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노매드랜드’를 만나다

글_김봉조 목사<세계선교교회> 사진 출처_영화<로매드랜드>,

“떠난 이들을 기억하며 언젠가 다시 만나기를”

이번 93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감독상, 촬영상, 여우주연상 등 주요 4개 부분을 수상한 클로이 자오 감독의 ‘노매드랜드(Nomadland)’는 2017년 화려한 자본주의에 가려져 고정된 주거지 없이 자동차에서 살며 저임금 떠돌이 노동을 하는 사람들의 삶을 묘사한 저널리스트 제시카 브루더(Jessica Bruder)의 ‘노매드랜드-21세기 미국에서 살아남기’를 원작으로 한 영화이다. 필자 역시도 21세기 뉴질랜드에서 성도로 살아남기 위해 하루하루의 삶을 버티며 살아간다.

영화는 “2011년 1월 31일, 석고보드 수요 감소로 인해 미국 네바다 주 엠파이어(Empire) 시에 있던 88년 된 US 석고(U.S. Gypsum) 공장이 폐업했고, 우편 번호 89405 사용이 중지되었다”는 자막으로 시작되어 마지막 장면도 “떠난 이들을 기억하며 언젠가 다시 만나기를”이란 자막으로 끝이 난다.

이는 마치 석고 공장의 폐업으로 자신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그곳에 살았던 많은 사람들의 몰락과 자신들이 정착했던 곳을 떠나야만 했던 사람들을 위한 마지막 배려임을 보여주는 설명처럼 보인다.

실버 펀은 마오리 말로 퐁가라 하며 밤길 인도해 줘
프란시스 맥도먼드(Frances McDormand)가 연기한 펀(Fern: 씨앗을 뿌리지 않고 포자를 퍼트려 번식하는 양치식물로 한 군데에 정착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떠도는 주인공의 운명을 암시하는 이름으로, 또한 실버 펀은 마오리 말로 퐁가(Ponga)라 하며 어두운 밤길에 야광 빛으로 귀향하는 이의 길을 안내하는 뉴질랜드의 대표적인 상징 식물로 주인공의 새로운 삶의 길을 인도하는 이름으로도 해석이 가능하다)은 한때 광산에서 석고를 캐는 광부였던 남편 보가 암에 걸려 죽고 자신이 속한 도시의 파산으로 결국 홀로 남겨지게 되어 선구자(vanguard)란 이름의 밴(Van) 한 대에 몸을 의지해 떠도는 노매드(nomad. 방랑자)의 삶을 선택한다.

영화는 그 여정 가운데 만나는 만남들을 담담하게, 그러나 미국 서부의 황량하고도 광활한 풍광을 인간의 내면적인 성찰과 더불어 서정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영화는 거대 물류회사인 아마존이 유목민들에게 일을 제공하는 프로그램인 아마존 캠퍼 포스(Camper Force)에서 린다 메이를 시작으로 시한부 선고를 받았지만 치료를 포기하고 알래스카로 추억을 찾아서 떠난다는 스완키, 아들의 자살로 그 고통을 견뎌내기 위해 어려운 사람들을 도우면서 자신의 상처를 치유해 가는 밥 웰스 등,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 감당할 수 없는 어떤 절망과 상실로 노매드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을 만나가며 그녀 또한 진정한 노매드의 삶을 시작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영화 비평가들은 이 영화를 주로 2008년 버블 경제 붕괴 이후 미국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과 삶의 터전을 잃고 떠도는 사람들을 표현한 사회학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기도 하며, 혹은 각자의 사람마다 자신만의 안식처(Home)가 있음을 말하면서 삶을 대하는 태도와 인간 내면의 세계를 성찰하는 시선으로 영화를 평하기도 한다.

개인적으로 영화를 보기 전 영화 제목으로 인해 어떤 영화인지 관심이 많이 있었다. 몇 년 전에 읽었던 배경락 목사의 ‘성경 속의 노마드’라는 책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베드로서를 나그네 신학이라는 관점에서 성서학적 주석보다는 인문학적으로 재해석하여 흥미 있게 읽었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최근 들어 인터넷 매체를 통해 여러 방면에서 ‘노마드’라는 단어를 합성한 신조어들이 들려오기 때문이기도 하다.

인터넷을 통해 찾아본 노마디즘(Nomadism)의 정의는 특정한 방식이나 삶의 가치관에 얽매이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자아를 찾아가는 것을 뜻하는 말로, 살 곳을 찾아 끊임없이 이동하는 유목민(노마드, Nomad)에서 나온 말로 유목주의라고도 한다.

프랑스의 철학자 질 들뢰즈(Gilles Deleuze)가 1968년 발표한 <차이와 반복>이라는 저서에서 처음 철학용어로 쓰이게 되었고, 기존의 가치나 철학을 부정하고 새로운 것을 끊임없이 찾는 것을 뜻하며 학문적으로는 여러 분야를 넘나들며 탐구하는 것을 뜻한다.

현대 사회의 문화와 심리 현상, 수학, 경제학, 신학 등 여러 분야에도 사용되며 얼마 전부터 인터넷 접속을 전제로 한 디지털 기기(노트북, 스마트폰 등)를 이용하여 공간에 제약을 받지 않고 재택·이동 근무를 하면서 자유롭게 생활하는 사람들을 일컬어 디지털 노마드, 혹은 잡 노마드라는 신조어가 생겨나기도 했다.

이에 상반되는 개념으로 일정한 곳에 자리를 잡아 붙박이로 있거나 머물러 사는 삶을 가리켜 ‘정착화’라 하며 많은 사람들은 안정된 삶으로 한 곳에 정주하는 고정화된 삶을 추구한다. 때문에 이민자 사회에서는 정착 서비스업이 활발하다.

이런 정착을 추구하는 현상은 마치 범죄한 가인이 유리하는 자가 되었지만 에녹성을 쌓고(창세기 4:11), 하나님의 심판 이후에 흩어짐을 면하기 위해 바벨 탑을 건설하는(창세기11:4) 현상과 같은 것으로 생각 할 수 있다.

“I’m not a homeless. I’m houseless”
영화에서는 인간들의 정착화 혹은 고정화를 벽돌과 나무로 이루어진 집(House)으로 그 모티프를 설명한다. 스포츠 매장에서 마주친 소녀가 펀에게 “홈리스라면서요?”라고 물었을 때 홈리스(Homeless)가 아니고 단지 하우스리스(Houseless)일 뿐임을 말하며 그 둘 사이에는 차이가 있음을 강조한다.

개인적으로 가장 의미 있는 대사로 이 땅의 성도들과 나누고 싶은 부분이다. 영원한 본향(Home)을 향해 가는 성도들에게 현재의 집(House)은 더 이상 그 의미를 상실한다(물론 이는 영화 제작자와 감독의 의도는 아닐 것이다).

대부분의 인간들은 자신들이 체험하지 못하고, 다 알아낼 수 없는 어떤 신에게 종속되어 있는 존재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부정하고 싶어 한다. 솔직히 신이 아니더라도 자아의 객체로 서 있기를 원하지 누군가에게 종속되는 것을 참지 못한다.

그래서 시간이 흐를수록 많은 철학과 사상 그리고 문화들이 신을 부정하는 양상을 나타낸다. 기독교적으로 이야기하면 하나님 절대 의존적 존재가 하나님을 부정함으로 자신의 안녕을 스스로 챙겨야 하기 때문에 손에 잡히고 눈에 보이는 형상의 우상, 즉 세상을 만들어 내는데, 영화는 그것을 전통적 의미의 집(House)으로 설정해 놓은 것으로 해석해 보았다.

반면에 베드로전서에는 집에 대한 성경적 모티프가 많이 나타난다. 기독교 초기에 교회는 사회 경제 그리고 정치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에게 안전과 소속감, 그리고 연대할 수 있는 ‘무형의 집(Home)’을 제공해 주었다.

성경은 그 집을 ‘신령한 집’(2:5), 하나님을 모신 ‘하나님의 집’(4:17)으로, 그리고 그 집에서는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시며(1:3, 17), 동료 성도들은 순종하는 자녀요(1:14), 형제자매(1:22; 3:8; 5:12)가 되는 가족 공동체임을 알려주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 당시의 세상으로부터 억압을 받을 때, 고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다른 가족에 속해 있음을 알려 준다. 그리고 그 집에서 그리스도인들은 함께 세워지고 ‘하나님이 기쁘시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들이 됨’(2:5)을 일깨워 준다.

베드로서의 저자는 이처럼 ‘집’과 ‘가족’의 개념을 반복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세상의 소외와 반목을 극복할 대안으로 신앙 공동체 안에서의 집(Home)으로의 연대감을 강조한다.

개인적으로 영화를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면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만 살 수 있는 인간이 하나님을 벗어나 스스로 살아가기 위해 자기들의 이성과 지혜와 깨달음을 근거로 하여 규칙과 질서를 만들고 법을 만들어 놓은 것이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이고 그러한 세상에 잘 적응해 사는 사람을 우리는 흔히 ‘성공했다’ 혹은 ‘잘산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인간들 스스로가 정해놓은 질서를 지키고 그 안에서 사는 삶을 정상적인 인생이라 칭하며 살아가는데 성도는 그 세상이 정해 놓은 질서를 거부하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의 질서인 선과 악을 찾아 나서는 것이 이 땅의 성도의 삶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그리스도인들이 노매드의 길에 있어야 할 본분을 망각하고 ‘정착’ 또는 ‘정주’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이다. 때문에 가끔은 하나님의 백성이 없는 하나님 나라를 생각해 보기도 한다.

벼랑 끝에 서서 바람을 맞으며
성도로서 노매드의 여정은 내가 완전히 몰락했을 때, 성경의 언어로는 자기 부인을 동반한 십자가의 죽음에서 비로소 시작한다. 이는 마치 영원할 듯한 엠파이어(제국) 시의 몰락과 사랑하는 남편의 죽음으로 펀의 이야기가 시작하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영화 속의 대부분의 노매드들의 길도 벼랑 끝에서 시작된다. 밥 웰스의 모습도 이와 겹쳐진다. 그는 사랑하는 아들이 5년 전 자살함으로, 그 아픔의 벼랑 끝에서 자신이 깨달은 바는 그러한 그가 사람들을 돕고 섬김으로 아들을 기릴 수(Honor) 있다는 것이고, 바로 그 깨달음이 자신이 힘든 나날을 헤치고 살아갈 수 있는 이유임을 말한다.

자신이 노매드의 삶을 사랑하는 이유는 마지막 작별 인사가 없기 때문이라고 말하며, 언제가 될 지 모르지만, 자신은 아들을 다시 만나게 될 것을 기대한다. 그가 기독교인지 영화는 말하지 않지만 한 인간으로서의 깊은 상실감과 고뇌의 삶을 통해 인간 내면의 깊은 성찰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펀을 좋아하던 데이브는 아들의 권유로 아들 집으로 가서 정착하게 되고, 어느 날 방문한 펀에게 곁에 있고 싶다며 함께 살자고 간청한다. 하지만 펀은 정착하지 않고 다시 길을 떠나고, 서부 해안가의 벼랑을 거닐며 두 팔을 벌리고 서 있는 모습은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이다. 마치 강풍에 높이 날아오르는 한 마리 새처럼, 자유로운 노매드의 영혼의 모습을 보여 주는 듯하다.

펀이 길 위에서 만난 노매드들의 떠도는 삶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방랑자의 그것처럼 자유롭고 낭만적이지 않다. 캠핑장에서 청소를 하고 아마존 공장과 건설 현장에서 일을 하지만 이미 경제력을 상실한 ‘길 위의 삶’은 결핍으로 가득하다. 식사도 잠자리도 생필품도 부족하거니와 추위와 강도의 위험은 삶과 죽음의 경계도 허물어 버린다.

그러해도 그렇게 새로운 길로 내몰린 삶은 그동안 미처 생각하지 못한 또 다른 가치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어 서로가 서로에게 위로와 격려함으로 힘들고 어려운 자신들의 삶을 만족하며, 무엇이 진정한 풍요이며 의미 있는 삶인지를 묻는 영화를 통해서 이 땅에서의 성도의 삶도 그러하리라는 생각을 한다.

이러한 성도의 시작을 성경이 증거하기를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하면서 이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히브리서11:8-13)’한다.

또한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빌립보서3:20)’라는 바울 사도의 외침은 집(House)이 아닌 영원한 본향(Home)이 바로 우리가 궁극적으로 관심을 두고 살아가야 할 대상이라는 점을 분명히 알려 준다.

Nomad에서 Pilgrims으로
역사를 통해 볼 때 기독교 공동체는 모든 종류의 주변 문화 가운데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특별한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언제나 세상으로부터 공격을 받아왔고 외면을 받았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때문에 많은 신약 성경이 믿음 때문에 고난과 배척을 당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해 기록되었고 그러한 적대적 환경 속에서도 성경의 저자들은 세상과 단절하거나 폐쇄적인 삶이 아니라, 택함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분명한 정체성을 가지고 구성원들에 대해서는 깊은 사랑과 유대감을 갖고, 세상에 대해서도 악으로 갚지 말고 오히려 그들이 칭송할 만한 선행을 보이라고 촉구한다.

그러나 같은 단어이지만 성경 속의 ‘나그네’ 개념은 세상의 ‘나그네’와는 구별되어야 한다. 그들 둘 모두 이 땅에 살아야 할 분명한 이유와 목적의식을 가지고 사는 존재임을 보여준다. 심지어 살아가는 삶의 형태도 거의 같아 보이기 까지 한다.

영화 속의 펀은 아픔과 상실로부터 자신을 찾아 진정한 자아를 발견해가는 여정이지만 성경의 나그네는 자신을 떠나서 하나님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똑같은 상실과 절망을 통해 하나님의 시간,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자신이 이 땅에 태어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할 ‘거룩한 나그네’임을 밝히 드러내는 것이다.

이러한 존재 인식을 가지고 사는 ‘나그네’를 킹 제임스 번역 성경(KJV)에서는 ‘순례자(pilgrims)’-히브리서11:13, 베드로전서2:11-로 번역하고 있다. 그래서 성도의 노매드는 순례자의 삶으로 불려져야 더 정확할 듯하다.

이 땅의 성도는 세상 어디를 가든 자신의 집(Home)이 되는 유목민의 개념으로 이 세상 전체가 그들의 땅, 즉 노매드랜드(Nomadland)가 되는 것으로 21세기를 살아가야 하는 의미로 해석해 볼 수도 있겠다. 그리고 그러한 그들에게 나도 인사를 전하고 싶다. “See you down the road.”

마지막으로 펀이 자신의 결혼 서약 때 읊었던, 위스컨신에서 온 젊은이에게 고향에 있는 여자친구에게 편지 쓸 때 사용하라고 알려준 시 ‘그대를 여름날에 비할까? / 아니, 그대는 여름보다 더 사랑스럽고 부드러워라‘는 셰익스피어의 소네트 18번이다.

영화를 보고 나서 내내 계속해서 머리 속에서 맴도는 노래 가사는 이글스(Eagles)의 ‘데스페라도(Desperado)’의 ‘ Your pain and your hunger, they’re drivin’ you home / And freedom, oh freedom well, that’s just some people talkin’ / Your prison is walking through this world all alone’과 박인희 가수의 ‘방랑자’의 ‘마음의 님을 따라가고 있는 나의 길은 꿈으로 이어진 영원한 길’이란 노랫말이다.

이전 기사416호 크리스천
편집자
크리스천라이프 편집자입니다. 글에 관련된 사항은 edit@christianlife.nz 으로 이메일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