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는 그 민족의 독특한 사유의 표현이며, 언어에는 응결된 철학이 들어 있다”

우리는 흔히 서양문명과 기독교의 문화 및 사상이 그리스적(헬레니즘)인 것과 히브리적(헤브라이즘)인 것의 역사적 복합산물이라 말합니다. 그러나 무엇이 그리스적이고 무엇이 히브리적인가의 정확한 분석은 하지 못합니다.

그리스 사유와 히브리 사유가 하나의 복합체를 이룰 수 있었다는 것은 그것들이 각각의 특이성을 가지면서 동시에 공통점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럼에도 그리스적 사유와 히브리적 사유의 특이성을 찾는 문제는 중요한 신학적 의미를 갖습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의 본질에 대한 물음이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초기 기독교가 발생하기 전 알렉산더 대왕(Alexander the Great B.C 356년 ~ B.C 323년)이 지중해 동부 지역의 여러 나라를 정치·군사적으로 정복함에 따라 문화적 변화가 일어나는데 그것은 그리스·로마 사상과 셈족과 고대 근동 중심의 동방사상이 갈등·충돌·융합하면서 약 B.C 320년 ~ A.D 150년 사이에 헬레니즘이라는 새로운 문화를 형성합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아래 초기 기독교는 어떤 면에서 팔레스타인(Palestine) 유대교의 작은 한 종파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신약성서가 가지고 있는 사상의 세계는 팔레스타인 유대교이지만 그들의 생활 기반은 헬레니즘의 세계였습니다. 그 단적인 증거는 신약성서가 팔레스타인 유대교의 언어로 써진 것이 아니라 헬라 세계의 언어인 헬라어로 쓰였다는 사실입니다.

복음서에서 가장 먼저 기록된 마가복음 15장 34절을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외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이는 아람어로써,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이 아람어를 사용했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토라’의 언어인 히브리어는 기원전 6세기경 이스라엘이 바빌로니아에 의해 멸망하면서 점차 사라져가고, 구약성경을 기록한 고전어로만 존재했고 일상에서는 근동지역의 공동어인 아람어를 사용했습니다.

당시 유대인 회당에서 토라를 읽을 때는 같은 구절을 세 번 반복했다고 합니다. 랍비는 이미 사어가 된 히브리어로 토라를 한번 낭송하고, 그 후에 유대인들의 구어인 아람어로 번역해서 두 번 낭송합니다.

예수님은 히브리어와 아람어로 팔레스타인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다가 팔레스타인의 중심지 예루살렘에서 십자가형을 받게 되는데 전통적으로 A.D. 33(30)년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후 20년이 못 되어서 대략 50년 혹은 51년 사도 바울이 헬라 도시인 데살로니가에 있는 교회에 헬라어로 편지를 씁니다.

이는 초기 기독교 교회는 예수님이 돌아가신 지 20년 안에, 또는 기독교가 형성된 지 20년 안에 신속한 발전을 거쳐서 대단한 변화를 일으키게 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언어적으로는 히브리어와 아람어에서 그리스어로 무게중심이 바뀌며, 지리적으로는 팔레스타인에서 유럽으로, 문화적으로는 유대세계에서 헬라세계로 무게중심이 바뀐 것입니다.

우리에게 전해오는 신약성서에 담긴 예수님이 어록들은 아람어를 당시 학자들의 언어인 그리스어로 번역한 것입니다. 당연히 이런 변화는 신학적 사상에 변화도 가져오게 됩니다.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신약성서의 세계는 헬레니즘의 세계라는 사실입니다.

기독교는 히브리적 사유를 모태로 하고 있으며 또한 헬레니즘 세계로 옮겨지면서 그리스적 사유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신약성서에서 우리는 기독교의 헬라화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히브리적 사유와 그리스적 사유의 비교
여러 학자에 의해 그리스적 사유와 히브리적 사유의 특별한 관계가 논의되었는데, 그중에서 노르웨이의 토를라이프 보만(Thorleif Boman)이 쓴『히브리적 사유와 그리스적 사유의 비교(Hebrew Thought Compared with Greek, 허 혁 번역)라는 책을 중심으로 몇 가지를 이야기해 보려 합니다.

중요한 점은 그는 그리스적 사유와 히브리적 사유를 단순히 외형적인 대립이 아닌 하나의 통합적이고 복합적인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는 그리스 사상과 히브리 사상의 차이점과 유사성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히브리 사상과 그리스 사상을 비교하면 매우 대칭적인 특징들이 나타납니다. 일반적으로 평가되어 온 것을 살펴보면 히브리적 사유는 동적으로 정열적이고 힘차며, 때로는 거의 폭발(폭력)적이라 평가합니다.

반면에 그리스적 사유는 정적으로 평온한 것, 조화적인 것을 말함으로써 동적인 것과 정적인 것을 극단적으로 대립시킵니다. 그러나 동적-정적이란 이 두 형태의 차이를 하나의 완성된 통일성 가운데 파악하고 평가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히브리 사람들의 가장 큰 특징은 듣는 것을 통해서 진리를 경험합니다. 따라서, 그들의 종교적 경험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부르셨고, 아브라함을 부르셨고,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히브리인들은 하나님이 부르는 음성을 경청하는 백성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듣다’라는 히브리어 ‘샤먀’(shama)와 헬라어 ‘아쿠오’(akouo)는 둘 다 ‘순종’의 의미로 이어집니다. 히브리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그 말씀을 ‘듣고 행한다’는 하나의 의미입니다. 그래서 신명기 6장 4절의 “들으라 이스라엘”(쉐마 이스라엘)은 단순히 듣는 것이 아니라 ‘청종하다’라는 의미입니다. 그것이 또한 바로 순종입니다. 그러니까, ‘왜 듣지 않습니까?’는 ‘왜 순종하지 않습니까?’와 같은 의미입니다.

즉, 히브리인들의 사고 유형의 특징은 태생적으로 청자적입니다. 때문에 히브리적 사유는 들음을 통한 철저한 이해의 사유입니다.

반면에 브루노 스넬(Bruno Snell)이 그리스인들을 “눈(eye)의 사람들”이라 불렀을 정도로 그들의 사유는 가시적인 존재에서 출발하는 눈의 사유입니다. 그리스 사람들은 듣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이고 듣고 순종하는 결단의 실존이 아니라 눈으로 보고 파악하는 논리의 실존입니다.

그리스인들에게 실체(현실)란 객관적으로 주어져 있는 것을 관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주로 감각기관들, 특히 시각을 통해 수행합니다. 그들은 그들이 보는 것을 이야기하고 서술합니다. 때문에, 그리스 철학의 원리들과 상징들은 시각적으로 강조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영향은 헬라 문명의 예술작품들 특히 조각 작품과 건축 문화에서 잘 드러납니다.

그리고 그리스인들의 시각의 의미는 좀 더 깊습니다. 그들은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없는 것과 감각으로 도달할 수 없는 것도 볼 수 있다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직관이고 관조입니다.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이 만물의 원리와 원인으로 말하는 물, 불, 공기, 수, 원자 개념들과 플라톤적 이데아 이념들이 그러한 것입니다.

그리스어의 진리는 ‘알레테이아’(aletheia)로 ‘a’는 ‘제거하다’, ‘드러내다’는 뜻이고, ‘letheia’는 숨겨진, 은폐된 것을 의미합니다. 즉 그리스인들에게 참된 것은 숨겨지지 않은 것, 또는 숨겨진 것, 은폐된 것을 드러내는 일을 뜻합니다. 즉 명백하게 분명히 볼 수 있는 것이 진리입니다. 이처럼 그리스적 사유는 가시적인 눈의 사유입니다. 당연히 이러한 철학자들의 삶은 이론적인 삶이고, 관조적인 삶이었습니다.

자신의 눈으로 보기 전에는 믿으려 하지 않았지만, 그 깊이를 꿰뚫고 사물들의 내면성과 그것들의 참 내용 및 핵심을 보았을 때 그들은 비로소 그 사실을 ‘이해’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헬라 문화에서 ‘본다’라는 의미는 단순히 시각적으로 그저 바라본다는 뜻이 아니라, 상대방의 본질을 본다, 또는 진심을 안다는 의미까지 확장됩니다. 서로 마음이 통하는 상태, 온전히 연결된 순간을 드러내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헬라어 중에 ‘보다’라는 단어들을 보면, 단순히 ‘보다’라는 뜻을 포함하면서 어떤 것들은 더 넓은 뜻을 내포하고 있어서 다음의 몇 가지 단계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에이도(εìδω):눈에 보이는 그대로 보는 것, 옵타노 (óπτάνω):눈에 보이는 대상을 내 관점, 내 시각으로 해석해서 보는 것. 떼오레오(θεωρέω):본질과 목적에 대한 바람 봄, 뚫어지게 보다 매우 자세히 관찰한다 할 때 사용. 블레포(βλέπω):주의 깊게 살피거나 생각하고 끌어오다, 다른 것에서 눈을 돌려 한 대상만 보다, 경험 등을 통해 보는 능력, 알아차리는 것, 주의하여 보는 것을 의미. 호라오(óράω)는 진리의 눈으로 사물 너머의 것을 보는 것을 의미. 상황을 통해 실체를 아는 것, 특히 신약성경에서는 하나님을 보는 것, 예언적으로 보는 것, 영적으로 깨닫는 것에 쓰임.

물론 히브리어에도 이와 비슷한 개념의 단어가 있습니다. 히브리어의 ‘보다’라는 표현 중에는 ‘라아’는 보다, 바라보다, 알다, 인식하다, 이해하다, 배우다 등으로 다양하게 해석되며, 동일하게 ‘감찰하다’(보살피다) 로도 해석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히브리인들이 ‘보다’라는 의미는 그리스인들과는 다른 표상에 결부시킵니다.

가시적인 사물들은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그것들의 소유자 혹은 제작자의 성질을 나타내는 표지가 되고, 이 표지를 발견한 사람은 그 사물을 똑바로 본 것입니다. 스바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를 들었을 뿐 아니라 ‘보기도’했다(왕상10:4)는 것과 욥이 “이제는 눈으로 뵈옵나이다”(욥 42:5)라는 고백은 바로 그러한 표현입니다.

그런 점에서 작년 12월에 개봉한 제임스 카메론 감독이 보는 것을 통해 실재를 체험하는 듯한 3D 기술의 영상 효과와 HFR(High Frame Rate)를 통해 시각효과를 극대화한 것과, 1편에서와 같이 “I see you”라는 대사를 만나 볼 수 있는데 이 또한 시각에 대한 헬라 사상의 영향을 받은 서구 문화의 한 단편을 영화로 잘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출처: 김용규,『신; 인문학으로 읽는 하나님과 서양 문명 이야기』(IVP 출판사, 2021)을 저자와 출판사의 허락을 통해 책에서 다뤄지는 기독교 신학의 내용을 필자의 관점에서 재 인용과 재 해석을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