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에 맞이하는 유월절과 부활절/고 김순기 선교사를 기억하며

“항상 그대 곁을 걸어가는 세 번째 사람은 누구입니까?”

4월이 되면 T. S. 엘리엇(Eliot, 1888~1965)이 1922년 발표한 <황무지 The Waste Land>란 시가 생각납니다. 시의 첫 구절은 이렇게 전개됩니다.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 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당시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유럽은 모든 것이 파괴되었고, 특히 전쟁으로 인한 상처와 급속도로 진행되는 현대화로 인해 정서적인 황폐화가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엘리엇은 이러한 삶의 의미를 상실한 현대인의 공허한 상태를 ‘제 3의 인물’(The Third Man)을 통해 ‘죽음의 땅’(A Dead Land)에서 태어나 죽음과 삶 사이의 장소에서 살아가며, 고독과 절망 속에서 ‘잊혀진 사나이’(A Forgotten Man)로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새로운 생명이 있다”는 메시지를 구체적인 감각의 언어로 포착하여 표현하였습니다.

“항상 그대 곁을 걸어가는 세 번째 사람은 누구입니까?
헤아려보면 오로지 그대와 나 둘뿐
그러나 눈을 들어 저 앞 하얀 길 올려다보면
거기에는 당신 옆에 또 다른 사람이 걷고 있습니다.
갈색 겉옷을 걸치고 두건을 쓴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르지만 미끄러지듯
그대 곁을 가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모든 세상을 환히 비추고 투명하게 드러나게 하는 4월은 ‘제 3의 인물’을 알지 못하고 정서적 가사 상태에 빠진 사람에게 오히려 잔인한 달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남들이 이해할 수 없는 깊은 슬픔에 빠졌거나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린 사람에게 찬란한 4월은 그 찬란한 만큼 더 잔인한 달이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4월은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에서 가장 중요한 절기인 유월절과 부활절이라는 예식이 있는 달입니다. 유월절이란 430년 동안 애굽의 종살이를 하며 비참한 삶을 보냈던 이스라엘 백성이 자유로운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출발점이며, 이후 광야에서 40년간의 자기 정화 시간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의식을 획득하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동시에 부활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죄로 인한 사망과 음부의 권세를 깨뜨림으로써, 일평생 사망의 사슬에 매인 인류에게 산 소망을 가져다준 것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부활절은 죽음으로부터 새로운 희망과 삶을 시작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유월절과 부활절은 우리에게 새로운 삶의 시작과 영원한 자유와 희망을 의미합니다.

무엇을 기억하는가?
성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뚜렷이 인식하고 또그것을 대대로 후손들에게 물려주기 위해서는 바로 하나님이 누구신가와 자신들이 누구인가를 기억해야만 했습니다. 그러하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쉐마’(shema)를 통해서 그리고 유월절 내러티브를 통해서 과거의 사건들을 반복해서 들려주며, 그것은 단순히 먼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다시 새로운 현재의 사건으로 이끌어 냅니다. 하나님을 기억한다는 것은 과거의 사건과 기억을 현재화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과거 그 사건’에서 ‘지금 여기’로 그 사건의 기억을 떠올리며 생생하게 되풀이해서 말합니다. 그러하기에 ‘기억’은 과거에 고정된 사건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되풀이해서 말하고 그러한 과정을 통하여 실행할 때 그것은 다시 살아서 현재의 사건이 됩니다. 이렇게 처음의 출애굽 경험은 세대에서 세대로 전승되고 따라서 출애굽은 ‘공동의 경험’(common experience)으로부터 비롯된 ‘공동의 기억’(common memory)으로 살아나게 됩니다.

어떤 면에서 기독교의 예배도 “너희가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에 기인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기억하는 제자들이 모여서 ‘떡을 떼고 잔을 나눈’ 모임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기독교는 예수님에 대한 이 반복된 ‘기억 모임’으로부터 발전되고 정착된 것입니다.

사실 신약 성경에 의하면 최초의 예배 모임은 예수에 대한 그들의 공동경험을 기억해 내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하늘로 승천하신 이후 제자들이 함께 모였던 이유는 바로 그분을 기억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열두 제자들의 예배 모임에서 좌장은 예수께서 살아계셨을 때 했던 것처럼 그렇게 떡을 집어 감사의 기도를 올린 후에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고전11:23-25).

그런데 이렇게 제자들이 예수를 기억하여 함께 나눈 식탁은 단지 승천하셔서 지금 자기들과 함께 계시지 않는 분을 머릿속으로 떠올린 행위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성찬을 나눌 때 그들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그들과 함께하심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주님의 가르침에 다시 한번 귀를 기울이고, 십자가의 길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며 구원의 역사에 그들도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반복적으로 행하는 ‘기억’의 행위가 참여자들에게 과거의 사건을 현재 시점에서 다시 느끼고 경험하게 하는 중요한 수단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기독교 공동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사건들을 예배를 통하여 즉, 말씀과 기도와 찬양 그리고 성례전을 통하여 재현하며, 이러한 예배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고 그분을 만나며, 그분을 닮고 그분처럼 살아가려고 결단하는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억하지 않으면 상실한다. 잊으면 잃는다.”는 명제는 참인 듯합니다.

고 김순기 선교사를 기억하며

‘제 3의 인물’과 동행한 선교사의 삶 보며 예수 그리스도를 되새는 부활절이 되길

지난 1월 5일 소천하신 김순기 선교사의 사역을 기억하기를 원합니다. 한 선교사의 특별한 미담을 소개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장례식 통해 알게 된 선우형식 선교사의 회고를 중심으로 그가 소천하기까지 보여주었던 목회자와 선교사로서의 모습을 더 잊혀지기 전에 각자의 기억 속에서 한 번쯤 돌아보기 위함입니다.

김순기 선교사는 어려운 가정 환경 속에서 서울교육대학교를 졸업하였습니다. 1971년부터 한국대학선교회(C.C.C.)의 전도훈련을 받으며 민족 복음화와 세계선교의 소망을 품게 됩니다.

지금은 그 색깔이 많이 사라진 당시 불교 이념이 강한 서울 중동고등학교 영어 교사로 일하면서 C.C.C.의 모토였던 “오늘의 학원 복음화는 내일의 세계 복음화!”를 마음에 품고 중동고등학교가 기독교 학교로 거듭나기까지 노력하였고, C.C.C. 나사렛 총 순장을 감당하였습니다. 사실 이미 이때부터 평신도 선교사로의 삶을 산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가족과 함께

C.C.C. 형제들 가정 상담실 설립하여 가정 사역해
무엇보다 20여 년 자신의 긴 방황과 아픔을 경험하고 가정을 이룸으로 1986년 당시로서 한국에서는 불모지와 같은 생소한 영역인 청소년들과 미혼 젊은이들을 위한 C.C.C. “형제들 가정 상담실”을 설립하여 청년들의 현실적인 고민을 상당하며 종합 가정사역을 선도해 예비결혼학교, 부부, 자녀양육, 인격개발 프로그램을 진행하였고, 현재는 주수일 장로가 운영하는 “진새골 사랑의 집”의 모체가 되었습니다.

또한, C.C.C의 형편이 어려운 간사들과 후배들을 살피며 실제적 도움을 주는 분이었습니다. 특별히 청소년과 가정 상담에 대한 좋은 자료들이 없는 시기에『청소년과 성교육 상담』(순 출판사 1987),『결혼-그 후회없는 만남을 위하여』(낮은 울타리 2002),『영원한 사랑과 행복의 비밀』등을 집필하였고, 마이클 웰즈의『영적 자기진단과 치료』(크리스챤서적 2003),『하나님의 임재와 기도』(크리스챤서적 2011)을 번역하여 그리스도인으로 이상적인 이성교제와 거룩한 만남을 원하는 젊은이들에게 실제적이고 명료한 정보를 제공하고 성경적인 가이드를 제시하였습니다.

어떤 기관이나 단체가 아닌 개인으로 그러한 일들이 가능했던 것은 부부 교사였던 이문수 사모의 월급으로 생활비를 담당하며 자신이 받는 월급의 대부분을 가난한 후배들과 도움이 필요한 곳에 사용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하기에 자녀들에게 비친 김선교사의 모습은 “밤에도 늘 공부하거나 전화하거나 글을 쓰거나 하던 언제나 바쁘고 치열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러한 과정 중 하나님의 은혜와 부르심에 숭실대학교 대학원 영문과와 총회신학(방배)을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1993년 중국 선교사로 길을 가고자 아내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먼저 온누리교회에서 평신도 선교사로 파송 예배를 받았지만 제반 사항이 허락되지 않아 1994년 Dr. Tony Hanne이 운영하는 Fowey Lodge Bible School의 초청으로 뉴질랜드에 오게 되었습니다.

당시 Fowey Lodge Bible School은 무료로 영어를 공부할 수 있는 곳으로 10명의 한인 학생들을 포함하여 약 6-70명의 다민족 학생들이 피난민들처럼 몰려와 있는 곳이었습니다. 대부분 비자 문제와 영어 문제로 힘겨운 나그네 살이를 하는 이들에게 김선교사는 먼저 다가가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아름다운 섬김을 보여주었습니다.

오클랜드에서 사역할 때의 김순기 선교사(중앙)

뉴질랜드 이민 초창기에 영적으로든 물질적으로든 김순기 선교사의 도움을 받지 않은 신학생과 목회자가 없었을 것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누구보다 열심히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았습니다.

연변과기대 서양어학부 영어학과에서 전문인 교수로 섬겨
뉴질랜드에서 안정되고 누구에게나 인정받는 삶이었지만, 마침내 1998년에 온누리 교회와 사랑의 교회 그리고 CCC에서 자비량 선교사로 파송 받아 연변과기대에서 서양 어학부 영어학과에서 전문인 교수 사역자로 가게 되었습니다. 낮에는 영어교육으로, 방과 후에는 이문수 사모와함께 제자양성에 힘써 다수의 학생이 그리스도를 영접했습니다.

김선교사의 뿌린 씨앗은 당시 미국과 한국의 유학생으로 지금은 중국 전역의 우수한 인재들로 성장해 활동 중입니다. 시간이 많이 지난 지금은 알 수 없지만, 그들 중에 그리스도의 일꾼들이 있어지길 기대해 봅니다. 당시에 중국 당국의 감시 속에 공공연히 활동할 수도 없고, 그런 이유로 교직원 상호 간의 교제도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그런 상황 가운데서도 김순기 선교사 가정은 혼자와 있는 선교사들을 자주 초청하여 섬김으로 동역자 상호간에도 그리스도의 사랑을 베풀었습니다. 지금은 많이 좋아졌지만, 당시의 연변 상황은 모든 면에서 뉴질랜드에 비해 뒤떨어진 환경으로 심지어 물과 공기가 몹시 열악했음에도 2003년에 온 가족이 연변에서 생활하였고 첫째 딸 또한 연변과기대 국제학교에서 미술 교사로 일하며 사역에 동참하는 등 온 가족이 선교사의 삶을 살았습니다.

하지만 열악한 환경과 건강을 생각하지 않는 사역으로 몸이 쇠약해지고 2006년 알츠하이머 증세가 시작된 것을 아시고 8년간의 선교지 사역을 정리하고 뉴질랜드로 돌아왔습니다. 그럼에도 Dr. Tony의 신학교를 도왔고, 틈틈이 현지인 교회와 노방전도를 통해 말씀을 전했습니다.

이문수 사모는 그러한 남편을 “때로는 가정에 무심할 정도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 주었고, 오직 학교 사역을 위해 헌신해 온 남편이 자랑스럽다”고 하면서 13년간의 남편의 긴 투병 기간을 묵묵히 옆에서 지켜주었습니다.

특히 병증이 심해 누워있는 5년 동안은 한 번도 남편 곁을 떠나지 않고 아내로서 그 자리를 지켜주었습니다. 그럼에도 힘든 상황을 드러내지 않고 언제나 평화롭고 여유로운 얼굴로 일상의 삶을 살아가며 오히려 힘든 이들을 격려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 모습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큰 울림으로 다가오게 하였습니다.

자녀가 바라보는 “늘 하나님 앞에서 그분께서 치르신 희생에 대해 감사했고 감격했고 그것을 위해 살려고 좌충우돌하면서도 달리기를 멈추지 않았다”는 선교사의 뒷모습은 어쩌면 목회자와 선교사의 가정으로 아팠던 가족이 서로 이해하고 연합하여 선교사의 가정으로 헌신한 열매가 되게 하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장지에서 천국환송예배 드려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하며 헌신하는 삶을 살아내
이러한 김선교사의 삶을 곰곰이 돌아보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엘리엇의 <황무지>에서 죽음의 땅을 걷고 있는 인물과 오버랩 되었습니다. 일평생 하나님의 자녀로 살기 위한 몸부림과 모든 것을 포기하고 8년의 중국 연변에서의 선교사의 삶으로 얻은 것은 쇠약해진 몸과 남들보다 빠르게 찾아온 질병이었습니다. 앞서 엘리엇이 말한 ‘제 3의 인물’을 보지 못한다면 패배와 절망, 창피함과 자괴감뿐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제 3의 인물’과 동행한 김선교사의 삶을 이 부활절에 기억해 봅니다.

이번 부활절을 통해 김순기 선교사의 삶에서 동행했던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이기를 기대해 봅니다.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하는 삶을 더욱 소중히 여기고, 이를 실천하여 주변 사람들에게 헌신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기억’은 인간의 자기 정체성을 형성하는 요체입니다. 즉 내가 누구인가를 안다는 것은 나의 부모와 형제들, 친구들,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겪었던 일들, 자신이 살았던 장소 등을 기억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김순기 선교사와 같은 삶들은 우리가 누구인지를 돌아보게끔 합니다.

누군가 생명의 씨앗을 뿌리고, 누군가 그 헌신의 대가로 쉼과 기쁨을 누립니다. 김선교사는 이 땅에 머무는 동안에도 주를 위하여, 그리고 방황하는 영혼들을 위한 삶이었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 부활절이 감사하고 행복한 시간인 것은 그러한 분을 내가 기억할 수 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김선교사님의 수첩에 적혀 있었다는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을 부활절을 맞이하며 다시금 되새겨 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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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봉조
총신대 신대원 졸업. 세계선교교회 담임. “언어는 존재의 힘이다”는 통찰을 빌려 신학을 기반으로 한 인문학의 언어로 하나님과 우리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이를 통해 하나님 사랑에 대한 삶의 귀중한 자리를 확인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