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을 예수 부활, 나의 부활.예수 생명, 나의 생명으로 피투성이라도 살아가기를
처음은 사고이고, 다음은 사건이고, 그다음은 적의 공격이다.”라는 러시아 속담이 있다. 사고(Accident)는 사실 확인이 가능하다. 사고는 처리할 수 있고 복구할 수 있다. 사고는 돌이킬 수 있다. 반대로 사고(Incident)는 사실에서 진실을 확인해야 한다. 사건은 해석이다. 사고는 퇴행만 있다. 사고는 돌이킬 수 없다.
개가 사람을 무는 것은 ‘사고’라고 한다. 반대로 사람이 개를 무는 것은 ‘사건’이다. 사고와 사건의 차이는 사람이 사는 동안에 사람과 사물과의 미세한 파열, 금이 간 경계의 선을 발견하는 것이다. 사고의 관찰과 사건의 통찰 그리고 섭리의 성찰은 시간과 공간의 산물에서 온다.
요한복음 20장 1절에서 20절에 보면 예수는 유월절의 안식일이 오기 전인 오후 3시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에서 죽었다. 예수가 죽어 사흘 지난 뒤인 유월절 안식일 다음 날 이른 아침에 마리아와 여자들이 예수의 무덤에 찾아가 예수의 시신에 향유를 바르고 향품을 뿌리러 찾아갔다.
빌라도가 “여러분에게 경비병이 있으니 데리고 가서 잘 지키시오!하자 그들은 가서 무덤을 단단히 막아 돌에 봉인하고 경계병을 배치하여 무덤을 안전하게 지키게 하였다”(마태복음 27장 65절-67절 현대인의성경).
예수가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한다는 것을 믿지 않고, 죽은 예수 시신을 제자들이 훔쳐 갈까 봐 유대인 대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부탁한 것이다.
“이튿날, 곧 예비일 다음날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빌라도에게 몰려가서 말하였다. “각하, 세상을 미혹하던 그 사람이 살아 있을 때에 사흘 뒤에 자기가 살아날 것이라고 말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사흘째 되는 날까지는, 무덤을 단단히 지키라고 명령해주십시오. 혹시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훔쳐 가고서는, 백성들에게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났다. 하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되면, 이번 속임수는 처음 것보다 더 나쁜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마태복음 27장 62절-64절 새번역).
보다, 요한복음 20장 1절, 3절-8절
부활절 다음 날 새 아침의 해가 떠오르기 전, 아직 어두울 때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의 무덤에 와서 보니 돌무덤을 막아놓은 커다란 돌이 옮겨진 것을 보았다(요한복음 20장 1절). 마리아의 관찰로는 사고가 아니라 사건이라고 여긴다. 당연히 예수의 돌무덤을 막고 있는 돌문은 닫혀 있어야 했다.
마리아는 일상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미세하게 금이 간 파열 하나를 발견했다. 마리아 혼자 처리할 수 있는 ‘사고’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돌문이 열려있는 사고가 아니라 ‘사건’이라는 것을 보게 된 마리아는 도움을 청하려고 갔다.
“마리아는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이 사랑하시던 제자에게 달려가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갔는데 어디에 두었는지 모르겠어요.’ 하였다”(요한복음 20장 2절).
요한복음 2장 2절에서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이 사랑하시던 제자에게 달려가서”라는 “to Simon Peter and to the other disciple whom Jesus loved”(John 20:2 NASB).라고 번역되어 있다. 이는 마리아가 서둘러 ‘베드로의 숙소 그리고 요한의 숙소로 달려갔다는 것이다. ‘to…and to’는 ‘…로 그리고…로’가 반복된 것으로 베드로와 요한의 숙소가 이웃에 있지만, 한 곳이 아니라 서로 다른 곳임을 지시하고 있다.
예수가 겟세마네(올리브 짜는 틀)에 있던 마당에서 잡힐 때 제자들이 도망가서 각자의 연고지가 있는 숙소로 간 것임을 알 수 있다. 마리아는 무덤에서 돌문이 옮겨진 것을 보고 자기 생각이 사실인 것처럼 말했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갔습니다. 어디에 두었는지 모르겠습니다”(요한복음 2장 2절 하반절). 여기서 ‘우리’는 마리아와 다른 여자들이 함께 왔을 때를 말한다. “여자들은 무서워 떨며 정신없이 무덤에서 도망쳐 나왔으나 겁에 질려 아무에게도 말을 못하였다”(마가복음 16장 8절)고 했다.
‘예수의 시신이 없어졌다’라는 마리아의 말에 놀란 베드로와 요한은 무덤으로 달려갔다(요한복음 20장 3절). 베드로보다 젊은 요한은 더 빨리 달려가서 먼저 무덤에 이르렀으나 두려움 때문이진 아니면 경외심 때문인지 모르지만 무덤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몸을 구부려 안을 들여다봤다(요한복음 20장 4절).
요한을 뒤따라온 베드로는 요한을 지나 충동적인지 아니면 급한 성격 때문인지 모르지만 무덤 안으로 들어가 ‘골똘히’ 봤다. 무덤 안에는 세마포가 놓였고 또 머리에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쌌던 대로 놓여 있는 것을 봤다(요한복음 20장 6절-7절). 마리아도 보고(1절), 요한도 보고(5절), 베드로는 골똘히 보았다(6절).
세 사람이 다 이것을 처리할 ‘사고’가 아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무덤 안에 예수의 시신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하지만, 예수의 시신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찾아 다 놓는 일은 불가능했다. 이는 돌이킬 수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진실 확인이 필요했다. 해석이 필요한 사건이다.
알다, 요한복음 20장 2절과 9절
마리아와 다른 여자들은 예수의 시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한다고 했다(요한복음 20장 2절). 당연했다. 그 이유는 “그들은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요한복음 20장 9절 개역개정). 요한은 지금은 몰랐지만, 예수가 부활한 것을 통해 보는 것에서 분명하게 알게 됐다고 했다. 요한도, 마리아도, 베드로도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보고 알게 됐다.
믿다, 요한복음 20장 8절과 10절
베드로가 무덤 안으로 들어가 세마포와 수건만 보고 예수의 시신은 없는 것을 알게 될 때, 요한도 따라 무덤 안으로 들어왔다. “그제서야 먼저 무덤에 왔던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었다”(요한복음 20장 8절).
요한이 무덤에 들어가 보고 믿은 것은 예수 부활을 믿은 것이 아니라 예수 시신이 없어진 것을 믿은 것이다. 돌이킬 수 없는 예수 시신이 없어짐에 관한 진실은 아직도 모른 채 베드로와 요한은 각각 자기들이 머물던 숙소로 돌아갔다(요한복음 20장 10절).
이를 통해 보면 베드로와 요한의 집은 갈릴리에 있었기에 잠시 머무는 ‘숙소’라는 번역이 좋을 것 같다. 이처럼 사람으로서는 풀 수 없을 것 같은 ‘수수께끼’처럼 여전히 현실에 관한 ‘불안’과 예수 부활에 관한 ‘의심’만을 가지고 자기들의 숙고로 돌아가는 것이 인간의 한계이다.
사고와 사건에 관한 지식의 관찰과 지혜의 통찰 그리고 섭리의 성찰이 있다고 해도 예수 부활은 오직 예수가 직접 나타나서 만나줄 때 보고, 알고, 믿게 됐다. 예수는 마리아에게, 베드로에게, 글로바와 다른 제자에게, 10명의 제자와 여자들에게 나타났다(요한복음 20장 11절-29절).
예수는 제자들이 모인 자리에 나타나서 의심하던 디두모라 불리는 쌍둥이 도마에게도 보여주고 알게 하고 믿게 했다. 예수는 도마의 신앙고백에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요한복음 20장 29절)라고 말씀했다.
예수를 보고 믿은 쌍둥이 도마보다 보지 못하고 믿은 사람이 더 복된 그리스도인이다. 사도 바울은 믿음은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로마서 10장 9절-10절)고 했다.
이러한 신앙고백이 다시 살아나신 예수를 믿는 믿음이다. 부활 주일이 지났다. 일상을 예수 부활의 생명을 보고, 알고, 믿는 신앙고백으로 예수를 마음에 담고 예수를 닮아가며 살아내는 그리스도인으로 온전히 거듭나기를 기도하고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