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가 서로의 구원이 되기 위해’ 미국으로 간 한국인 이민자의 삶 다뤄
영화 <미나리 Minari>는 2020년 개봉한 미국의 드라마 영화로, 정이삭 감독이 감독과 각본을 맡았다. 2020년 골든 글로브에서 외국어 영화상을 수상, 제93회 아카데미에서 작품, 감독, 각본, 음악, 여우주연상, 여우조연상 후보에 올랐으며 여우조연상(윤여정) 수상작이다.
표면적으로 <미나리>는 1980년대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서로가 서로의 구원이 되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간 한국인 이민자의 삶을 다각도로 조명한 영화처럼 보인다. 그러한 이유에서인지 두드러지진 않지만,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이방인의 모습과 그럴수록 삶에 대한 절박함이 영화 전반에 옅게 깔려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하지만 다른 많은 좋은 영화들처럼 관객이 어디에 서 있느냐에 따라 각기 다른 목적지에 도달하는 영화이기도 하다.
이 글은 영화에 대한 서평이 아니라 성경에서 말하는 가정의 의미를 영화에 나오는 장면이나 대사를 통해 재해석하고자 한다. 다소 무리한 비약이 있을 수 있다.
인적 하나 없는 우거진 잡초 사이로 난 도로를 가로지르는 차 안에서 남편 제이콥(스티브 연)은 들뜬 듯 즐거운 기색이지만 아내 모니카(한예리)의 얼굴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당황해하는 듯한 얼굴을 스치듯 보여주며 영화는 시작된다.
이윽고 도착한 너른 풀밭 위에 덩그러니 놓인 바퀴 달린 낡은 컨테이너 집을 보며 “이곳이 지금부터 우리가 살 집이야”, “우리가 약속했던 건 이런 게 아니잖아”라는 부부, 그리고 남편은 아무것도 없는 드넓은 풀밭에 농장을 지을 거라며 이곳이 우리의 미래라고 말하지만, 아내는 아이들에게 이곳에선 오래 있지 않을 거라는 각기 다른 곳을 바라보는 부부의 대사는 서로의 왜곡된 목적지를 보여 준다.
곧이어 폭풍우 치던 밤, 부부는 태풍에 행여 집이 날아갈까 불안에 떨지만, 누나 앤과 동생 데이비드에겐 부모의 다툼이 천둥소리보다 더 무서웠던 밤으로, 급변하는 삶의 변화로 인한 불안함과 환경에 대한 부적응을 보이는 그렇게 그러한 삶을 온몸으로 고스란히 겪어 내는 가정의 모습을 영화는 보여 준다.
영적 훈련장으로서의 가정
성경에서 가정은 인간이 경험하는 최초의 공동체이다(창세기 1:26-28, 2:20-25; 마가복음 10:6-9). 가정 안에서 인간은 가장 근본적인 돌봄과 지지, 사랑을 경험하고, 삶의 살아갈 의미를 얻는다. 때문에 사람들은 가정 안에서 긍정적인 소통과 건강한 삶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수많은 현실의 가정은 영화 속 제이콥의 가정처럼 삶이 항상 긍정적인 방향으로 전개되지는 않는 듯하다.
오늘날 가정의 문제는 점점 더 다양해지고 복잡해지는 추세이다. 영화가 섣불리 보여 주지 못하지만 낯선 이민자의 땅에서 제이콥과 모니카는 딸과 아들을 낳고 희망을 좇아 삶을 이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타국에서의 생활이 순탄했을 리 만무하고 결국엔 자신들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 대도시 캘리포니아에서 아칸소의 변두리 어느 시골 마을까지 흘러 들어갔음을 암시적으로 말해 준다.
그러해도 이들의 가정이 무너지지 않고, 제이콥이 농장이란 단꿈을 꿀 수 있었던 것은 서로를 붙잡아주는 가족이 있었기 때문이다. 딸을 위해 자신이 마련할 수 있는 만큼의 비상금과 고춧가루, 멸치반찬을, 아픈 손자를 위해서는 한약을 챙겨 삶의 터전을 떠나 머나먼 타지로 달려와 준 노모, 무모한 꿈이라 생각하면서도 묵묵히 지켜봐 주는 아내.
어쩌면 <미나리>가 말하는 구원은 대단한 성공이나 안정보다도 함께 주저앉아 울어주고, 또 다른 내일을 기약할 힘이 되어주는 가족이 있는 가정을 의미하는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이들이 왜 여기에 있는지가 아니라, 함께 있음으로 인해 절망을 겪는 가족이 서로 끊어지지 않기 위해 서로의 언덕이 되어 주는 것이다.
하지만 애석(?) 하게도 천국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가정의 모습은 없다(마태복음 22:30). 그렇게 좋은 것이 가정이라면 천국에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반문해 보지만 주님은 천국에서는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이 없다고 말씀다.
그러해도 이 땅에 그러한 관계를 만들어 놓으시고 우리를 그 관계 속에서 살게 하셨을 때는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땅에서 성도가 살아내는 가정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신랑인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와 신부인 교회의 관계를 배우고 연습하는 훈련의 장이다. 성도는 에덴에서 출발하여 완성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만날 완전한 원형으로서의 새로운 가정을 기대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죽어야 사는 말(言)로 묶인(約) 가정
하나님은 ‘우리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자 하시고 자기의 형상대로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다(창세기 1:27). 즉 복수이시면서 단수이신 삼위 하나님께서, 절대로 떨어질 수 없는 사랑, 그 본질 그대로 생기를 불어넣어 만드신 존재가 바로 남자와 여자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원래 남자와 여자는 한 존재로 만들어졌다. 그리고 하나님이 아담을 깊게 잠들게 하시고 아담의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셨다(창세기 2:21~22).
성경에서 잠을 잔다는 것은 죽음의 메타포이다. 즉 하와의 탄생은 아담의 죽음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를 신약에서 바라본다면 신부인 교회의 탄생을 위해 신랑인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해석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결혼시키면서 ‘남자가 부모를 떠나 여자와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세기 2:24)라고 말씀하심으로 남자와 여자를 하나로 묶어 놓으신다.
이 때문에 성경은 결혼 관계를 언약(言約: 말의 묶음, 말로 맺음)으로 설명한다(잠언 2:17; 말라기 2:14). 따라서 하나님 앞에 언약으로 이해되는 결혼 관계 안에서 성경은 이 땅에서 성도들이 살아가는 가정생활의 실천적 원리와 방향을 제시한다.
그래서 지난 10여 년의 기간을 서로를 구원하기 위한 언약(결혼 서약)에 묶여 죽을 만큼 일하면서 아버지로 남편으로서 삶을 살아냈던 제이콥과 어머니로서 아내로 그리고 딸의 삶을 감당해 나가는 모니카가 더 애틋해 보이기도 한다.
영화 중반부에서 제이콥이 “아이들도 자기 아버지가 한 번은 꿈을 이루는 걸 봐야 하지 않겠냐?”고 절규하듯 끝내 도시로 가는 것을 거부할 때 그간 그가 겪었을 가장과 아버지로서의 책임감과 내적 고통을 짐작해 본다.
또한 농장을 이루겠다는 무모해 보이는 꿈을 실행해가는 남편을 응원하기도 하지만 현실적 문제를 되짚으며 “우리가 함께 있는 게 더 중요한 것 아니냐?”는 모니카의 응수와 결국 “내가 너무 지쳤어.”, “더 이상은 못하겠다.”는 그녀의 고백은 가정을 지키기 위한 그간의 시간을 말해 주는 듯하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영화 속 두 부부의 웃는 모습을 별로 볼 수가 없다. 특히 모니카의 어딘가 늘 불안해 보이고 슬픔과 아픔으로 경직된 모습이 그녀의 삶의 정황을 보여 주는 듯하다.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던 밤, 허름한 거실에서 온 가족이 서로 고단한 몸을 비비며 함께 한 덩이가 되어 껴안고 자는 장면은 가족의 근간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 됨을, 성도의 가족은 하나님의 언약이 그러하듯이 하나님의 은혜로 인치는 공간이며, 서로에게 은혜를 흘려보내는 기관임을 보여주는 가장 상징적인 장면으로 꼽아 본다.
영적 공동체로서의 가정
점점 많은 가정에서 서로가 서로를 구원해 주는 참된 구원의 은혜가 세상적인 ‘조건’이나 ‘수단’으로 변질되어 가는 것을 보게 된다. 결혼 혹은 가정은 절대 자신들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자기의 짐을 누군가와 함께 나누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님에도 너무나 많은 사람이 결혼에 대해 비현실적인 기대, 즉 환상을 갖고 있다.
그것은 영화 속에 흘러나오는 ‘사랑해 당신을’의 노랫말처럼 배우자와의 관계가 언제나 결혼 초기처럼 낭만적일 거라는 것과 심지어 낭만적인 사랑의 감정은 영원히 지속되리라는 환상이 있다. 진실로 사랑한다면 상대방에게 물어보지 않아도 원하는 것을 알 것이라는 기대, 사랑한다면 부부는 같은 방식으로 생각하고, 같은 정서를 느끼며, 같은 것을 원해야 한다는 엉뚱한 기대이다.
에베소서 5장은 가정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가장 명확하게 설명해 놓은 곳이다. ‘남편들아, 아내들아 서로 사랑하고 순종하라’ 이야기해놓고 이 이야기는 바로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한 것이라고 정확하게 그 가정의 의미를 밝히고 있다.
성경이 말하는 가정의 참된 의미는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인 우리가 한 몸이 되어 영원히 살게 될 그 하나님 나라의 본질을 배우며 완성해 나가는 실재하는 영적 공동체이다.
남편은 아내 사랑하기를 주님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것같이 목숨을 바쳐 사랑하는 것이고, 아내는 주님께서 하나님께 목숨을 바쳐 순종하신 것처럼 남편을 섬기는 것이다. 그렇게 정말 말 그대로 될 때 이 땅에는 천국과 같은 가정이 생기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정을 통해서 이 땅에서 하늘의 거룩을 연습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죄의 육신을 입고 있기에, 또한 타락한 본성이 남아 있기에 언제나 성공적으로 우리의 가정을 하나님 나라처럼 만들어 낼 수는 없다. 그러나 그러해도 그 실패가 우리를 하나님의 은혜의 장으로 이끌어 간다는 사실이 하나님의 언약이다.
남자와 여자가 꾸리는 가정은 태초부터 그리스도와 교회의 새 언약 관계를 반영하고 드러내기 위한 영원한 하나님의 작정 가운데 제정된 것이다. 때문에 언약의 가정은 현대 사회 가운데 복음을 삶으로 증거하는 “작은 하나님 나라(Little kingdoms)”를 기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이 빠진 부부생활, 가정생활은 허물뿐인 빈 껍데기에 불과하다. 겉으로는 행복해 보이고 모두가 인정하는 완벽한 가정이라 할지라도 그곳에 그리스도가 없다면 그들은 허상일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미나리를 기독교적인 가치관을 가진 영화라 평하기에는 다소 비약이 있을 듯하다.
삶이 무너진 속에서의 희망
영화의 마지막 부분은 최악의 상황으로 몰아간다. 제이콥 가정의 커다란 버팀목이었던 순자에게 뇌졸중이 찾아오고, 조금이라도 가족에게 도움이 되고자 했던 순자의 행동은 가족의 마지막 희망을 쌓아 놓은 수확 창고를 모두 불태워버린다.
우리는 모든 것이 태워지고 무너진 처절한 현실 앞에 하박국 선지자의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라는 심각한 신정론(Theodicy)의 물음을 던진다. 그리고 이 질문은 숨어계신 하나님의 정의를 찾게 되며, 그 가운데 주어진 희망으로 고통당하는 상황과 현실에 주저앉지 않고 좀 더 나은 세계를 향해 나아가게 한다.
그러기에 얼마의 시간이 흘러 이제는 우물 기술자(?)를 불러 새로이 농사를 시작하려는 제이콥과 모니카의 모습은 삶을 체념하거나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향해 온몸으로 일어섬을 알려준다.
그리스도 안에서 미래의 희망을 찾는 신앙은 ‘그리스도에 대한 전적인 순종 안에서 부활의 희망에 미리 참여함’을 의미한다. 곧, 신앙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뒤따르면서 생기는 고난과 절망을 스스로 짊어져야 하며, 완전한 절망을 의미하는 십자가가 ‘미래’의 영광임을 깨달아야 한다.
십자가와 부활 사건 안에서 드러난 성도의 희망은 ‘하나님의 의’가 알려주시는 생명의 미래로서, 최종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만물의 주인으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실 미래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이러한 희망을 삶의 고통 한가운데에서 발견하면서 맹목적인 낙관주의를 외치는 것이 아닌, 그것은 십자가에 죽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는 것이다.
어느 신학자의 ‘희망의 신학’을 지지하지는 않지만, “기독교 신앙은 세상 한복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만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한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신앙은 희망이 세워지는 근원이기 때문이다.”라는 그의 말은 일견 일리가 있어 보인다.
그의 말을 빌리면 이 땅에서 성도의 신앙은 현재와 미래 사이의 조화와 일치가 아니라 모순과 충돌, 그리고 절망과의 싸움 속에 서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러한 신앙의 희망을 ‘십자가의 모순’이라고까지 한다. 그러기에 기독교의 신앙은 세상 도피나 체념이나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것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제이콥이 아들 데이빗을 데리고 개울가로 내려가 순자가 심어 놓았던 무성하게 자란 미나리를 수확하는 장면으로 영화는 막을 내린다. 많은 평자는 이 지점을 남겨진 희망이라고 평한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이들의 상태는 혼자 잘 자란 미나리 그것밖에 남지 않은 상태이다.
개인적으로 순자가 심어 놓은 미나리를 이렇게 재해석해 본다. 제이콥 자신의 노력과 열심으로 거두어들인 희망은 타버리고 무너졌지만 다른 누군가에 의해 준비 되어진 희망만이 남았다는 것이다.
어쩌면 이 땅에서 성도들의 희망은 자신이 이루어놓은 열심과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준비 되어진 복음만이 남아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면 그 미나리에서 나오는 향은 바람 끝에 묻어나는 고향의 냄새라기보다 가슴 밑바닥에서 스며 나오는 희망의 냄새에 더 가까울 듯하다.
미나리의 OST 비의 노래 한 소절이다. 사는 동안 내가 그댈 못 잊어 / 이렇게 그댈 위한 노랠 부른다면 / 하늘에서 내린 나의 눈물을 본다면 / 날 떠올려줘요 내 사랑… 하늘에서 내린 나의 눈물을 본다면 / 날 떠올려줘요 내 사랑 / 잊지 말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