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다니엘 호손의 “큰 바위 얼굴”

바위 얼굴(the Great Stone Face)은 미국 작가인 나다니엘 호손(Nathaniel Hawthorne)이 1850년에 발표한 단편소설이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주인공인 어니스트는 어릴 적부터 마을 저편에 위치한 얼굴 모양의 큰 바위를 바라보며 자라왔다. 그는 어머니로부터 언젠가 이 마을 출신 중에 큰 바위 얼굴을 닮은 위대한 인물이 등장할 것이란 전설을 들었다. 어니스트는 노년에 이르기까지 그 인물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며 살아왔다.

마을 사람들이 큰 바위 얼굴과 닮은 인물이라고 여겼던 첫 번째 인물은 ‘개더골드’(Gathergold: 금을 긁어모으는 사람)였다. 그는 큰 부자였지만, 마차를 타고 가는 중에 구걸하는 거지에게 겨우 동전 몇 잎을 던져줄 뿐이었다. 그 모습을 본 어니스트는 그에게 ‘스캐터 코퍼’(scatter copper: 동전을 뿌리는 자)라는 별명이 더 어울릴 거라 생각했다. 그의 얼굴은 영악하고 탐욕이 가득해 어니스트는 낙심하고 만다.

마을 사람들이 추앙한 두 번째 인물은 ‘올드 블러드 앤 선더’(Old Blood-and-Thunder: 유혈과 폭력의 노인)라는 별명의 장군이었다. 어니스트는 그에게서 강한 의지와 힘은 느꼈지만, 자애로움과 지혜는 찾아볼 수 없음을 깨닫고 예언의 인물이 아니란 생각에 실망한다.

세 번째로 주목받은 인물은 ‘올드 스토니 피즈’(Old Stony Phiz: 돌처럼 차가운 얼굴의 노인)라는 정치가였다. 그는 부자의 재산과 무사의 칼 대신에 오직 한 개의 혀를 가졌을 뿐이지만, 대통령감으로 거론될 정도로 높은 인기를 누렸다. 어니스트는 ‘올드 스토니 피즈’가 대담하고 힘찬 외모를 갖고 있지만, 큰 바위 얼굴의 장엄함이나 위풍, 신과 같은 위대한 사랑의 표정은 없다는 사실에 또다시 실망하고 만다.

어니스트는 설교가(preacher)가 된다. 노년의 그는 어느 시인의 아름다운 시를 접하고 그를 만나보고 싶어 한다. 시인은 큰 바위 얼굴의 웅대한 입으로 읊어도 부끄럽지 않을 만큼 장엄한 송가로 그 바위를 찬양했다.

하지만 어니스트는 그 시인조차도 기다리던 인물이 아니라는 사실에 실망한다. 시인 역시 자신의 삶이 시에 담긴 사상과 일치되어있지 못하다며 자신은 큰 바위 얼굴과 거리가 멀다는 점을 자인한다.
그러던 시인은 어니스트의 설교를 들을 기회를 갖게 된다.

그는 어니스트의 말이 자신의 사상과 일치되어 있어서 힘이 있고, 그의 사상 또한 일상생활과 조화를 이루고 있어서 현실성과 깊이가 있음을 발견한다. 시인이 들은 즉, 어니스트의 말은 단순한 음성이 아니라 생명의 부르짖음이었다.

그때 저 멀리 서쪽으로 기우는 태양의 황금빛 속에 큰 바위 얼굴이 뚜렷하게 드러나 보였다. 그 주위를 둘러싼 흰 구름은 어니스트의 이마를 덮고 있는 백발처럼 보였다. 그 광대하고 자비로운 모습은 온 세상을 감싸 안는 것 같았다. 그 순간, 어니스트의 얼굴은 그가 말하고자 했던 생각에 일치되어, 자비심이 섞인 장엄한 표정을 지었다. 시인은 참을 수 없는 충동으로 팔을 높이 쳐들고 외쳤다.

“보시오! 보시오! 어니스트야말로 저 큰 바위 얼굴과 똑같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어니스트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 시인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았다. 예언은 실현되었다.

그러나 말을 다 한 어니스트는 시인의 팔을 잡고 천천히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아직도 자기보다 더 현명하고 훌륭한 사람이 큰 바위 얼굴과 같은 용모를 가지고 나타나기를 마음속으로 기원하는 것이었다.

묵상과 교훈
이 작품엔 마을 사람들이 큰 바위 얼굴을 닮았다고 칭송하는 세 명이 등장한다. 부자 개더골드, 장군 올드 블러드 앤 선더, 정치인 올드 스토니 피즈가 그들이다. 그러나 어니스트는 그들 모두에게서 실망하고 만다. 어니스트는 네 번째로 시인을 주목했지만 그 역시 아니었다. 결국 어니스트는 큰 바위 얼굴을 닮은 예언의 인물을 만나지 못한다.

어니스트는 그들의 외모가 큰 바위 얼굴을 닮지 않아 실망한 것이 아니었다. 어니스트가 실망한 것은 그들의 내면이었다. 부자에게선 탐욕을 보았고, 장군에겐 지혜와 자비가 결여되었으며, 정치인에게선 사랑이 느껴지지 않았다. 시인의 경우는 어떤가? 그는 시의 사상을 일상생활로 살아내지 못했다.

이 작품의 주제는 겉이 아닌 속, 즉 인간의 내면을 향해 있다. 마태복음 12:35의 교훈이 이와 맞닿아 있다.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그렇다면 어니스트가 큰 바위 얼굴의 형상 속에서 찾고자 했던 것은 무엇인가? 성경의 언어로 풀어볼 때, 어니스트는 큰 바위 얼굴을 보면서 하나님의 형상을 대망한 것이다. 그리고 그 간절한 소망은 어느새 어니스트 자신의 성품이 되어 스스로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도록 이끌고 갔다.

우린 어니스트의 모습에서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본다. 곧 그리스도인들이 맺어야할 성품의 열매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라디아서 5:22-23)

이제 이 작품에 성령의 열매를 적용해보자. 어니스트는 왜 부자 ‘개더골드’에게 실망했을까? 그는 탐욕스러워 <절제>를 잃었다. ‘올드 블러드 앤 선더’ 장군에게선 <자비>와 <화평>을 느낄 수 없었고, 정치인 ‘올드 스토니 피즈’에게선 <사랑>을 발견할 수 없었다. 시인의 경우, 사상을 삶으로 행치 않아 <양선>과 <기쁨>이 부족했다.

필시 위의 절제, 자비, 화평, 사랑, 양선, 기쁨과 같은 성품들은 이미 어니스트 자신의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기에 부자, 장군, 정치인, 시인을 볼 때, 어니스트는 그들의 결핍을 즉시 인지할 수 있었다. 이에 더하여 어니스트는 오랜 세월 큰 바위 얼굴을 기다리는 가운데 <오래 참음> <충성> <온유>의 성품을 키워왔다.

특별히 어니스트는 자신이 큰 바위 얼굴로 지목되는 상황에서도 여전히 다른 누군가를 기다리는 겸손을 보여주었다. 예수님이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신 마태복음 11:29 말씀을 연상케 하는 대목이다.

이처럼 소설예배의 관점으로 보면, 큰 바위 얼굴은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로 풀이되는 예수의 성품을 가리키고 있다. 이런 까닭에 우린 이 작품을 통해 로마서 8:29의 말씀을 더욱 실감나게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예수님을 닮는 것. 그것은 그리스도인이 일생에 걸쳐 품고 살아야 할 가장 소중한 꿈이다. 그 꿈을 어떻게 해야 이룰 수 있을까? 나다니엘 호손의 ‘큰 바위 얼굴’을 읽은 독자라면 그 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오직 예수만 바라보자! 우리의 시선이 주님을 떠나지 않고 늘 그분께 향해 있을 때, 우리 또한 큰 바위 얼굴을 닮은 어니스트처럼 예수의 형상을 닮아가게 될 것이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브리서 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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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곤
연세대정외과 졸업, 코람데오 신대원 평신도지도자 과정 수료하고 네이버 블로그 소설 예배를 운영하며, 예수 그리스도 외에 그 어떤 조건도 구원에 덧붙여져선 안된다는 메시지를 어른이 읽는 동화의 형식에 담아 연재해 나갈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