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은 커피’

“어떤 커피가 맛있는 커피에요?”
“남기지 않고 다 마시는 커피가 맛있는 커피에요.”

김해에서 만난 바리스타에게 느닷없이 던진 질문에 느닷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커피를 사랑하다 보니 너무 심오하게 바라봤던 것일까? 어떤 품종의 원두를 몇 도에 볶아 이 방식으로 추출한 뒤 저 방식으로 마셔야 한다는 식의, 좀 더 그럴듯한 전문가적 식견을 기대했었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너무 단순한 답이 돌아왔다. 남기지 않고 마시는 커피가 맛있는 커피라니. 내가 너무 무례하게 질문을 했나 싶어 눈치를 슬쩍 보던 순간, 긴장을 풀어주는 미소와 함께 그의 설명이 이어졌다.

“보통 커피는 매우 뜨겁게 나오거나 차갑게 나오는데 그 때는 맛을 가늠 할 수가 없습니다. 온도가 식어야 진짜 맛을 알 수 있죠. 우리는 보통 누군가를 만나 교제하기 위해 카페를 찾곤 하는데 지인과 대화를 나누는 동안 뜨거웠던 커피는 식고 차가웠던 커피는 미지근해 져요. 그렇게 미온이 되었을 때 진짜 맛이 드러나죠. 그 때 맛없는 커피는 자연스레 남기게 되고 맛있는 커피는 다 마시게 되는 거예요. 그런 관점에서 봤을 때 한 잔을 남기지 않고 다 마시게 하는 커피, 저는 그런 커피가 맛있는 커피라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대화를 나누다 보면 갈증이 날 텐데, 갈증 나는 상황 속에서도 남겼다면 그건 정말 맛없는 커피 아니겠어요? 물론 배가 부르거나 속이 안 좋은 등의 예외 상황은 제외하고요.”

듣고 보니 명쾌한 답이었다. 단순한 답이 아니라 명쾌한 답인 것이다. 손님은 쉽게 말로 표현하지 않는다. 커피가 맛있는지 맛없는지, 음식이 맛있는지 맛 없는지. 다만 행동 할 뿐이다. 생각해보니 나도 그런 적이 있다.

아침 일찍 오클랜드 시티에 나갈 일이 있어 커피 한 잔을 주문 한 후, 운전하며 한 두 모금만 마시다 깜빡 차에 두고 내린 적이 있었다. 볼일을 마친 후 오후에 차로 돌아왔을 때 두고 내린 커피가 눈에 들어왔다. 차갑게 식어 있던 그 커피. 마실까 말까를 고민하다 속는 셈 치고 한 모금 넘겼는데 왜인걸? 식은 커피가 이토록 맛있을 줄이야! 1번 국도(Motorway)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 그 커피를 다 마셨던 기억이 난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탈탈 털어가며.

또 이와는 반대로 아주 유명한 커피 전문점을 일부러 찾아간 적이 있었다. 유명하다 기에 기대에 부풀어 대형 사이즈를 주문했는데 이번에도 한 두 모금만 마시고 깜빡 차에 두고 내렸다. 한 참 뒤에 돌아오니 역시나 식어있던 그 커피. 한 모금 마셔보았다. 그런데 목 넘김이 불편했다. 뭔가 자연스럽게 넘어가지 않아 몇 모금 마시지도 못하고 대부분을 남기고 말았다. 커피는 며칠간 차에 혼자 버려진 채 둔탁하게 변색되어 있었다. 나쁜 주인 같으니…

글 쓰는 작가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책에서도 비슷한 지점이 존재했다. 대부분의 책은 초반부에 가독성(Readability)이 좋다. 작가들이 처음에는 의욕적으로 글을 써 내려가기 때문이다. 아이디어들도 넘치고 다채로운 예화로 가득하다. 커피로 치면 뜨겁거나 차갑거나 하며 열정이 넘치는 상태이다.

하지만 중반을 넘어 4분의 3지점 즈음 가다 보면 가독성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글에 힘이 없고 예화도 빈약하며 리듬감도 떨어진다. 작가의 글쓰기 체력이 바닥나는 지점이기 때문이다. 그 지점에 가서야 작가의 필력이 드러난다. 그리고 그 지점의 필력이 좋은 책이냐 아니냐를 결정짓는다.

좋은 책도 커피와 같이 필력이 드러나는 지점에서 가독성이 좋은 책. 열정의 온도가 식은 후반부에서도 재미있게 읽히는 책. 그래서 기꺼이 완독할 수 있게 해주는 책.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나는 그런 책이 좋은 책이 아닌가 싶다.

신앙의 여정에도 그런 지점이 존재한다. 아니 더 정확히 표현하면 지금 내 신앙이 그 지점의 연장선을 통과하고 있는 것 같다. 5년전, 10여년 간 몸담고 있던 선교 단체(YWAM)를 떠나 전업 작가(Full-time Artist)의 길에 들어섰다.

갑작스레 입문한 전업 작가의 길. 예술가의 길이 배고픈 길이라고 익히 들었건만, 막상 예술가로 살려니 문제는 배고픔이 아니었다. 가장 큰 문제는 배고픔보다는 나를 소개할 만한‘직책’이나‘소속’이 없다는 것이었다.

물론 십 여 년을 몸 담았던 선교 단체가 딱히 나에게 해준 것은 없었다. 월급도 없는 자비량 선교사의 길, 단체로부터 뭔가를 받고 있다고 생각해 본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저 헌신하는 마음으로 일하노라 착각했다. 하지만 단체를 벗어나니 나는‘아무도(Nobody)’아니고 그냥 자연인일 뿐이었다.‘어떤 단체 무슨 사역 팀의 리더’라는 직함에 나도 모르게 의존하고 있었던 것이다.

진짜 맛이 드러나기 시작했다.‘나는 도대체 누구인가? 내가 외치던‘제자의 삶’이 자연인인 내 일상에서는 왜 안 드러나는가? 단체와 사역에서 묻어 나오던 내 영성은 공동체의 것이었나?’아무도 아닌 나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막상 공동체와 직분을 벗어나니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과 나 사이에 본질적으로 아무 차이가 없었다. 혼자일 때의 나는 그리스도의 맛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그저 남겨진 커피일 뿐이었다.

긴 방황이 지쳐갈 때 즈음 하나님이 깨달음을 주시기 시작했다.‘영성이란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선물이다. 네가 잘해서 얻은 것이 아니다. 네가 헌신한다고 생각했을지 몰라도 너는 오히려 보호 받고 있었다. 선교라는 이름아래 행하던 모든 일들이 너를 위한 기회였고 네 주변의 동료들이 네게 주어진 은혜였다.’

비로소 눈을 들어 창조주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나를 만드신 그분을. 하나님은 선교 단체 간사인‘나’를 만드신 것도, 사역 리더인‘나’를 만드신 것도 아니었다. 자녀인‘나’를 만드신 것이다.‘그래. 이게 진짜 내 모습이지. 아무것도 아닌 지금의 나…’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자‘일꾼’이 아닌‘자녀’로 다시 나아가기 시작했다.

지금의 나는 그리스도의 맛이 나는 커피가 된 것일까? 모르겠다. 결론 짓기에는 너무 이르다. 그저 여전히‘추출 중(Brewing)’이라고 말하고 싶다. 내 연약함을 인정하고 지면으로 여러분과 나눌 수 있는 정도?

그나마 다행이라 생각한다. 진짜 커피는 한 번 추출로 끝나지만 인생에는 여러 번의 기회가 있으니. 무엇보다 최고의 바리스타가 계시지 않은가? 나 같은 수준의 원두도 그 분의 손길을 거치면 좋은 커피가 될 수 있으리(우리 삶의 유일한 희망이다). 온도가 식었을 때도 그리스도의 맛이 나는 스페셜티(Special Tea)로…

그렇게 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뭘까? 실상 많지는 않은 것 같다. 지금처럼 자녀로서 아버지에게 온전히 기대고 있는 것? 언젠가 내 인생 한 잔이 다 비워질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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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용욱
단국대학교 시각디자인과 졸업. 기독교 출판작가, 예술선교사로 활동하고 있으며 가장 좋아하는 두 가지,‘커피’와‘예수님’으로 기독교적 사색을 담은 글을 연재하고 있다. 글쓰기를 배운 적도, 신학 학위를 받은 적도 없는데 12년 째 신앙서적 내고 있는 이상한 평신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