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에게 친밀한 베트남

동남아 국가 가운데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은 나라 중 하나가 베트남이라 할 수 있다. 베트남은 우리 나라와도 비슷한 문화가 많다. 조상 숭배에 대한 관습은 아직도 철저하여 왠만한 가정집이나 사무실 심지어 차량 안에도 조상에게 드리는 제단이 설치되어 있을 정도이다. 지극 정성으로 제단에 음식을 바치고 수시로 기도를 드린다.

베트남 구정은 ‘뗏’(Têt)이라 부르는데 일년 중 가장 큰 명절로 지내며 조상을 기리는 시간을 갖는다. 이 ‘뗏’을 전후하여 우리가 머무는 중부 도시 ‘훼(HUÊ)’에는 시내를 가로질러 흐르는 흐엉 강변을 따라 부요의 상징인 화려한 노란색 꽃들이 장식되고 다채로운 행사가 이어진다. 흥미로운 것 중에 하나는 설 명절이 지났어도 남아 있는 장식물 중에 2023년을 축하하는 “Chúc mùng năm mói (새 해 복 많이 받으세요)”와 함께 올 해를 상징하는 고양이 형상이 서 있다.

베트남은 우리 나라처럼 12지간, 12종의 동물로 매 해를 상징하는데 이곳에서는 토끼가 고양이로 대체되어 있어 처음에는 어리둥절하였었다. 베트남에서 12지간 동물은 모두 동일하지만 유독 토끼만 고양이로 대체 한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는데 아마도 벼농사를 2~3모작하는 쌀이 풍부한 나라여서 쥐를 잘 잡는 고양이가 유용한 동물이 되지 않았나 싶다.

베트남을 방문했던 한국 분들이 대체적으로 하는 말이 있다. “생각했던 것과 달리 사람들 피부가 하얀 편이다. 그리고 음식이 낯설지 않다” 서양인 눈에 한국, 중국, 일본이 큰 틀에서 유교와 한자 문화권이라 비슷해 보이지만 3개국 역시 많은 차이가 있듯이 동남아시아 국가들도 제 각각의 언어, 문화, 종교 등 다양한 면모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지난 몇 년간 박항서 베트남 축구 국가대표 감독 덕분에 한국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고 한국인을 좋아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본래 베트남 사람들이 한국인을 좋아한다. 그 이유는 한국 문화와 베트남 문화가 비슷한 부분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베트남은 중국과 더불어 1997년에 한류가 시작된 한류 원조 국가이자 코로나 전까지 한국 교민 약 20만명이 살고 있었으며 근래 한국 교민 숫자가 급격히 늘어난 나라이기도 하다.

베트남으로 선교지를 정한 우리 부부는 버스와 선박 기차 등 여러가지 교통수단을 이용해 하노이를 시작으로 하이퐁, 닌빈, 다낭, 훼, 꾸이년, 나짱, 호치민 그리고 껀터까지 베트남 북부에서 중부를 거쳐 남부 메콩강 유역까지 3개월여 리서치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인도하심을 따라 정착한 곳이 베트남 마지막 왕조이자 역사적 도시 ‘훼’이다. 경주와 같이 많은 유적지들이 남아있고 왕의 후손이라는 자부심으로 다른 도시보다 폐쇄적이지만 한편으론 아직 도시 규모가 복잡하지 않으면서 베트남 사람들의 추억이 서려있는 순박한 이곳에서 우리는 사역을 시작할 수 있었다.

베트남 그 중에서도 중부 지역을 사역지로 정착한 우리 부부에게 아는 지인들 중에서 종종 베트남을 선교지로 택한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곤 하였다. 개인적으로는 오래전부터 중국에 관심을 두고 있어서 이민 목회를 잠시 쉬는 동안 크라이스트처치에 있는 대학에서 1년 과정 중국어 풀타임 공부를 하였었고 학교에서 지원하는 장학금으로 중국 란조우에 있는 자매 대학교에서 6개월여 공부하며 머물면서 중국 내륙 지역을 탐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막연히 선교지로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지켜보던 중국 선교의 문이 닫히고 그곳에서 오랜 시간 사역하던 선교 일꾼들이 어쩔 수 없이 후퇴하는 상황이 생기면서 중국과 유사한 문화 배경을 갖고 있으며 아직도 복음화가 절실한 베트남으로 눈을 돌리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베트남은 실버 선교사로서 우리가 사역 도구로 준비한 한국어 교사 자격증을 잘 사용할 수 있는 나라 중 한 곳이다.

베트남에는 현재 32개 대학교에서 한국어과가 개설되어 있으며, 2021년부터 초등학교 3학년부터 배우는 필수 제 1외국어 선택 과목으로 한국어가 선정되어 갈수록 수요가 증가하는 추세이다. 현재 인도차이나 국가 중에서 가장 많은 8천여 한국기업들이 진출해 있는 베트남은 주변 동남아 국가보다 한국어에 대한 선호와 함께 우수 인재들이 몰리고 있어 한국어는 복음 전도에도 효과적인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

우리가 베트남에서 머무는 동안 중점을 두고 사역한 영역은 대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원천적으로 외국인이 베트남에서 현지인에게 직접 선교는 할 수 없기에 젊은이들과의 접촉점을 찾기 위해 베트남 정부가 훼 지역에서 공인한 유일한 현지인 복음교회에 출석하였다.

주일 예배와 주중 예배에 참석하며 베트남 기독교 문화에 점점 다가가는 한편 베트남 사람들의 생각과 문화를 하나씩 체험해 나갔다. 지난 3년여 코비드 기간 동안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곳에서 고립된 상황을 보내기도 하였지만 돌이켜 보면 이 시간들이 오히려 현지인들과 더 깊이 관계 맺어가는 소중한 시간들이 되었음을 감사하게 생각한다.

또 교회에 리더 그룹 가정을 돌아가며 모이는 소그룹 예배에 참석하며 더 깊은 신앙적인 교류를 할 수 있었고 주일에는 교회에 출석하는 대학생들과 영어라는 매개를 통해 자연스럽게 만남을 갖고 관계를 넓혀갈 수 있었다.

그동안 만난 학생 중 특히 기억나는 학생은 ‘저(Jó)’라는 산부족 출신 여학생이다. 매주 토요일마다 우리 집에 와서 한국어를 배웠던 이 학생은 훼 사범대학교 4학년 학생이었다. 본래 경찰관이 되려고 하였으나 베트남 공무원이 되려면 종교란에 기독교가 명시되어서는 아니되기에 결국 초등학교 교사의 길을 택하였던 학생이다.

가무잡잡한 얼굴에 씩씩하고 열심인 이 학생을 1년여 매주 만나면서 소중한 시간을 많이 가졌었다. 사범대 졸업 후 산부족 고향에 돌아가서 초등학교 교사로 일하면서 지금도 종종 소식을 전하고 있다. 교사로 임명되어 첫 월급에서 적지 않은 금액을 우리 부부 사역을 위해 보내준 기특한 자매이다. 훼에서 ‘저(Jó)’ 자매가 있는 곳까지 버스로 14시간 이상을 달려가야 해서 쉽게 만나지 못하고 있지만 꼭 다시 방문해서 만나고 싶은 그리운 얼굴이다.

베트남은 자녀 교육에 목숨을 거는 나라이기도 하다. 베트남 엄마들의 교육열은 한국 못지않다. 이곳에서 일하는 교민들이 ‘베트남을 보면 한국의 과거가 떠오른다’고 입을 모아 말하는 것에는 꽤나 그럴듯한 근거가 있다. 베트남 전쟁의 치열함 속에서 미군의 폭격과 수색을 피해 땅굴을 파고 살면서도 아이들에게 가르침을 잊지 않았다. 베트남과 미국이 한창 전쟁 중이던 당시 호치민 주석은 구소련, 체코, 폴란드, 북한 등에 인재들을 유학보내며 그들에게 단호하게 말하였다고 전해진다.

“총을 들고 싸우는 것만이 전쟁이 아니다. 너희는 전쟁이 끝난 이후 이 나라를 재건해야 할 사람들이다. 이제부터 너희들의 총은 책이다. 반드시 많은 것을 배우고 돌아와 이 나라에 도움을 주어야만 한다”.

그 때 북한 김일성 대학교에 유학생으로 가서 공부하고 돌아와 훼 외국어대학교 한국어과가 개설될 당시 초대 교수로 기반을 마련하고 가르치다 은퇴한 원선생 노부부를 이곳에서 만날 수 있었다. 북한식 한국어를 하는 베트남 어른이 우리를 댁으로 초대해서 여러 이야기를 들려 주며 격려해 주었다.

우리는 베트남 땅의 젊은이들을 주 선교 대상으로 정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며 영어, 한국어라는 복음의 접촉점을 가지고 학원, 교회, 커피숍, 광장, 집, 때로는 온라인 상에서 만나고 있다. 더 많은 베트남 영혼들이 주께로 돌아오는 그 날까지 우리의 힘이 닿는 한 작은 힘이나마 베트남 복음화에 수고와 땀을 보태려고 한다. 여러분의 중보기도를 부탁드린다.

이전 기사2월 넷째 주 찬송/3월 첫째 주 찬송
다음 기사뉴질랜드에서 피어 온 하얀 꽃 한 송이
임 봉학
서울신학대학교 및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졸. 1995년부터 크라이스트처치에서 교민목회와 지역민을 위한 상담활동을 하면서 평신도를 세우는 건강한 교회를 꿈꾸며 목회. 2019년 이후 섬기던 로고스교회에서 베트남 선교사로 파송되어 현재까지 사역 중. 실버 선교사로서 한국어와 영어교습을 통한 젊은이 복음 전도와 지역교회 사역자를 목회상담으로 지원하며 베트남 복음화에 협력하는 선교소식을 전하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