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겨울 저녁에 만난 음반(音盤)

올림픽의 열기로 한 해가 온통 뜨겁기만 했던 88년에도 겨울은 왔습니다. 그날 12월의 어느 저녁, 저는 명동 거리를 걷고 있었습니다. 금방이라도 눈이 쏟아질 것 같은 겨울밤 하늘을 가끔 올려보며 천천히 걷고 있다가 문득 가끔 들리던 충무로의 음반 가게 생각이 나서 발길을 돌렸습니다.

너무 늦지 않았나 하는 우려도 했지만 다행히 가게는 아직 열려 있었고 낯익은 주인아저씨가 “늦게 나오셨네요, 막 문을 닫으려던 참이었어요,”하며 반갑게 맞아주었습니다. “아, 저녁 약속이 있어서 나온 김에 들렸습니다. 뭐 좋은 판 좀 들어왔나요?” 하고 저는 물었습니다.

좋은 판이란 물론 원판(수입 외제 판)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80년대 말에도 한국엔 정식 수입 절차를 받아 들어오는 원판이 거의 없었습니다. 카세트 테이프에 이어 CD가 겨우 나오기 시작했고 레코드판은 불법 빽 판과 복사판을 거쳐 라이선스 판이 나오기 시작할 때였습니다.

성음사나 지구레코드사 같은 곳에서 나오기 시작한 라이선스 판은 복사판에 비해 음질이 한결 좋았지만 아직도 원판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미군 부대나 암시장을 통해 들어오는 원판은 구하기도 힘들고 가격도 비쌌지만 애호가들은 그래도 원판을 찾았습니다. 좋은 판을 확보하면 가게 주인은 단골 손님에게 연락을 했고 가게 깊숙이 감춰놓아 뜨내기 손님에게는 잘 보여주지도 않았습니다.

“이 판들 좀 보실래요. 메이저 레이블은 아니지만 해외에서 상당히 평판이 좋은 판들입니다,”하며 주인이 진열대 뒤에서 몇 장의 판을 꺼냈습니다. 메이저 레이블(major label)이란 물론 EMI, Decca, DG, Philips 같은 크고 전통 있는 음반 회사를 이르는 말이었고 그 밖의 군소회사들은 마이너 레이블(minor label)이라고 불렀습니다.

“아, 그래요. 어디 봅시다.” 하며 저는 판들을 들여다보았습니다. 어떤 때는 틈새시장을 겨누고 나온 마이너 레이블 판 중에 꽤 좋은 것이 있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었습니다. 서너 장을 넘겨보다가 한 장의 판에 눈길이 갔습니다. 표지의 사진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입니다. 차가운 느낌의 해변에 자그마한 배 세척이 정박해 있었고 그 뒤 금빛 잔잔한 바다 위로 새 두 마리가 날고 있었습니다. 표지 왼쪽 상단 구석에 CHESKY RECORDS라고 쓰여 있었는데 들어본 적이 없는 회사였습니다.

하지만 그 겨울 저녁 저는 친구들과 저녁을 먹으며 마셨던 술기운이 아직 남아있었던 모양입니다. “표지 사진이 참 좋으네요. 이 판 주세요,”하고 주인에게 내밀었습니다. “아, 예?”하면서 주인은 약간은 의아한 태도로 판을 받았습니다.

평소 같으면 이 회사가 어떤 회사냐, 음질이 괜찮으냐 등등 자세히 묻던 제가 그날은 아무 말 없이 사진이 좋다며 판을 선택했으니 주인이 이상하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주인이 포장해주는 판을 받아 들고 나는 다시 겨울 거리로 나왔습니다. 이번엔 발걸음을 빨리해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렇게 만난 시벨리우스(Sibelius)의 교향곡 2번
집에 돌아오자 곧장 오디오로 다가가 진공관에 불을 지핀 뒤 포장을 뜯고 제대로 판을 들여다보았습니다. 시벨리우스의 교향곡 2번이었습니다. ‘시벨리우스가 누구지? 교향곡을 다 썼나?’라고 혼자 중얼거리며 판을 꺼내 턴테이블에 올리고 바늘을 내렸습니다. 사실 그때까지 시벨리우스가 누군지 몰랐습니다. 교향곡이라면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 슈만, 브람스 같은 작곡가의 전유물로 알고 있었는데 이름도 생소한 시벨리우스라는 사람이 교향곡을 썼다니 신기하게 느껴졌습니다.

한편으로는 누군지도 모르면서 표지 사진에 반해 덥석 비싼 판을 사 왔다는 사실이 부끄럽게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그런 느낌도 순간이었습니다. 잠시 뒤 소릿골을 누비며 바늘이 스피커를 통해서 내어놓는 음악을 들으며 저는 허리를 곧추세우고 자세를 바로 했습니다.

곡이 시작하며 스타카토의 현악기에 이어서 스피커를 통해 나오는 목관의 선율은 지극히 목가적이었습니다.

마이너 레이블의 음반이었지만 음질은 더없이 맑았고 곧이어 나오는 호른의 울림은 소박하면서도 다정했습니다. 마치 어머니의 부드러운 손길처럼 나를 휩싸는 선율이 끝나면서 이어지는 두 번째 악장은 참으로 독특했습니다. 팀파니의 연타에 이어 콘트라베이스와 첼로가 피치카토로 힘차게 우짖다가 무언가를 호소하는 듯한 파곳 소리가 흘러나왔습니다.

그 장면에서 나는 보다 더 귀를 바짝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때로는 긴장감이 흐르는 음악이 흐르다 다시 분위기가 바뀌어 유려하고 평화로운 선율이 흐르는 드라마틱한 악장의 변화에 나도 몰래 빠져들고 있었습니다.

어느 사이 악장이 끝나 판을 뒤집고 다시 바늘을 내렸습니다. 현악기와 관악기가 합하여 거친 파도처럼 울부짖다가 오보에의 느리고 평화로운 소리로 분위기가 바뀌다가 다시 거칠어지고 부드러워지기를 반복하며 꽤 길게 계속되다가 마지막 악장으로 넘어갔습니다. 단순하면서도 밝은 주제의 선율이 흐르다가 이어서 흐르는 음악은 어딘지 좀 슬프게 느껴졌습니다. 그러다가 다시 장대하고 벅찬 소리로 마감하는 대단원은 무언가 희망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음악이 끝난 뒤에도 저는 잠시 멍하니 앉아있었습니다. 이때까지 제가 들어왔던 교향곡과는 무언가 색달랐지만 그 근저에 흐르는 정서가 낯설지 않았습니다. 데자뷰(Déjà Vu)라는 말이 이럴 때를 가리키는 것처럼 처음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마치 우리 판소리의 한 자락을 들은 것처럼 그 안에는 기쁨과 슬픔이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 민족의 ‘한’과 같은 것이 들어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벨리우스(Jean Sibelius, 1865~1957)라는 작곡가
이렇게 들은 시벨리우스의 2번 교향곡은 제가 아무런 사전 지식 없이 들은 첫 클래식 음악이었습니다. 그런 만큼 오히려 감동은 신선했고 다른 사람의 의견에 음악을 덧씌우는 일 없이 순수한 흰 도화지에 내가 받은 느낌을 오롯이 그린 느낌이었습니다. 음악이 끝난 뒤 저는 음악대사전을 끌어당겨 시벨리우스가 누군지 찾아보았습니다. 그리고는 무릎을 치며 저의 무식을 한탄했습니다.

“세상에! 이렇게 훌륭한 음악가를 아직 모르고 있으면서 음악을 듣는다고 설쳐댔다니!” 하며 부끄러움으로 혼자 얼굴을 붉혔습니다.

시벨리우스는 핀란드를 대표하는 작곡가이자 바이올리니스트일뿐더러 핀란드 사람들이 영웅으로 추모하는 인물이었습니다. 핀란드의 민족음악의 특징을 살려 민족적 정서가 짙은 곡들을 독특한 선율과 리듬으로 그려내서 러시아의 폭정 밑에 시달리던 자기 민족에게 힘과 위로를 불어넣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교향시 ‘핀란디아’가 바로 그런 음악이었습니다.

이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남긴 ‘D 단조 바이올린 협주곡’은 멘델스존이나 차이콥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만큼이나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곡이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가 7곡이나 되는 훌륭한 교향곡을 작곡해서 베토벤 이래 최고의 교향곡 작곡가라는 칭송을 들었으며 그중에서도 2번 교향곡이 가장 뛰어나다고 했습니다.

그가 쓴 7개의 교향곡이 모두 뛰어나지만 특히 2번에는 핀란드 전원의 색채가 짙게 배어있고 민요조의 리듬이 많이 들어가 있어 시벨리우스의 `전원교향곡’이라 불리기도 한다는 사실도 알았습니다. 특히 이 곡 전체에 흐르는 어딘지 어둡고 침통한 분위기는 바로 주변 강국에 항시 압박받는 민족의 아픔을 그리고 있기에 비슷한 상황에 있었던 우리 민족의 정서와 맞아떨어졌기에 이 곡을 처음 들으면서도 낯이 익게 들렸던 것입니다.

표지 사진만 보고 고른 음반이 최고의 명반이라니!
88년 어느 겨울 저녁에 만났던 음반은 이렇게 저에게 지구 저편의 위대한 음악가 ‘시벨리우스’와 그의 음악을 알려주었습니다. 그 뒤로 저는 그의 독특한 음악의 세계에 빠져들어 그의 애호가가 되었습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John Barbiolli가 Royal Phioharmonic을 지휘한 연주가 이제까지의 시벨리우스의 교향곡 2번 연주 중 가장 뛰어난 연주이고 이 연주를 담은 제가 표지만 보고 고른 음반이 최고의 명반이라는 사실입니다.

어느 날 꽤 권위 있는 음악 잡지에 나온 기사에서 이 사실을 확인하고 저는 혼자서 한참 웃었습니다. 그러면서 ‘앞으로 음반을 고를 때는 무엇보다 표지 사진이 멋진 것으로 골라야겠군,’이라고 혼자 흥얼거렸습니다.

화요음악회에서는 물론 이 명반으로 시벨리우스의 교향곡 2번을 감상했습니다. 오늘 저의 이야기를 들은 화요음악회회원 모두도 즐거운 마음으로 이 명 연주 명 음반을 감상하셨을 것입니다.

이날 같이 본 하나님 말씀입니다
“주는 나의 은신처이오니 환난에서 나를 보호하시고 구원의 노래로 나를 두르시리이다 (셀라) 내가 네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시편32편7-8절)

핀란드를 비롯한 약소국가들은 항시 주변 강대국들에게 압제당합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럴 때 우리를 보호해 주시고 구원해 주실 분은 오직 하나님뿐입니다. 그분에게 의지할 때 우리에게 갈 길을 가르쳐 주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도 이 어렵고 힘들 때 하나님을 은신처로 삼고 가르침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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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찬
서울 문리대 영문학과를 졸업, 사업을 하다가 1985년에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태어났다. 20년간 키위교회 오클랜드 크리스천 어셈블리 장로로 섬기며 교민과 키위의 교량 역할을 했다. 2012년부터 매주 화요일 저녁 클래식음악 감상회를 열어 교민들에게 음악을 통한 만남의 장을 열어드리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