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에서의 낯선 삶에도

임봉학 목사<베트남 선교사 >

제2의 고향같이 정들었던 크라이스트처치에서의 삶을 뒤로하고 베트남을 새로운 사역지로 삼아 정착한지 벌써 1년 3개월여가 지나 이곳에서 새해를 두 번째 맞습니다.

26년 전 여행 가방 두 개로 시작한 뉴질랜드에서의 정착기를 떠올리며 맨땅에 헤딩하듯 온몸으로 부딪쳐온 시간입니다. 한동안은 공기마저 무겁게 느껴지는 더위와 거리를 가득 메운 오토바이 행렬에 길을 건너는 것조차 힘든 환경이 걱정되기도 했습니다.

이곳에서 오토바이는 필수적인 교통수단이어서 저희도 이제는 원하는 목적지를 찾아다닐 정도가 되었지만 사고의 위험 또한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시간이 지나며 안정적인 주거지를 얻고 점차 이곳 생활에 익숙해져 가지만 도로 위 위험한 상황에는 잘 적응이 되지 않습니다.

사회주의 국가이기에 느껴지는 보이지 않는 긴장감 또한 여기에서 접하는 낯섦입니다. 평소에는 크게 의식하지 못하지만 뜻밖의 장소에서 저희를 알고 있는 이들을 만날 때면 놀라움과 함께 경각심을 갖게 됩니다. 행동이나 사역에 지혜로운 접근과 주의가 필요함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저희는 이곳에 와서 4번 정도의 이사를 한 후 장기사역에 적합한 단독 집을 임대하여 지내고 있습니다. 집이 안정되니 여유도 생기고 현지인과의 만남도 용이한 상황입니다. 젊은이들과는 영어로 어느 정도 소통이 가능하지만 아무래도 그 만남이 제한될 수밖에 없어 현지인들과 원활한 의사소통을 위해 언어를 배우는 데 더욱 힘을 쏟고 있는 중입니다.

베트남에서의 생활
처음 하노이에 도착한 후 2개월여 북부에서 남부까지 베트남 전역을 답사 후 중부지역 “후에(HUE)”에 정착하였습니다. 이곳 후에는 1802년 베트남 왕조의 수도로 건설되었으며, 이후 1945년까지 응우옌(阮, Nguyen) 왕조의 정치•문화•종교적 중심지였습니다. 도시를 가로지르는 흐엉강(香江, Perfume River)은 잘 닦인 산책로와 주변 풍경이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 같은 여유로움이 있습니다.

고도의 흔적이 남아 있는 왕궁과 그 주변은 UNESCO가 지정한 세계문화 유적지여서 인구 40만 소도시지만 한때 왕도로서의 자부심으로 주민들은 대체로 보수적이고 자존심도 강한 편입니다.

또한 중부지역 명문으로 꼽히는 후에대학교에는 한국어문화학과가 12년 전 개설되어 해마다 우수한 학생들을 배출하고 있습니다. 저희는 후에 유일의 개신교회인 베트남 교회에서 소수의 한국 분들과 함께 정기적으로 예배에 참석하며 성도들과 교제를 나누고 있습니다.

소수의 한인들은 세종학당 교사와 코이카 단원들과 같이 단기간 파견 나온 분들이 대부분이며 일부 한국식당을 운영하거나 사업하던 분들은 코로나 19 장기화로 인해 대부분 한국으로 철수한 상태입니다.

이곳은 4월부터 더위가 시작되는데 연일 35도를 넘나들며 높을 때는 기온이 40도까지 올라가 숨이 턱까지 막히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베트남에서 낮에 걷는 사람을 보기 어려운 이유 중 하나가 이 지독한 더위와 따가운 햇빛 때문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학교나 직장은 아침 일찍 하루를 시작하여 오전 11시 30분부터 오후 1시 30분까지 2시간은 점심을 먹고 잠깐씩 낮잠을 자면서 쉬는 것이 일상입니다. 10월부터 시작되는 우기는 다음 해 1월까지 이어집니다. 우기에는 하루에도 몇 번씩 게릴라성 폭우가 쏟아지기에 외출 시 비옷을 챙겨야만 합니다.

작년 10월은 몇십 년 만에 찾아온 6번의 태풍이 베트남 중부 지역을 강타하면서 수해와 홍수, 그리고 산사태로 인명과 재산에 많은 손실을 입었습니다. 홍수로 인한 강의 범람으로 집 앞까지 차고 들어오는 물 때문에 밤새 노심초사한 기억이 저희에게도 있습니다.

우기에는 집 안의 모든 의류와 가구들, 심지어 매일 사용하는 나무젓가락까지 곰팡이가 슬고 눅눅해지면서 마음까지 우중충한 시간들을 보내게 됩니다. 그러다 잠깐이라도 햇볕이 나면 옷이며 신발 등을 말리기 위해 집집마다 분주해집니다.

잦은 정전과 황토 섞인 수돗물, 도시임에도 모기와 각종 곤충들로 인해 모기장을 치고 파충류와 함께 살곤 합니다. 또한 동남아 특유의 방음이 안 된 집은 주거지역과 상권이 뒤섞여 있어 이웃의 고성방가가 밤늦게까지 이어지지만 누구 한 사람 항의하지 않습니다.

베트남에서의 선교 활동
가시적인 교회를 세우기 힘든 베트남에서 교육을 통해 젊은이들과 만나고 합법적인 체류를 목적으로 준비하며 비전을 구체화하던 중 후에 외대에서 오랫동안 한국어를 가르치고 계시던 분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작년 3월 그분과 함께 한국어 학원을 개원하였습니다.

어렵게 학원 등록과 운영을 위한 준비를 마치고 개원한 서울 국제학당은 때마침 시작된 코로나로 인해 학생을 모집하는 일도, 수업을 진행하는 일도 어렵게 출발하였습니다.

저희는 학원과는 별개로 이곳에서 사역하는 교회에 소속된 젊은 사역자들 (베트남 신학교 학생)과 선교단체(CCC) 간사들을 지원하는 한편 대학생들에게 개인적으로 한국어와 영어교습을 하면서 관계를 세워가고 있습니다. 학원은 중간에 몇 번의 록다운을 겪으며 작년 11월 22일(토)에 30여 명의 학생들이 2번째 수료식과 함께 한국음식을 함께 나누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요즘에는 CCC 선교단체와 협력하여 후에대학교 약대생 1학년 10여 명과 매주 정기적인 만남을 가져오고 있습니다. 크리스천들이 아닌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원하는 한편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코로나 19로 묶여있는 시간을 활용하여 세종 사이버대 한국어학과에 편입하여 2급 한국어 교사자격증 취득을 위해 2학기째 공부하고 있습니다. 감사하게도 지금까지 저희 부부는 큰 어려움 없이 잘 지내고 있습니다.

한동안 저희를 긴장하게 만들었던 아내 강선교사의 높은 혈압도 약 복용 후 정상으로 돌아왔습니다. 아직 숙면을 취하지 못하는 날들이 간혹 있지만 잘 이겨내고 있습니다. 적지 않은 나이에 다시 낯선 땅에서의 새로운 시작이 결코 쉽지 않지만 이곳에서도 여전히 고백하는 건 주님의 예비하신 손길입니다.

많은 믿음의 사람을 예비해 주셨고 방법을 몰라 망설일 땐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붙여주셨습니다. 지나온 시간은 시시각각 변하는 이 땅에서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사람들을 가까이에서 만나고 경험했던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지난 한 해 누구도 예상하지 못하고 경험해보지 못한 코로나 19 팬데믹과 한 달 넘게 이어진 태풍의 위협과 수해를 함께 견디며 서로를 돌아보고 격려해 온 시간들이기도 합니다. 모두가 저희의 이웃이 되어주었고 특히 교회 식구들이 저희를 자주 찾아와 돌아보아 주셨습니다.

작년 말 주일 전도 집회 후엔 스승의 날을 기념하여 선물을 증정하는 시간에 저희 부부도 불러 주셔서 참 부끄러우면서도 감사한 시간이었습니다. 저희가 베푼 나눔보다 받은 사랑이 넘친 한 해였습니다. 이제는 여러모로 익숙해진 이 땅이 저희의 소망이요 기쁨이 되었습니다.

여전히 비자의 문제와 갈 길이 멀어 보이는 언어 습득의 과정, 그리고 사역의 지혜로운 접근이라는 숙제와 기도 제목을 안고 있지만 이곳 젊은이들을 바라보면 힘이 납니다. 미래의 베트남을 책임질 유능한 젊은이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 삼고 살아갈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젊은이들의 비율이 높은 이 땅, 아직은 소박한 이 땅의 백성들이 우상을 멀리하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나의 구주로 삼는 그 날이 속히 오도록 오늘도 저희는 작은 씨앗을 심으며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