가장 좋아하고 편했던 친구들과 헤글리 공원을 산책한 다음에 따듯한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자연을 마음껏 만끽하고 집에 돌아와 아내와 휴식했다. 친구로부터 테니스 치자는 전화를 받고 “잠시 다녀올게, 여보.”하고 집을 나섰다. 집을 나서기 전에 “심하게 테니스 치지 마세요.”라는 아내의 말을 들었다.

이 대화가 부부가 나눈 마지막이었다. 테니스는 10분 정도 치고 5분간 쉰다. 이 장로는 때때로 “운동하다 쉬면서 음식물을 섭취할 수 있는 테니스는 과격한 운동이다.”라고 했다. 5분간 쉬는 동안에 이 장로에게 심장마비가 왔다.

이 장로의 아내에게서 전화가 왔다. 현장으로 가 보니 테니스 코트의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눈을 뜬 채로 아주 평온하게 하늘을 보며 이 장로가 영면했다. 이 장로를 위해 기도한 후에 이 장로의 눈을 감겨드렸다.

삶과 죽음의 현장을 처음으로 경험했다. 이 장로는 주일예배 후에 교회 식구와 소풍을 갔다가 집에 돌아와 아내와 함께 있다가 평생에 가장 좋아했던 테니스와 함께 하늘을 보며 생을 마감했다. 예수님보다 딱 2배를 더 살다 갔다. 내가 살아온 70년 중에 또 하나의 이름이 기념되는 현장이었다.

<크라이스트처치 섬너 바닷가> 
2022년 11월 나는 새벽기도가 끝나면 아내와 함께 도심 근처 섬너 바닷가를 함께 걷는다. 어느덧 70이 훅 넘었다. 바닷가 그 가을을 그려보고 싶었다. 
바다_ 젊은이에게는 아름답겠지만 70의 눈에는 신비롭기까지 하다. 늘 표현이 부족하지만 자족하며 붓을 놓는다.

말씀대로 살아낼 때 얻는 아름다운 열매가 행복

아는 것과 깨닫는 것의 차이 분별하여 지혜롭고 겸손히 살기를

사람은 병원에서 하얀 벽과 천장에 붙은 형광등을 보며 생을 마감한다. 아니면 집에서 천장을 보며 생을 마친다. 때론 사고로 고개 한번 들어보지 못하고 죽는다.

인생의 흔적을 보려면 은행 통장 기록을 보면 알 수 있다. 술집, 맛집, 이상한 집을 숨김없이 다 볼 수 있다.

나무에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나이테를 보면 날씨의 변화를 알 수 있는 것과 같이 헌금, 봉사, 구제, 섬김, 기금, 선교, 선물, 책값, 여행, 문화 비용과 같이 따듯하고 아름답고 행복한 통장 기록이 있다.

도전하고 행동할 때 아름답다
오래전부터 매주 20불씩 모았다. 시간이 지나 700불이 되어 어느 목사 부부를 위해 크라이스트처치로 초대하여 만나는 아름다운 일이 있었다.
하루 2불. 이것은 물질이 아니고 기도였다. 누구나 할 수 있고 무엇이든지 꿈을 만들 수 있다. 사랑의 크기가 아니고 감동이다.

6.25 종전기념일인 7월 27일쯤에 언론에 알리지 않는 조건으로 6.25 참전용사 후손에게 장학금을 주는 일을 10년 넘게 해왔다. 해마다 장학금이 준비되었느냐고 연락이 왔다.

코로나-19로 인한 경제 침체로 사업이 어려워지는 가운데 장학금 준비해야 했다. 약속한 날이 되어 전화가 왔다. 더 이상 장학금 전달을 안 해도 되겠다고 했다. 이를 놓고 기도하던 중이었는데 하나님의 선물과 같이 명예롭게 마감할 수 있었다.

지금 어렵죠. 힘들죠. 앞길이 막막하죠. 행복한 일, 아름다운 길을 만들기 위해서는 도전하세요, 행동하세요. 이런 도전을 준비할 때 정말 멋있다. 참아내고 인내하고 스스로 그 일을 감당할 때 행복하다.

타는 차가 좋지 않아도 괜찮다. 차 안은 깨끗하게 할 수 있다. 명품이 아니어도 깨끗하게 입고 다닐 수 있다. 부족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안에 무엇을 채우는 것은 각자의 몫이다.

이 세상에 가장 멋진 사람은 사자와 같은 성품을 가진 사람과 용기 있는 사람이다. 사자는 어떤 동물에게도 물러서지 않는다.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쓴 사도 바울과 같이 그는 주 외는 어떤 권력자, 유명자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바울은 예수의 수제자 베드로에게도 “너 똑바로 해.”라고 했다.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할 일이 있기로 내가 저를 면책하였노라.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저희가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남은 유대인들도 저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저희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갈라디아서 2장 11절-13절 개역한글).

사자는 배가 부르면 그 앞에서 토끼가 까불고 건드려도 가만히 보고 있다. 말씀으로 기도로 성령 충만한 속이 꽉 찬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다.
갈라디아서를 50번 넘게 정독했다. 그러면 최소한 반 이상은 줄줄 외워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 어느 날 새벽 기도할 때 투덜거리며 말했다.

“주님, 저는 머리가 좋지 않은 모양입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린도후서 12장 9절).
“사람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갈라디아서 1장 1절)에서 “아멘”(갈라디아서 6장 18절)까지 다 섭렵했다면 지식 안에 갇혀 무척 교만했을 것이다.
‘아는 것’과 ‘깨닫는 것’의 차이를 분별하게 됐다. “교만이 오면 욕도 오거니와 겸손한 자에게는 지혜가 있느니라”(잠언 11장 2절).

진정한 용기는 어떤 것인가?
10여 년 전, 아내와 함께 미국에 사는 아들 가정을 방문했다. 아들 가족과 같이 뉴욕 스퀘어가든을 관광차 갔다. 그때 나는 원인 모를 화를 며느리에게 냈다. 온 가족이 울었다. 2-3주 후 관계가 회복됐다고 여기고 크라이스트처치로 돌아왔다.

10년이 지난 어느 날, 사람은 수술하고 완치되어도 수술 흔적은 남는다는 것을 말씀을 통해 깨달았다. 그 수술 흔적을 들추어내어 치유하자고 결심했다.
화상 통화로 40이 넘은 아들을 불렀다. 화상에 나타난 아들을 보고 며느리와 함께 할 말이 있다고 했다.

“며늘아, 2011년 나와 엄마가 뉴욕에 갔을 때 내가 너의 눈에 피눈물 나게 했지?”
“아유, 아버님! 다 잊었어요. 그리고 그동안 저에게 그 이상으로 해주셨잖아요.”
“아니다, 그래도 내가 용서받을 것은 받아야 한다. 어른이라고 다 뭉개고 갈 일은 아니지. <자랑스러운 부모, 자랑스러운 자녀>라는 가훈 아래 회개와 회복이 있어야 해. 비록 지난 일이지만 그때 내가 화를 낸 것은 잘못한 일이다. 아버지가 잘못했다. 아버지가 잘못했다. 아버지가 잘못했다.”

며느리가 화면에서 사라졌다. 잠시 후 많이 울었던지 눈시울이 젖어 있었다.

“아버님 고맙습니다. 저를 인격체 며느리로, 진정 이 집 안에 자리하게 해 주셨습니다. 아버님! 정말 자랑스럽고 멋있습니다.”

함께 승리했고 함께 울었다. 참으로 어려운 무릎 꿇음이었지만 한평생 부끄럽지 않게 살아온 내가 가정에서 인정받지 못한다면 나는 지금 이 자리에 설 수 없다.

유기성 목사 사모가 유튜브에서 선한목자교회의 어느 은퇴 예배 가운데서 한 말에 가슴이 뜨거워졌다.
“정말 감사한 것은 제 남편 유기성 목사가 설교한 대로 제 곁에 살아주어 너무 행복했습니다.”

이제 만 70살까지 살아온 내가 잠시 후 주님 앞에 섰을 때 어떤 일을 하고 왔다고 보고할 것인가? 힘드냐, 외롭냐, 앞길이 안 보이느냐, 말한 대로 살아내야 한다. 성경에 답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