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12년간 또래들과 같이 예배드리다가 고등부를 졸업하자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새해 1월 첫 주에 대예배 오자 깜짝 놀란 것입니다.
“어? 목사님이 아직도 계시네?” 찬양은 200년 넘은 찬양을 아직도 하고 있습니다. 설교는 거룩한 목소리(?)로 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옆에 누가 있습니까? “엄마? 오랜만이에요. 어? 아빠도 오랜만이에요”
20년간 따로 예배드리다가 어른들만 있는 예배에 오니까 애들이 어려운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이 데모를 시작합니다. “우리도 따로 예배드리게 해 주세요.”
그래서 대학부, 청년부가 생긴 것입니다. 이쯤 되니 어른들도 우리도 따로 모임 하자고 요청합니다. 이른바 남전도회, 여전도회가 생깁니다.
이제 누가 남은 것 같습니까? 어르신들도 기분 나쁘신 것입니다. 그래서 투서를 내셨습니다. “담임목사님, 실버 사역이라고 들어보셨나요?” 손주 같은 젊은 목사가 와서 1년에 두세 차례 효도관광 보내드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또한 대학 졸업 후 결혼을 바로 하지 않는 청년들은 어른예배 가기 싫은 것입니다. “직장인들만 모이는 부서 만들어 주세요.” 그래서 2청년부가 만들어집니다.
그런데 이들이 어른예배 안 가려고 버티고 버티다가 결혼을 합니다. 이렇게 요구합니다. “갓 결혼한 우리끼리 하게 해 주십시오.” 이렇게 3청년부, 신혼부부 부서가 생겼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어떻게 하든 또래끼리만 있고 싶은 것입니다. 어른들과는 따로 있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청소년을 정의하는 기준이 늘어가게 되었습니다.
요즘 사회학자들은 청소년의 나이를 30대 초반까지로 봅니다. 이를 ‘연장된 청소년’이라고 합니다. 실제로 30대 초반은 청소년입니다. 부모로부터 독립되어 있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할지에 대해 확정되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태아 부서도 있는 거 아십니까? 임산부들만 따로 모여있습니다. 뱃속에 아이들이 들어야 할 메시지가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점점 더 ‘따로따로’ 모이는 것입니다. 하긴 쌍둥이들도 세대 차이를 느낀다는데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원래는 하나의 교회, 하나의 가족공동체, 하나의 마을이었습니다. 이런 공동체에 자꾸 다리가 생기게 된 것입니다. 청소년부, 어린이부서, 유치부, 유아부, 영아부, 청년부, 대학부, 장년부 등등입니다. 예배도 1부, 2부, 3부, 4부, 5부, 6부로 나누어 드립니다. 3부 예배 드리던 분이 사정이 있어서 5부 예배 가보면 완전히 어색하고 다른 교회 같다고 합니다.
문제는 문어 다리가 발달하고 전문가가 세워지고 사역이 세분화되다 보니까 좋긴 좋은데, 다른 다리가 무슨 일을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한 가족, 한 공동체라는 개념 없이 각 부서들이 알아서 서바이벌하는 형태가 된 것입니다. 뇌가 없고 다리만 남은 형국입니다. 이것이 바로 ‘짝귀 미키마우스’와 ‘뇌 없는 문어’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러면 2천년 역사 속에 없었던 부서들, 60년 밖에 되지 않은 부서들을, 성경에도 없는 조직이니 다리를 다 잘라 버리면 될까요? 이게 답일까요?
아닙니다. 자르면 남는 게 없습니다. 그리고 그 다리라도 남은 것이 누구 때문입니까? 자신의 삶을 내던지고 자기 주머니를 열어서 길거리에 나가서 예수 모르고 살던 아이들에게 복음 전했던 그 사역자들과 교사들의 헌신과 눈물 때문 아닙니까?
아예, 대가 끊어져 버릴 위기에서 다음 세대를 일으켜 세운 사람이 누구냐는 말입니다. 우리가 문어라고 생각한 저 다리가 교회를 지탱해 온 것입니다.
부서 사역은 지난 60년간 무너져가던 교회를 다시 살리신 하나님의 기적적인 섭리의 역사라고 믿습니다. 주일학교 사역자들의 숱한 헌신과 눈물과 땀방울로 여기까지 오게 된 줄 믿습니다.
우리 부서들을 응원해 주셔야 합니다. 비록 부서의 형태가 원안은 아니지만 대안이 되도록, 늘 계신 기도의 자리에서 교육부서를 위해 눈물로 기도해 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그런데 제3의 생명체 때문에 우리 주일학교 부서 사역이 큰 위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그 제3의 생명체가 부서 사역으로 하여금 맥을 추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이 제3의 생명체에 대해서는 다음에 나누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