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름이라는 죄

“나는 게으른 사람일까?”
“그렇다.”

누구에게나 조금은 민망할 수 있는 이 질문에 내가 망설임 없이 대답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나와는 너무도 대비되는 내 아내와 함께 산 세월 덕분일 것이다.

내 자신의 게으름에 대해 스스로 별다른 변명의 여지가 없음에도 내가 20년간 함께 살고 있는 아내를 거울삼아 비교해 보고 있는 것은 그 거울 속 내 모습이 더욱 선명하게 게을러(?)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모든 일상에 ‘쉼’보다는 ‘일’을 택해 살고 있는 아내의 모습은 그렇기에 항상 바삐 돌아간다. 많은 이민자 가정의 일상이 그러하듯, 집안일과 아이들의 양육, 그리고 경제적 책임의 분담까지. 무엇 하나 쉽지 않은 일들을 척척 해내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때론 경이로움이 느껴지기도 하는 것이다.

잠시라도 쉴 짬이 있을라 치면 의자와 침대에 파묻히기를 즐거워하는 나로서는 그 시간 항상 새로운 일을 찾아내고야 마는 아내의 모습에 자주 놀라면서도 존경의 마음마저 들곤 했던 것이다.

아내의 이런 삶의 모습은 근면함으로 보자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인물상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현대사에서 보여준 대한민국의 역동적 성장과 성공의 배경은 개개인이 보여 준 이러한 민족적 근면성에 분명 의탁하고 있었으리라. 어린 시절, 우수상보다 개근상을 더 중요시 여길 만큼 자신이 속한 세상과 사회에서 항상 최선을 다해 살아 내고자 했던 우리의 삶은 어느새 어느 누구 하나 예외랄 것 없이 근면의 화신이 되어 버린 듯하다.

이와 같은 민족적 근면성은 아무리 스스로를 게으르다 자평하는 내 삶의 모든 순간에도 역시 비켜나는 법이 없었다. 초등학교 6년 개근상은 타지 못했지만 그중 3개 학년은 개근을 했고 그리 건실하지 못했던 고등학교 성적에도 수업 땡땡이 한번 부려본 적이 없었으며 직업인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일하는 동안에는 밤새는 일을 밥 먹듯 하다가 결국 일중독 증상으로 몇년인가를 고생해야 했던 청년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쯤에 와서 생각해 보면 우리가 말하고 있는 근면과 나태는 애초에 누구나 인정하고 절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성품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어쩌면 이 둘은 처음부터 서로가 서로에게 비교되어야만 판단될 수 있는 사이였는지도 모르겠다.

최소한 그 평가에서 만큼은 지극히 상대적이었던 모양이다. 많은 한인 이민자들이 처음 뉴질랜드로 이민 와 공통적으로 느꼈던 이 사회와 개인의 여유로움에 대한 놀라움이 어쩌면 이를 증명해 주지 않을까?

이와 같은 배경은 모두가 부지런해야만 했던 우리 한국인에게 왜 뉴질랜드의 가난이 더욱 이해하기 힘든 일 중 하나인지 잘 설명해 주고 있다.

“목요일에 왜 술집이 붐비는 줄 알아? 그날이 수당 나오는 날이잖아. 거기서 한 주 생활비를 다 쓰고 마는 거지 머…”
“왜 일을 안 하고 어렵다고 하는 거지? 도통 이해할 수 없단 말이지, 쯧쯧…”

우리가 뉴질랜드의 가난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이런 종류의 대화들은 열심히 살았으나 그에 합당한 보상을 받지 못한 이들에 대한 존중보다는 그들의 노력하지 않는 나태한 삶을 멸시하고자 하는 속내가 잘 드러나 보인다. 마치 게으름이 모든 가난의 근원이라도 되는 것처럼…

하지만 현장에서 바라본 뉴질랜드의 가난은 각자가 보이는 개인의 성품과 그 연결점을 찾기 쉽지 않다. 일이 없어 빈둥거릴지언정 그것이 그들의 가난에 주요하거나 절대적인 원인일 수 없었고, 여러 모습으로 나타나는 중독 증상도 그 한가지만이 절대적 원인으로 그들의 빈곤한 삶에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

단지 그것은 그저 이 땅의 가난한 이들이 겪고 있는 삶의 형태 중 일부였고, 먼발치 타자의 입장에서 볼 수 있는 하나의 현상이었던 것이다.

가난을 주제로 주변인들과 대화를 나눌 때면 이처럼 나는 반복적으로 우리 사회의 빈곤을 변호하곤 한다. 우리 눈에 보이는 빈곤한 삶에 드리운 뿌리 깊은 나태함이 그 가난의 절대 원인이라기보다 가난해진 이후 나타나는 삶의 전형임을 역설하는데 많은 시간을 사용하곤 하는 것이다.

아주 짧게 이야기하자면 뉴질랜드 가난의 대표적인 특징은 상당 부분 민족적 집단화 성향을 보인다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한국의 산업화 시기, 농촌에서 대도시로 상경한 농민들이 집단적으로 청계천, 또 그 이후 달동네로 밀려나며 도시 빈민화 과정을 겪었던 경험이 있다.


또, 중국에서는 21세기 이후 우리와 유사하게 나타나고 있는 농민공 문제가 국가 내 심각한 사회 문제로 남아 여전히 해결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뉴질랜드의 도시빈민 문제는 그보다 반세기 정도 이른 시기에 지방에서 도시로 이주한 마오리들의 삶을 통해 집단적으로 경험되었고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모두가 성공적으로 살아남을 수 없었던 경쟁과 주류 백인문화에서 도태될 수밖에 없던 마오리들이 그들의 땅에서 그들의 정체성을 빼앗긴 채 도시빈민으로 전락한 거시적 사회 현상을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가난”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뿌리 깊은 고난을 개개인의 성품에 가두어 이해하려 했던 것이다.

사회가 허락하지 않는 개인의 반복된 실패는 절망 그 이상의 것을 남기지 않는다. 그리고 그 절망은 끔찍하게도 그들의 자녀로 또다시 그들의 자녀로 대물림되고 만다. 그 과정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정서적 어려움과 부모의 불안정한 삶으로부터 비롯된 자녀의 선천적/후천적 장애는 더 이상 그들의 삶을 존중받지 못하게 만들고 말았다.

누군가의 게으름과 나태한 삶이 그들의 빈곤을 더욱 공고히 하고 새롭게 맞이할 수 있는 기회와 희망의 시간마저 앗아버리고 말았다는 부정할 수 없는 개인의 실책을 모두 변호할 수 없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끊임없이 반복되는 가난의 굴레와 벗어날 수 없는 절망의 그늘이 그들의 삶을 짓누르는 동안 그 삶을 싸늘한 시선으로 정죄했던 타자의 무책임이 어찌 정당화될 수 있을까?

현상이 원인으로 오인되어 모두의 인식 속에 가두어진 누군가의 빈곤한 삶은 오늘도 근면과 게으름의 정죄 가운데 갈 길을 잃고 방황하고 만다.

이전 기사삶의 무게
다음 기사A house full of love
이 익형
레이드로 대학에서 성서연구와 공공신학으로 학부와 대학원 석사 과정을 마쳤고, 현재 취약계층을 대상으로 사역하고 있는 나눔공동체 낮은마음의 대표 간사로 일하고 있다. 성도와 교회가 함께 섬기고 있는 낮음의 사역 안에서 교회와 세상의 연대를 통해 이루시는 하나님 나라에 비전을 두고 세상의 낮은 곳에서 일함을 즐거워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