픽톤 여행기 <2>

페리 선착장 맞은편 쪽 바닷가에 있는 의자에 앉아서 배가 들고 나는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하루 종일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큰 페리만 한 배만 가는 게 아니라, 근처 학생들이 들고 가 바다에 띄우고 여러 명이 일렬로 타고 노를 저으며 훈련하는 가늘고 긴 조정 배들도 있고, 항구에서 출발하는 여러 가지 액티비티로 water 택시나 크루즈, 또 낚시하는 배들도 수시로 들락거리기도 합니다.

한참 그렇게 앉아 있었더니 이제 배가 고프네요. 그리고 참, 픽톤에는 왜 그런 이름을 붙였는지 모르지만 길 이름들이 다른 도시 이름으로 되어진 데가 많더라고요. 예를 들면 페리에서 내려 바로 나오면 오클랜드 스트리트, 내가 묵고 있는 숙소가 있는 데는 웰링턴 스트리트, 거기를 가로지르는 데는 더블린 스트리트, 메인 광장은 런던 Quad, 그런 식으로 이름을 붙였더라구요. 웰링턴 스트리트에 있는 숙소에 가서 점심을 먹어야겠네요.

바닷가에 있는 카페에 들러서 커피 한잔 마시고 슈퍼마켓에 들러서 이것저것 시장을 봅니다. 과일 좀 사고, 거의 조리가 된 연어 한 조각도 사고, 달걀 몇 알과 샐러드와 내일 아침에 먹을 빵도 삽니다. 탄산수도 한 병 사고 집으로 올라갑니다.

사람들은 왜 혼자 여행을 하냐고 하지만 혼자서 여행을 하는 건 이런 거죠. 자리에서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고, 들어가고 싶으면 쓱 들어가서 원하는 걸 시켜 먹고, 뭘 먹을까 어디 갈까 쉬었다 갈까 누구와 의논하거나 의견을 조율하거나 하지 않아도 되니까요. 물론 서로 조금씩 배려하면서 함께 즐거운 걸 찾아가는 것도 좋겠지만 말입니다.

오후엔 어느 코스로 걸어 볼지 찾아봅니다. 바닷가 앞에 작은 광장에는 식당도 있고 카페도 있지만, 오늘 저녁엔 밥도 하고 시장에서 산 연어도 데워서 집에서 먹으려고 합니다. 그 전에 하버 뷰 포인트를 다녀오는 코스로 두 번째 트래킹을 다녀오려구요. 신이 나요. 이 여행을 계획할 때, 픽톤에 가고 싶어서 이렇게 온 건 아니었어요. 페리를 타고 바다를 건너 남섬에 가고 싶었을 뿐이죠.

렌트카 해서 넬슨에 갈까? 아니면 바닷길을 따라 기차 타고 크라이스트처치에 갈까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뭔가 여의치 않기도 하고 페리 한 번 더 타고 싶기도 해서 픽톤에 그냥 있기로 한 거거든요. 그런데 생각보다 이곳은 너무 아름다운 곳입니다. 픽톤에 가려고 산 넘고 물 건너는 게 아니라 산 넘고 물 건너갔더니 거기가 픽톤인 그런 셈입니다. 페리가 닿는 곳이니 바다가 있을 것이고 바다만 있으면 좋겠다 그걸로도 좋겠다 하고 왔지만 이곳은 그 이상의 즐거움과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곳입니다.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뜻밖의 감동과 기쁨을 만나는 건 더 고맙고 더 놀랍습니다. 항구에서 출발하는 아주 다양한 크루즈와 배들이 있습니다. 픽톤에서 시작되는 바다 안쪽 해안선을 퀸 샬롯 사운드라고 하는데요. 거기를 구경시켜주는 water 택시나, 또 얼만큼 가서 낚시를 하기도 하고, 또 어떤 섬에 들러 산책도 하고 쉬다 다시 돌아오는 그런 투어 코스도 있더라고요. 다음에 꼭 와서 해보고 싶습니다.

옛날부터 배가 내리고 물류가 활발한 동네는 굉장히 부유해지고 또 비대해지는 그런 경향들을 보이잖아요. 그런데 픽톤은 그렇지 않은 것 같아요. 여전히 작고 여전히 소박합니다. 너무 움켜쥐고 있지 않은 것 같아 좋습니다.

다른 도시 이름을 길 이름으로 지은 것처럼 이 길 따라서 어디로든 갈 수 있습니다. 이곳에서 출발하는 기차 타고 크라이스트처치까지 갈 수도 있고, 도시와 도시를 연결하는 인터버스를 이용해서 근처 블레넘이나 넬슨에 갈 수도 있구요. 아니면 차를 가지고 페리를 타고 북섬에, 또는 남섬 아래쪽으로 더 멀리 갈 수 있기도 합니다. 픽톤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타고 내리는 페리와 기차역이 있는 곳이지만, 또 그만큼 다른 곳으로 많이 보내기도 하는, 그래서 더 조촐하고 단순한 그런 곳입니다.

오후에 가려는 트레킹 코스는 하버 뷰를 볼 수 있다고 하는 트레킹 코스입니다. 오전에 갔던 데 보다는 조금 길고 산길이 많은 코스인데요. 여기는 한참을 걸어도 바다는 보이지 않고 점점 울창한 숲길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렇게 한참 올라가다 보면 작은 봉우리 정상에 올라서게 되고, 거기서 맞은편으로 하버가 내려다보입니다. 해질 때에 거기서 본 하버 뷰는 근사했습니다. 너무 어두워지기 전에 내려가자 싶어 서둘러서 돌아왔더니 땀도 좀 나고 다리도 뻐근합니다.

오늘 하루 25,000보 걸었다고 휴대폰에 나오네요. 이제 집에 들어가서 저녁을 먹어야겠습니다. 냄비 밥도 하고, 시장에서 사 온 연어도 데우고, 샐러드도 준비해서 식탁에 차려 놓고, 좋아하는 음악을 틀어놓고 저녁을 먹습니다. 오늘 밤 지나고 나면 내일은 아침에 체크아웃하고 집에 가는 날입니다. 아쉽네요.

세 번째 날입니다. 처음 이 집에 처음 들어왔을 때처럼 집을 정리하고 숙소 주인에게 인사 문자를 남기는 것으로 체크아웃을 합니다. 골목 끝에 보이는 바다에 내려갑니다. 근처에 있는 카페에서 커피 사 들고 나와 바다 더 가까운 데 앉아서 오른쪽 위에 떠 있는 태양이 쏘는 햇살에 반짝이는 바다를 봅니다. 은빛 가루를 뭉텅이로 쏟아 놓는 것처럼, 호수 같은 그 바다는 튀듯이 반짝입니다. 요정 팅커벨이 뿌려준 그 은가루를 머리에 많이 맞으면 날 수 있는 것처럼 바다는 그렇게 하늘로 날아가듯이 이어져 갑니다.

아주 느긋한 아침 시간을 보내고는 웰링턴으로 가는 페리를 타러 갑니다. 이번에 타는 배는 어렸을 때 보던 드라마 ‘사랑의 유람선’에 나오는 것처럼 생겼네요. 이 배에는 맨 꼭대기에 뷰잉 데크가 있어서 여기저기 기웃거리지 않고 바로 그리로 올라갔습니다. 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바람이 너무 무겁게 문을 밀고 있어서 열 수 없을 정도입니다. 페리에는 창문이 많아서 실내에서도 바다가 잘 보입니다. 그래서 다들 창가 쪽 의자가 먼저 채워지게 되거든요.

그런데 정작 여기에 올라와 보니 창문을 통해서 보는 바다와는 차원이 다른 바다가 보입니다. 그리고 바람이요. 바람맞는 걸 진짜 좋아하는데 이런 흡족하게 거센 바람 언제 맞아 봤나 싶은 그런 바람입니다. 의자도 있지만 난간에 기대어 온몸으로 바람을 맞으며 바다를 봅니다. 병풍처럼 둘린 말보로 사운드 숲도 보입니다.

픽톤으로 들어갈 땐 깜깜해서 전혀 볼 수가 없었는데, 얼마나 깊고 긴지 운행 시간의 절반 정도는 그 말보로 사운드를 빠져 나오는 데 쓰입니다. 말보로 사운드 끝이 보이고, 그 너머에 아무것도 없는 그야말로 광대한 바다가 탁 보일 때 기가 막힙니다. 말보로 사운드를 빠져 나오는 길도 너무 멋지고 신기합니다. 그런데 마지막 포인트를 빠져 나와 사방으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바다로 나올 때, 속이 시원하게 뻥 뚫리는 것처럼 좋습니다.

그렇게 한참 뷰잉 데크에 있으면서 원 없이 바다를 보고, 충분히 바람맞고서야 실내로 들어옵니다. 그리고는 이번 여행을 마무리합니다. 집으로 오면서 벌써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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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소영
서울여자대학교 원예생명조경학과 졸업, 은총교회 권사. 리테일 숍에서 풀타임으로 일하고 있으며. 마음에 품은 소원 잊지 않기와 여행이나 소소한 일상에서 작지만 반짝이는 걸 찾아 내 글로 쓰고 싶은 보통 사람, 아님 보통 아줌마로 이젠 할머니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