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시아의 왕후 에스더

박성훈 목사<오클랜드 한인교회협의회 부서기>

페르시아의 왕후인 와스디가 쫓겨났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1:12 “그러나 와스디 왕후는 내시들에게 왕의 명령을 전하여 듣고도 왕 앞에 나오기를 거절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왕은 화가 몹시 났다. 마음속에서 분노가 불같이 치밀어 올랐다.”

단순한 잔치가 아니었다. 역사적인 배경을 살펴보면 그리스를 상대로 전쟁을 벌이기 위해 귀족들의 지지와 후원이 필요해서 연 잔치였고, 80일간의 잔치 끝 그날이 절정이었다. 모든 사람들 앞에서 왕비의 행동이 왕을 웃음거리로 만들었다. 잔치는 엉망이 되고, 분노한 왕이 와스디를 쫓아낸 것이다.

그리고, ‘Find New Queen’ 특급 프로젝트가 시작된다. 전 국민의 관심이 집중된다. 이른바 왕비컨테스트, 조건은 하나 ‘아리따움’이다. 외모뿐만 아니라, 말투, 행동, 심지어 몸에서 나는 향기도 포함된다. 예선을 통과한 처녀들이 1년간 하는 준비가 그것이다.

지금도 중동의 왕족들의 피부에서는 자연스러운 향기가 난다. 그렇게 피부에서 향기가 뿜어 나올 때까지 최소한 1년을 준비해야 한다. 가만히 있어도 이미 아리따운 처녀들이 더 아름다워지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하고 있다. ‘입금이 되면 변신한다’ 는 인터넷 밈이 있다. 헐리우드 배우들의 평소 모습과 영화에 출연하기 위해 자신을 단장할 때 몰라볼 정도로 변신하는 것을 의미한다.

마치 신부가 결혼식 당일을 위해 온갖 정성을 기울여 그날 최고의 미모를 자랑하는 것처럼 분명 그 1년은 그녀들의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때였을 것이다. 심지어 모든 비용이 무료이다. 최고의 전문가가 돕는다. 그리고, 왕 앞에 나갈 때 몸에 걸친 왕궁의 보석들은 영구히 자신의 것이 되는 것이 관례였다.

다시 말해, 지금으로 치면 명품 쥬얼리와 패션의 전속모델이 되는데, 몸에 걸친 것은 모두 가질 수 있다. 달라고만 하면 더 얻을 수도 있다. 뿐만이 아니다. 만약에 왕비가 되면, 보석들쯤은 생각도 나지 않을 만큼의 영광, 명예, 심지어 권력까지 손에 넣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왕비 후보로 뽑힌 그녀들이 어떻게 1년을 보냈을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누가 이것을 쉽게 보고, 가볍게 말할 수 있을까?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은 사람의 본능이다. 그런데, 대단한 보상까지 얻을 수 있다. 누가 이것을 마다할까?

아름다움을 위해 애쓰는 이들의 노력은 쉽게 볼 것이 아니다. 언젠가 글을 읽다가 깜짝 놀란 적이 있다. 화장품의 종류가 이렇게 많았구나. 아름다움을 가꾸는 것, 유지하는 것은 상당히 고되고 어려운 일이다. 하나님 주신 아름다움을 가꾸어 가는 모든 인생들에게 찬사와 격려를 보낸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심각한 문제가 2개나 있다. 첫째, 왕비는 한 명이다. 둘째, 왕을 믿을 수 없다. 다시 말해, 아무리 노력해도 만족함이 없을 수 있고, 만약 왕비가 된다해도 행복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첫째, 왕비는 한 명이다 자리가 하나밖에 없다. 아무리 노력해도 목숨의 끝까지 바쳐도 안 되는 선이 있다. 한 명 외에 모두 탈락이다. 불평해봐야 소용없다. 아프지만 현실이다. 어떤 청년이 오랜 시간 정성들여 화장했는데, 거울을 보니 자꾸 누구랑 비교된다. 거울을 깨버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잠시 떨어진 처녀들의 마음을 들여다본다. 부러워하며 열등감에 깊숙이 빠져 불안해하며, 혹은 자신을 미워하며 살지 않았을까? 떨어진 쳐녀들의 마음 3종 세트가 있다

*나는 왜 남보다 뛰어나지 못할까?

*나는 왜 더 충분히 준비되지 못했을까? 혹은 준비하지 않았을까?

*나에겐 왜 좋은 기회가 없었을까?

혹시 이런 생각 꽤나 하며 오늘을 사시는 분들 없으신가? 죽도록 노력해도 안 되는 더러운 세상. 애초에 세상이 불공평해. 부러워하며 열등감에 빠져들어 가면 불안해하며 자신을 미워하며 살아가시는 분은 없는가?

어떤 사람들은 화를 내며 말한다. 왜 나쁜가? 더 노력하고, 더 잘 준비하고, 더 좋은 기회를 얻기 위해 애를 쓰며 살아야지. 더 예쁘게 더 멋있게 화장을 하고, 옷을 입어야지. 운동도 해서 몸매를 가꿔야지. 향수를 뿌리고, 최신 유행하는 옷들도 잘 살펴서 입고 다녀야지. 그래야 행복하지. 그래야 성공하지. 그래야 돈을 벌지.

교회도 똑같지 않은가? 멋지고 예쁘고, 똑똑하고 재능있는 사람 더 인기 있더구만. 하나님도 착하고, 성실하고, 기도 많이 하는 그런 사람 더 좋아하시는 것 아닌가? 이들의 이름은 ‘성실’이다.

옆에 서 있던 또 다른 이가 말한다. 꼭 1등 해야 되나? 꼭 예뻐져야 하나? 돈을 많이 벌어야 하나? 그런 것 신경 쓰지 말고 있는 것에 만족하며 이대로 그냥 행복하게 살면 되는 거지. 하나님도 자족하며 가진 것 감사하며 살라고 하셨잖아. 안 그래? 이들의 이름은 ‘적당’이다.

당신은 어느 쪽인가? 성실파? 적당파? 둘 중에 누가 행복할 것 같은가? 성경과 역사는 우리에게 말한다. 누구에게도 만족이 없었다.

안타깝고 슬픈 것은 ‘성실파’와 ‘적당파’가 지적한 교회의 모습이 사실이라는 것이다. ‘저 성도보단 내가 훨씬 낫지’와 ‘나는 왜 저 성도보다 못할까?’ 사이를 무한 반복하며 살아가는 성실파 성도들이 있다. 심해지면, 누군가를 판단하거나, 혹은 열등감에 사로잡힌다. ‘더 많이 기도하지 못해서, 성경을 읽고, 봉사하고. 더 사랑하지 못해서 나는 떨어진 거야’ 적당파 성도는 말한다.

나는 만족해. 저분들은 정말 대단해, 나는 안 될 거야. 하나님이 나에겐 탤런트를 작게 주신 걸 어떻게 해. 나는 이대로가 좋아. 정말 그럴까? 이솝우화에 신 포도 비유가 나온다. 어느 날 여우는 나뭇가지에 매달린 잘 익은 포도를 보았다. 달콤한 즙이 톡 하고 터져 나올 것같이 탐스러웠다. 여우의 입안에는 침이 가득 고인다. 포도를 향해 뛰어오른다. 닿지 않는다. 다시 더 높이 뛰어오른다. “조금 더 높이 오르면 포도를 딸 수 있을 거야”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지만 포도는 너무 높은 곳에 있다. 여우가 어떻게 했나? 고개를 휙 돌리며 말한다. ‘흥, 저 포도는 시어 터져 맛이 없을 거야!”

저는 이야기의 그다음을 생각해보았다. 그다음 날 여우가 또 다른 포도를 본다. 어떻게 했을까? 다시 도전했을까? 혹시 포기하고 계속 똑같은 말, ‘저 포도는 시어 터져 맛이 없을 거야’만 반복하며 살지는 않았을까? 많은 성도들이 이렇게 떨어진 처녀 신드롬을 앓으며 살아간다. 혹시 다른 길은 없을까?

둘째, 왕을 믿을 수 없다 성실파의 끝판왕 한 처녀가 드디어 왕비가 되었다. 어떤 일이 생길까? 사랑받고 존중받고, 보호받으며 영광으로 누릴까? 행복할까? 아니다. 아하수에로왕은 잔인하고 욕심 많은 왕이었다. 그에게 왕비란 그저 욕망의 대상일 뿐 그녀는 빼앗기고, 파괴당하며, 왕의 마음대로 휘둘리며 살아가게 될 것이다.

여인들은 몰랐을까? 아니다. 알았다. 그러나, 그래도 원한 것이다. 왕의 명령이니 어쩔 수 없었다? 대신 많이 받았으니 괜찮다? 내 아들이 나중에 왕 될 수 있으니 지금은 참아야지? 정말 괜찮은 것일까? 하나를 얻으려면 하나를 주는 것이 당연한 것일까? 그러니, 포기하며 내 상처 난 마음을 다독이며 살아가야만 하는 것일까? 혹시 다른 길은 없을까?

복음이 말한다 다른 길이 있다. 훨씬 더 좋은 길이 있다. 은혜의 길, 사랑의 길, 구체적으로는 에스더의 길이다. 에스더는 왕비가 되었다. 에스더가 가장 예뻤을까? 가장 많이 노력? 철저히 준비? 기회를 놓치지 않고 딱 잡았다고 생각하시는가? 아니다. 그 반대다. 에스더에겐 기회가 없었다. 당시의 왕비는 왕족들 중에서 고르게 되어 있었고, 그중에서도 왕의 일곱 자문관의 가문에서 선택하는 것이 관례였다. 에스더는 추방당한 민족의 딸, 즉 이방인이었다. 에스더는 자격이 없었다. 또, 에스더는 다른 처녀들처럼 화려하게 꾸미지도 않았다.

다시 말해, 에스더는 신분과 자격이 없었고, 화려한 꾸밈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에스더가 왕비가 된다. 성경은 다른 설명 없이 그 이유를 딱 한 마디로 말한다.

2:17 “왕이 모든 여자보다 에스더를 더 사랑하므로 그가 모든 처녀보다 왕 앞에 더 은총을 얻은지라 왕이 그의 머리에 관을 씌우고 와스디를 대신하여 왕후로 삼은 후에”

그것은 ‘사랑’이었다. 아하수에로왕이 이상하다. 변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그의 온 마음을 사로잡은 아름다움은 어디서 왔을까? 비교해서 좋았다는 것이 아니다. 왕은 더 이상 다른 처녀들을 만나지도 않는다. 이 사람이 아니면 안 된다. 확정되었다. 왕은 에스더를 보자마자 콘테스트를 끝내 버린다. 즉각 결정을 내린다. 당연히 많은 반대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왕은 멈추지 않는다. 나의 왕비는 에스더다. 그러므로, 에스더는 성실과 적당, 그 어디의 감옥에도 빠지지 않고, 놀랍게도 ‘사랑받는’ 왕비가 된 것이다.

오늘 성경은 변해버린 왕, 자격 없었던 에스더를 통해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주는가?

사랑, 왕의 사랑이 모든 것을 뛰어넘는 가장 강력한 능력이다. 이유는 내가 아니라 왕에게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랑의 극치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만난다. 그분은 진정한 왕이셨다. 아름다움의 극치에 계신 분이 가장 아름답지 못한 모습으로 죽으셨다. 차고 넘치는 자격을 가지신 분이 모든 권리를 포기하시고, 힘없이 십자가에 매달리셨다. 경쟁에 지친 우리에게 조건 없는 사랑을 베푸셨다. 그래서, 우리가 아름답게 되었다. 노력이 아니라, 자격이 아니라, 준비가 아니라, 그저 은혜로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었다.

아하수에로의 영광이 대단하다. 하지만, 결국 끝났다. 황금의 나라를 영원히 다스리며 세상의 모든 영광을 다 가진 것 같았던 그는 왕궁수비대에게 암살되었다. 그러나 영원하신 왕의 신부가 되어 받는 사랑, 헤세드는 영원하다. 무한하다. 변하지 않는다. 가득찬 영광이다. 그러므로, 나는 충만할 수 있다.

주님을 알고 그의 사랑을 알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아는 사람, 즉 복음 안에 있는 사람은 비교하지 않을 수 있다. 하나님이 나를 누군가와 비교하여 선택한 것이 아님을 알 때 함께 기뻐하며 인생길을 걸을 수 있다. 충분히 배불리 먹은 자만이 계산 없이 지속적으로 내 것을 나눌 수 있다. 그의 것도 함께 기뻐하며 축복할 수 있다.

설교를 마치며, 하나님의 찐 사랑을 나눈다. 이 사랑을 알고 더 알기를 소망한다.

스바냐 3:17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무한경쟁 사회에서 제로섬게임에 지쳐 있는 모든 성도들이 떨어진 처녀 신드롬에서 벗어나 아름다우신 주님 안에 깊이 들어가 완전한 평안을 누리시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