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 찾으시고 기뻐하시는 예배
오클랜드 한인교회(손기철 담임목사)에서 주승중 목사(주안교회 위임목사, 전 장신대 예배 설교학 교수)를 초청하여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라는 주제로 2월 17일(금)부터 19일(주일)까지 4차례에 걸쳐 부흥회를 가졌다. 또한, 2월 20일(월) 오전 10시부터 11시 50분까지 오클랜드 한인교회에서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라는 주제로 목회자 세미나를 열었다. 그러나 2월 23일(목) ‘예배와 설교’라는 주제로 알파크루시스칼리지 한국어학부 신학생을 대상으로 한 세미나만을 본지에 정리 했다. <편집자 주>
20여 명의 세미나 신청자가 참여한 가운데 쉬는 시간을 보낸 후, 두 번째 강의를 시작할 때는 신학교 졸업생 두 명과 신입생 한 명으로 구성된 찬양팀의 찬양 시간도 있었다. 2시간 동안 이어진 세미나를 마치고 나서 참가자들 대부분은 강사와 함께 식사하며 교제하는 시간을 보냈다.
들어가는 말: 예배드리고 있나요?
지난 3년간 코로나의 영향을 받은 한국교회는 아모스의 예언처럼, ‘무너진 다윗의 장막을 다시 지으며 그 허물어진 것을 다시 지어 일으켜야’(행15:16) 한다. 그런 면에서 볼 때, 대한예수교 장로교회 통합총회(강사의 소속교단)의 107회 주제 “복음의 사람, 예배자로 살게 하소서”(시 50:5, 롬 12:1)는 매우 중요하고 시의적절한 주제였다.
작년 5월 주안교회의 “주안 온가족예배주일” 겸 “예배회복주일”에는 코로나 발생 이후 2년 반 만에 처음 예배당에 나와서 예배를 드린 가정들도 많이 있었다. 팬데믹이 끝나는 시점에서 한국교회 전체적으로 60%만 현장예배에 출석하며(강남 50%, 시골 70-80%), 일부(15%)는 팬데믹 이후에도 계속해서 온라인 예배를 드린다고 하였다.
이날 강의는, 예배란 무엇인지, 우리가 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하는지, 또 어떤 태도로 예배를 드려야 하는지를 질문하고 그 해답을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를 통해서(요 4:1-9, 20-26), 그리고 로마서(12:1)와 히브리서(13:16)를 통해서 찾아갔다.
강사는 우리가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찾으시고 기뻐 받으시는 예배를 깨달아 참된 예배자로 살게 되기를 원하였다.
요한복음 본문의 배경
요한복음 4장은 예수님께서 유대지역에서의 초기사역을 마치시고 갈릴리로 건너가실 시점에 일어난 사건을 배경으로 한다. 유대지역에서 북쪽 갈릴리로 가는 길은 서쪽 지중해 해변 쪽으로 요단강 동편 베레이 지역으로, 또는 사마리아를 통과하여 가는 세 길인데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이방인 취급하여 베레아 지역으로 멀리 돌아서 갈릴리로 갔다. 그것은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 멸망한 뒤(주전 721년) 인종 및 종교혼합 정책에 의해 순수성을 잃고 혼혈이 되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멸시하고 상종하지 않았지만, 예수님은 수가마을의 한 여인을 포함한 사마리아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그 길을 이용하셨다. 요한은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에데이/must needs”)라고 하여(요4:4), 예수께서 분명한 의도(need)를 가지고 사마리아를 통과하는 길을 선택하셨다는 것을 표현하였다.
예수님께서 수가마을 야곱의 우물에 도착하여 쉬고 있을 때 물을 길러 나온 한 여인을 만나게 되는데 보통 해가 진 다음에 여인들이 물 길러 나오는 것과 달리 해가 뜨거운 정오에 혼자 물을 길러 나왔다. 예수님이 물을 좀 달라며 물을 매개로 대화를 시작하여 참 예배에 대한 주제로 넘어가 어디서 예배를드려야 하는지를 묻는 여인의 질문에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가 올 것을 말씀하신다(요 4:21).
우리는 이들의 대화에서 왜 예배를 드려야 하는지, 예배란 무엇인지, 그리고 예배드리는 우리의 몸과 마음의 자세는 어떠해야 하는지 대해서 깨닫게 된다.
왜 예배드리는가?
죄인을 먼저 찾아오셔서 구원해 주신 주님의 은혜가 너무 감사하기에 그 은혜를 깨달은 자는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응답할 수밖에 없는데 그것이 바로 예배다. 한마디로 은혜와 감사가 만나는 것이 예배다. 당시 유대인들은 유대인 여성들과의 공개적인 접촉을 피했으며, 랍비는 공중 앞에서 여자와 이야기하는 것이 금기였는데 유대인 예수님이 공개된 장소에서 그것도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를 나눴다는 것은 랍비로 알려진 예수님의 명성에 치명타를 줄 수 있는 장면이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말할 수 없는 은혜의 순간이었다. 유대인은 사마리아인들과 상종하지 않는데 사마리아 여자에게 물을 달라는 것(요 4:9)에 그녀가 가장 놀랐다. “상종하다”라는 단어는 “함께 사용하다”, “친하게 지내다”라는 뜻으로 예수께서 그녀가 가지고 있던 ‘물동이를 함께 사용한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유대 풍습에 음식물(물 포함)을 함께 나누는 것은 매우 친밀함의 표시인데 예수님의 이런 요청이 그녀에게는 상상할 수 없는 행동이었고, 또 한번의 은혜였다.
영원한 생수이신 예수님을 통해 영원한 샘물을 마시고 구원에 이르게 된 여인은 받은 은혜에 감동하여 물동이를 버려두고 마을로 달려가 사람들에게 자기의 과거를 알아맞힌 예수를 와서 보라며 그리스도가 아닐까 말한다(요 4:28-29).
기름 부음을 받은 자, 메시아, 구세주를 만났다는 그녀의 이 고백은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사도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라는 그 위대한 고백과 같다. 복음서에서 수많은 사람이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마다 인산인해를 이루었지만, ‘그리스도’를 만났다고 고백한 사람은 극소수였는데 그녀의 입에서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요 4:29)라는 고백이 터진 것이다.
우리가 왜 하나님을 예배하는가? 그것은 이처럼 죄인 된 우리들을 먼저 찾아주시고, 만나주시고, 영원한 생수, 즉 구원의 은혜를 주셨기 때문에 그것이 너무 감사하고 감격해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우리의 심령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반응이 바로 예배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열망이 생기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과 구속의 은혜에 응답하는 것이 예배
우리는 예수님께서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 초대받아 가셨을 때 그 동네에서 죄인 취급받던 한 여인의 태도를 안다(눅 7:36-50). 예수님에 대한 시몬의 태도와 비교하여예수님께서는 이 둘의 차이를 죄 용서함 받음의 다소 때문이라고 말씀하신다(눅 7:47).
그녀는 예수님의 죄 용서함을 통하여 하나님의 엄청난 사랑이 마음에 부어졌고, 사랑과 은혜가 너무 감사하여 감격의 눈물로 발을 적시고, 머리털로 발을 닦아드리고, 향유를 부어 주님을 경배(예배)하였다.
반면에, 시몬은 그런 경험이 없어서 손님에게 발 씻을 물도 제공하지 않는 무례함을 보였다. 하나님의 용서와 은혜와 사랑을 경험하지 못하면 예배는 지루하고, 소중하지 않으며, 형식적이고 의무감으로 드리게 되는데 경험하면 주님을 찬양하고 경배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예배란 “하나님의 구속사건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한 인간의 응답의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즉, 하나님께서 종의 형체를 입으시고, 이 땅에 찾아오셔서, 죄인들인 우리를 구원하시는 엄청난 일을 이루셨기에 우리는 그 분에게 최상의 가치를 돌려드리면서, 그 사랑과 은혜에 응답하는 데 그것이 바로 예배(worship)다.
풀어서 말하면, 예배란 피조물인 인간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와 수많은 은총에 감격하여 그 하나님을 경외하고, 찬양하며, 감사하며 봉헌하려는 우리들의 응답적인 행위이다(정장복교수, 한일장신대 총장).
그 하나님께서 그렇게 감사와 찬양과 경배를 드리며 예배하는 예배자들을 우리 가운데서 찾으신다. 우리가 참된 예배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뵙는 경험을 하여 새로운 힘과 능력을 공급받아 예배후 삶의 현장에서 선교적인 삶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이 바로 우리가 드릴 거룩한 산 제사인 것이다(롬 12:1).
예배는 주일만이 아니라 매 순간 우리의 삶을 통해서도 드려야
어디서 그리고 어떤 자세로 예배해야 하는가?
어디서 예배할 것인가? 수가성 여인은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리심 산에서 예배를 드리고,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는데 하나님께 나아가려면 어디서 예배를 드려야 하는지를 묻는다(요 4:20). 그리심산이 축복의 율법을 선포한 산(신 11:29, 27:12)이고, 사마리아인들이 주전 322년경에 성전을 세워 이백 년간 예배를 드리다가 주전 129년에 파괴되었어도 여전히 예배 처소로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두 장소를 부정하며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올 것이라고 하셨다(요 4:21).
예수님은 사마리아인들은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하고 예배를 드리지만,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알고 예배를 드린다고 하셨다(요 4:22). 모세오경만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였기에 진리에 대한 지식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것은 예배에서 요구되는 합당한 지식 없이 열성적인 마음으로만 드리는 예배였으며, 영(마음을 다하여)으로 예배를 드렸지만, 진리로는 예배드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진리는 소유했으나, 마음(영)은 비어 있었기에 사마리아인이나 유대인이나 모두 참 예배의 모습에서 벗어나 있었다.
건물로서의 성전을 우상시해서는 안 된다 치명적인 문제는 성전에서의 예배만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 건물로서의 성전을 거의 우상시하고 있었고 유대인들이 더 심하였다. 스데반은 “지극히 높으신 이(하나님)는 손으로 지은 곳(성전)에 계시지 않는다”(행 7:48)고 강조하였다.
하나님을 솔로몬이 지은 성전이라는 건물에 가둘 수 없다는 것이다. 솔로몬도 성전을 건축 후에 자신이 지은 성전뿐만 아니라 하늘의 하늘이라도 하나님을 모실 수 없다고 말했다(왕상 8:27).
사도 바울도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손으로 지은 아덴 신전에 계시지 않는다고 하였다(행 17:24). 따라서, 하나님께 드리는 우리의 예배는 하나님을 진심으로 경외하는 마음만 있다면 어느 곳에서도 드릴 수 있다. 예배에 임하는 우리의 마음과 태도를 보신다.
어떤 자세로 예배드려야 하는가?
영으로 예배드림 영으로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인간의 영혼, 우리의 심령으로 예배를 드린다는 뜻이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내 심령으로(with my spirit) ‘섬기는’(리트류오: 예배하다)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라며 자기의 심령으로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말하고 있다(롬 1:9).
하나님이 찾으시는 영으로 드리는 예배는,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구속의 은혜를 깨닫게 해 주심으로 우리가 그 은혜와 감사와 감격으로 응답하는 예배다.
성령께서 내주하셔서 우리를 깨우쳐 주시고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만을 향하도록 도우셔서 성령의 감동으로 기도하고, 마음을 다하는 신앙 고백적 찬양을 드리고, 정성과 감사의 마음으로 봉헌하고, 마음이 담긴 신앙고백을 올려드릴 때 그것이 바로 영으로 드리는 예배다.
더 나아가 심령 속의 악한 생각과 더러운 욕심들을 깨우쳐 주셔서 고백하고 주님의 보혈로 씻음 받아 정결한 마음으로 예배하는 것이 영으로 드리는 예배다.
진리로 예배드림 참된 예배는 진리에 대한 응답으로 드려지는데, 하나님을 바로 알고 드리는 예배이다. 이 진리(알레데이아)란 무엇인가? 예수님은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니이다” (요 17:17)라고 분명히 말씀하신다.
참되게 예배를 드리려면 그분이 누구신지를 알아야 하며, 우리를 위해 행하신 놀라운 구속 사역을 통해 한없는 은혜를 깨달아야 하는데, 이 놀라운 하나님과 그의 사랑과 은혜를 온전히 보여주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다.
신약 복음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 사역에 대해 기록하고 있기에 이 진리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알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희생을 통한 구속이 은혜로운 사건인 것을 알게 된다. 따라서, 성경을 통해서 구속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 알고 그 사랑에 응답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진리로 드리는 예배이다.
참된 예배는 하나님의 말씀을 매일 묵상하는 가운데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말씀의 뜻을 깨닫고 순종하여 말씀의 열매를 맺어 주일에 예배당에 나와 그 삶의 열매를 감사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것이다. 진리로 드리는 예배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중심으로 예배 시간에 선포되는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것이다.
예배 이후의 예배(Liturgy after liturgy)
신앙인들은 예배를 예배당 안에서만 드리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는 예배당 안에서뿐만 아니라 예배당 밖에서의 예배도 있다. 그것을 “예배 이후의 예배”(liturgy after liturgy)라고 표현한다. 예배를 의미하는 단어 중에 레이투르기아라는 단어는 원래 고대 희랍에서 백성들이 국가를 위해 봉사하며, 사회를 위하여 공적 봉사를 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성경에서는 예배와 관련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이 믿음과 순종으로 하나님을 위하여 하는 봉사와 섬김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되었는데 바로 예배라는 것이다. 이 단어에 의하면 예배는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봉사와 섬김의 행위이다(Service to God).
“레이투르기아”는 하나님께서 위탁하신 일을 행하며 세상을 섬기는 것도 일종의 예배행위가 된다. 예배당 안에서의 예배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의 모든 영역 속에서 하나님의 은총에 응답하는 삶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예배는 주일만이 아니라 매일 매 순간 우리의 삶을 통해서도 드리는 것이어야 하는데, 그리스도인들의 삶과 절대로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다.
한국교회의 치명적인 약점 중의 하나가 예배와 삶의 분리 현상이다. 신앙과 생활, 예배와 삶이 분리되어 있는데 신앙인들은 언제 어디서도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어야 한다. 교인들이 자신들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있지 못하다면 우리는 참된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예배당 안에서의 예배가 훌륭하고 경건하게 드려진다고 해도 그 예배는 교회 마당만 밟는 일이 될 수 있다. 그래서 바울은 “너희 몸을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12:1) 라고 말한다. 영적예배는 spiritual worship이 아니라 “합당한 예배”, “합리적인 예배”라는 뜻이다. “영적”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로기코스”(이 단어는 로고스, 즉 이성이라는 단어와 어근이 같다)인데, 합리적, 이성적이라는 뜻이다. “거룩한 산 제사”를 드리는 예배는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의 전 생활을 주님께 바치는 것이다.
즉, 예배당 안의 예배가 세상 속에서의 삶으로 이어질 때에 비로소 그리스도인들은 “거룩한 산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받으시기에 가장 합당한 예배인 것이다. 존 맥아더 목사는 “참된 예배는 주일 예배 시간의 축도 후에 비로소 시작된다”고 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섬김과 예배
예배가 성도들의 삶 속에서의 섬김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은 예수님의 삶에서 깨닫게 된다. 그는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고 말씀하셨고,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요 4:34) 이라고 하셨다.
예수님이 오신 목적은 이 세상을 섬기기 위하여 오셨고,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 세상에서 이루기 위하여 오셨다. 죽기까지 복종하셔서 하나님 아버지께 최고의 영광을 돌리셨다. 따라서 우리가 알아야 할 진리는 예배의 궁극적인 목적이 하나님께 합당한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면, 세상에서의 섬김과 순종의 삶은 결코 예배와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이다.
예배(worship)는 “가치”(worth)와 “신분”(ship)이라는 말의 합성어다. 하나님께 최상의 가치를 돌리는 것이다. 예배는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그분께 최상의 가치를 돌리며 그분을 경배하는 것이다(시편 29:2).
그러므로 예배는 세상을 위한 봉사와 섬김과 결코 분리될 수 없으며, 예수님의 세상을 향한 봉사와 섬김이 없다면(막10:45)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이 아니다. 예배는 항상 이 세상의 삶을 행해 나아가는 자세로 드려야 하고, 세상 속에서 예수님처럼 섬기는 일은 곧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예배의 행위가 된다. 이것이 신자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예배의 행위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을 본받아 섬김으로 예배드리자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모든 삶의 현장에서 구체적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산 제사를 드릴 수 있는가? 그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본받아 사람들을 사랑하고 섬김을 통해서 드릴 수 있다. 예수님처럼 삶의 현장에서 사람들을 사랑하고 섬길 때, 우리의 삶은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실 거룩한 산 제사가 된다.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 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히 13:16).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이웃에게 선을 행함으로 표현하고, 가진 것을 나누면서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산 제사를 드릴 수 있게 된다. 삶에서 작은 예수로 살아가려고 노력할 때,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합당한 예배가 된다. 휘티어(Whittier)는 “주께서 축복하시는 거룩한 예배는 잃은 자를 회복하고, 상한 영을 싸매 주고, 과부와 고아를 키우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
“예배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께 합당한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시 2:2). 그렇다면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는 바울의 말씀에 의하면,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세로 해야 한다. 모든 일들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한다.” 즉, “나는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을 통하여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의식을 가지고 감당해야 한다”는 말이다.
학생은 공부를 통해, 공무원은 지역주민들을 잘 섬김으로, 선생은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을 예배하는 마음으로, 사업을 한다면 직원들의 생활을 돕고 섬김으로 영광을 돌려야 한다.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기쁜 마음으로 섬기기를(예배하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엡 6:6-7).
나가는 말
예배는 형식을 담을 수밖에 없다. 마음도 형식에 의해 표현된다. 우리가 어떠한 마음과 자세로 하나님께 나아가 예배드리고 있는지, 교회 안에서의 예배가 우리의 삶 속에서도 이어지고 있는지, 예배 이후의 예배, 우리의 삶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는 합당한 예배에 실패하면 우리는 결국 모든 것에 실패하는 것과 같다. 예배에 실패하면 우리는 모든 것에 실패하는 것이다.
한국교회의 모든 성도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응답하여 예배당으로 나와 매 주일의 예배를 온전히 회복하고 그 예배를 통해 하나님과의 감격적인 만남을 경험하고 하나님 아버지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과 능력에 힘입게 되기를 바란다.
성령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과 능력으로 세상에 나아가 이웃을 사랑하고 나누고 섬김으로, 즉 선교적 삶으로 예배드림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참된 예배자들이 되기를 소망한다.
이경찬 장로<평강교회> 지난 2월 23일 뉴질랜드 알파크루시스 신학교 한국어학부가 주최한 ‘하나님이 찾으시고 기뻐하시는 예배와 설교’라는 주제로 신학생을 대상으로 세미나를 한 주승중 목사<주안장로교회 위임목사, 전 장신대 예배 설교학 교수>의 내용을 정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