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로가 된 소년

우리나라의 1970년대는 경제적으로 매우 어렵던 시절이었다. 살길을 찾아 무작정 서울로 오는 행렬이 끊이지 않았다. 내가 살던 군자동 강 건너 답십리 둑방에는 판자촌이 끝없이 들어서 있었다. 우리 가족 역시 무작정 상경하여 월 3천 원짜리 방 한 칸에 일곱 명이 세들어 살았다. 참 많이도 어렵고 암울한 시기였다. 

나는 살림이 어려워 바로 학교에 들어가지 못하고 1년을 꿇은 후에야 중학교 2학년으로 전학할 수 있었다. 비록 경제적으로는 매우 어려운 시기였으나 우리 가족들은 참 열심히 하나님을 섬겼다. 나는 중학교 2학년 때 이미 주일학교 교사를 했고, 한겨울에도 열심히 새벽기도를 다녔다. 

내가 다니던 교회는 몇십 명 모이지 않는 조그만 개척 교회였다. 그 교회에서 한 소년을 알게 되었고 아주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그는 심한 관절염으로 거동이 불편했고 가정 형편이 어려워 학교도 다니지 못했다. 어느 날엔가 그 친구의 집을 방문하고 충격을 받았다. 

하루 종일 어두컴컴한 초라한 방에서 관절염으로 휘어진 손가락으로 공장에서 받아온 부품들을 조립하고 개당 몇 원씩 받고 있었다. 하루 종일 일을 해도 몇 푼 되지 않았다. 어린 나이에 가장 노릇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뒤로는 내 마음이 편하지가 않았다. 

‘어떻게 하면 친구를 도와줄 수 있을까’ 그 생각밖에 없었다. 그 당시 우리 가족의 삶도 하루 벌어 하루 살아가는 어려운 상황이었고, 남을 돕는다는 생각조차도 할 수 없었던 어려운 처지였다. 나의 이 간절한 마음을 하나님은 아시고 아주 특별한 지혜를 주셨다.

친구에게는 특별한 재능이 있었다. 나무를 파서 아름답게 만드는 재능이었다. 그 당시 우리 아버지는 조그만 시장 상가에 가게를 얻어 부동산 소개업을 하셨는데, 그 가게 안에 도장을 파는 분이 함께 일하고 계셨다. 만약 친구가 도장 파는 기술을 배울 수만 있다면 밥 걱정은 안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친구의 어려운 사정을 말씀드리고 도장 파는 분에게 기술을 배울 수 있게 해달라고 간절히 부탁을 드렸다. 참 감사하게도 도장 파는 분과 이야기가 잘 되어 도장 파는 기술을 배우게 되었다는 기대했던 대로 친구는 빠른 시간에 기술을 습득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얼마 후 도장 파는 분이 다른 곳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나는 그 빈자리에 이 친구가 도장 일을 하게 해달라고 아버지에게 간곡히 부탁을 했다. 원래 계시던 분은 약간의 세를 내고 있었지만 내 친구는 그럴 형편이 안 되니, 아버지도 어려운 처지에 있는 터라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 같았다. 앞으로 잘되면 반드시 가게세를 낼 수 있을 것이라는 나의 간곡한 설득에 도장 일을 하도록 허락해 주셨다. 

일을 시작할 수 있게 되자 새로운 문제가 생겼다. 이 일을 시작하려면 최소한 장비와 다양한 종류의 도장들이 있어야 하는데 이것을 준비할 어떤 방법도 없었다. 그때 마침 내 수중에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한 학기 기성회비(학비) 2만 5천 원이 있었다. 많이 두렵고 갈등이 되었으나 이 돈으로 필요한 최소의 것들을 준비하여 도장 일을 시작하게 하였다. 

시작은 참으로 미약하였으나 얼마 되지 않아 안정적으로 자리를잡았다. 그 후 사업이 잘되어 자기 가게를 얻어 어엿한 인쇄소 사장이 되었다. 아무런 소망이 없었던 이 친구는 후일에 아름다운 아내와 결혼하여 자식도 얻고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게 되었다. 오랜 시이 흘러 이 친구를 만났는데, 이제 장로가 되어 열심히 교회를 섬기며 주님 안에 복된 삶을 살고 있었다.

하늘의 선물, 1억 5천만 원
코로나의 여파로 전 세계인이 고통을 겪고 있다. 그중에 더욱 큰 고통을 겪고 있는 이들이 선교사라고 생각된다. 잠시 한국을 방문했다가 선교지 봉쇄로 오도 가도 못하는 분, 몸이 아파서 혹은 선교지에서 더 이상 머무를 상황이 되질 못해서 한국에 머무는 분 등, 여러 가지 사정으로 한국에 머물고 있는 분들이 많다. 선교사들은 삶의 터전이 이곳이 아니므로 당장 머물 곳을 찾기도 쉽지 않고, 더구나 코로나로 어려워져 후원을 끊는 교회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분들을 돕기 위해 우선 수원 나눔센터에 선교관을 마련하여 몇 분의 선교사를 모셨다. 그리고 물질적으로 약간의 도움이라도 드리고 싶어 우리 카톡 단체방에 후원금 지급 계획을 공지했다. 1인당 100만 원씩, 30명에게 3천만 원 후원을 계획하였다. 

그런데 공지를 올리자마자 예상 밖에 너무나 많은 선교사님들이 신청을 했다. 무려 700여 분이 신청을 했다. 너무나 안타까웠다. 이미 여러 곳에 후원을 하고 있는 터라 후원금을 늘리기가 쉽지가 않았다. 어떻게 하면 좀 더 많은 분들에게 도움을 드릴 수 있을까 생각하다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1억으로 100명에게 지원하기로 결단하였다. 

여기저기서 돈을 끌어모아 후원 대상자를 선별하고 있을 때 뜻밖의 카톡 하나가 왔다. 우리 학교를 거쳐간 자매와 자매의 남편이 지금은 의사로 활동하고 있는데, 전날 갑자기 이곳에 후원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생겨 5천만 원을 보낸다는 내용이었다.

이 카톡을 받고 한참 동안 목이 메었다. 필요에 따라 즉각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감격스러웠고, 거액의 돈을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보내 준 부부(한경식·엄미라 집사)의 아름다운 마음이 너무 고마웠기 때문이다. 조용히 눈을 감고 이 부부에게 한없는 복을 내려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그래서 당초 예상보다 많은 150명 선교사분들에게 100만 원씩 후원금을 보낼 수 있었다. 

우선 병으로 고생하시는 분들을 선발하고, 나머지 인원은 하나님의 손에 맡겼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가룟 유다의 자리에 새로운 제자 맛디아를 선출할 때 제비를 뽑았듯이 우리 사역자들이 모두 모여 간절히 기도하고 제비를 뽑아 후원 대상자를 선별했다. 이번에 지원되지 못한 선교사들에게는 다음의 기회를 기대하며 우선 150분에게 지원을 했다. 많은 선교사분들의 감사의 답글이 왔다. 

특별히 한 선교사님의 답글이 가슴에 남는다. 많은 사람들이 왜 선교지에 있지 않고 한국에 있느냐고 비난하는 중에 우리의 아픔을 알고 생각해 주는 마음 하나만으로도 너무나 감사하고 눈물이 난다고….

오직 감사를 받으실 분은 하나님 한 분이시다. 이 귀한 나눔에 동참하게 하신 하나님께 크게 영광을 돌렸다. 

헌물로 바친 결혼반지
1980년대 신혼 초에 잠실의 한 교회에 다녔다. 우리 교회는 강남 허허벌판에 교회 건물만 덩그러니 있었고 교회로 가는 길은 비포장 도로였기에 비가 오는 날이면 장화를 신지 않고는 갈 수 없을 정도였다. 

그 당시 잠실은 사방에 개발이 진행되고 있었다. 강남 개발 붐을 타고 주변에 아파트들이 들어서고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왔다. 교회는 늘어나는 교인들을 받아들이기 위해 다시 교회 건축을 시작했다. 모두들 마음을 담아 건축헌금을 작정했다. 

당시 우리 가족은 있을 곳이 없어 아내의 할머니 집 창고로 쓰던 다락방에 거주하고 있었다. 모두들 하나님의 성전을 짓는다고 마음을 다해 건축헌금을 하는데 우리도 참여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러나 그 당시 월급 28만 원을 받았던 나로서는 큰돈을 작정할 수가 없었다. 아내와 의논하여 50만 원을 작정했다. 작정 헌금을 할 시간이 다가왔지만 도저히 그 돈을 마련할 수가 없었다.  

그때 우리 집에는 약간의 금붙이가 있었다. 결혼반지 와 아들의 돌반지 몇 개였다. 대부분 결혼반지로 비싼 다이아몬드 반지를 하던 때였으나 가진 것이 없던 나는 2돈짜리 금반지로 결혼반지를 대신했다. 아내와 나는 건축헌금을 위해 결혼반지와 아들의 돌반지를 전부 팔기로 작정했다. 팔고 나니 다행히 약 50만 원이 되었다. 기쁜 마음으로 건축헌금을 하였다. 

남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나 우리는 결혼반지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반지보다 사랑하는 마음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나는 체질상 반지를 끼는 것이 불편하여 늘 집에 두고 다녔다. 오히려 집에 금붙이를 두고 다니는 것이 도난의 문제도 있고 해서 팔고 나니 마음이 편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성전을 짓는 곳에 쓰인다고 하니 더욱 감격스러웠다.

한때 뉴질랜드에 있는 중국 교회에 초청을 받아 가서 집회를 한 적이 있었다. 하나님이 베푸신 기적의 일들과 내 삶의 이야기를 간증했다. 담임목사님께서 예배 후에 강사와 교인들과의 대화 시간을 마련해 주었다. 신앙과 관련된 여러 가지 질문에 답을 해주었는데

한 중년 여인이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어떻게 결혼반지를 팔아 헌금을 할 수 있냐고, 본인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아마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라면 당연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것이 가장 우선이 되어야 한다. 신앙은 바로 우선순위의 문제이다. 우리에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보다 그 어떤 것이 우선되어서 는 안 된다. 

나는 일생 동안 이 우선순위를 지키려고 애써 왔다. 하나님은 물질보다, 명예보다,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하나님을 제일 사랑하기를 원하신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복되는 길이고 존귀해지는 길이기 때문이다. 나는 평생 이 진리를 믿고 체험하며 살아왔다. 

이렇게 우선 순위를 지키고 살아갈 때에 하나님께서는 내 삶 전체를 통하여 인간의 머리로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신령한 복으로 채워 주셨다.

이전 기사코람데오 신학대학원, 집중강좌 2 사사기
다음 기사이민학 스케치
이 은태
뉴질랜드 Assembly of God Bible College 졸업. 오클랜드 인터내셔날처치 담임목사. AEC 및 다니엘캠프장 이사장. 저서로는 ‘이른 비의 기적’과 ‘늦은 비의 기적’을 통해 ‘모든 것을 후히 주시고 부족함이 없도록 채워 주시는 하나님의 절대 불변의 물질의 법칙’을 알려 주는 재물이야기를 연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