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은 일본의 엔도 슈사쿠((遠藤周作)가 1966년에 발표한 소설로 실화를 바탕으로 쓰여졌다. 제목과는 달리 이 작품의 주제가 하나님의 침묵은 아니다. 오히려 작가는 한 대담에서 하나님이 말씀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어 ‘침묵’을 썼노라고 밝혔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포르투갈의 예수회에서 일본으로 파견했던 선교사 페레이라(Ferreira) 신부가 배교했다는 충격적인 보고가 로마 교황청에 날아든다. 페레이라 신부의 제자였던 로드리고(Rodrigo)와 가르페(Garrpe) 신부가 도저히 믿기지 않는 이 소식을 직접 확인코자 출발했다. 경유지인 마카오에서 일본인 키치지로의 안내를 받아 일본으로 잠입했다. 이들은 일본 가톨릭 신도가 겪는 고난과 박해의 현장을 목격하고, 이에 대해 하나님은 왜 침묵하고 계시는지 치열하게 질문한다.
가르페 신부는 일본 관리에 붙잡힌 후 후미에(踏み絵: 널쪽)를 강요받는다. 후미에는 도쿠가와 시대에 기독교 신자를 색출하기 위해 예수나 마리아상이 그려진 널쪽을 밟게 했던 일을 일컫는다. 가르페 신부는 후미에를 거부하다가 자신 때문에 배에서 던져져 바다에 수장당하는 신도들을 향해 헤엄쳐가다 그도 물에 잠겨 순교하였다.
로드리고 신부는 교활한 키치지로의 밀고로 일본 관리에게 붙잡힌 후, 박해자 이노우에로부터 끈질기게 배교를 회유 받는다. 로드리고는 신도들이 악명 높은 구멍 매달기 고문(거꾸로 매단 뒤 귀 뒤쪽에 구멍을 뚫어 조금씩 핏방울을 흘리게 함으로써 서서히 죽게 만드는 고문)에 고통받는 장면을 본다. 이노우에는 로드리고가 후미에를 행하면 저들을 살려주겠다고 말한다.
로드리고는 이노우에가 최종적인 회유를 위해 불러온 페레이라 신부를 만난다. 페레이라는 자신의 배교를 인정하면서도, 그건 후미에를 하지 않을 경우 죽임을 당할 신도들을 구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주장한다.
로드리고 신부는 순교와 배교의 마지막 갈림길에 선다. 극심한 갈등 속에 빠진 로드리고에게 성화 속의 예수가 말했다. “밟아라, 성화를 밟아라. 나는 너희에게 밟히기 위해 존재하느니라. 밟는 너의 발이 아플 것이니 그 아픔만으로 충분하느니라.”
로드리고 역시 성화를 밟는 후미에의 길을 선택한다. 그 후 배교하여 절망하는 로드리고에게 키치지로가 다시 찾아온다. 그는 천국을 못 갈까 봐 두려워하며 고해성사를 받아달라고 부탁한다. 로드리고는 비록 배교하여 신부의 자격을 상실했지만, 키치지로의 간절한 요청에 못 이겨 그에게 고해성사의 기회를 준다.
그는 생각한다. ‘나는 그들(로마 교황청)을 배반했을지 모르나 결코 그분(예수)을 배반하지는 않았다. 지금까지와는 아주 다른 형태로 그분을 사랑하고 있다’ 그리고 작가는 마지막의 두 문장을 소설의 결론으로 제시한다. ‘그분은 침묵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설령 그분이 침묵하고 있었다고 할지라도 나(로드리고)의 지금까지의 인생이 그분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이 소설에서 악역을 담당한 키치지로는 독자에게 분노, 연민, 짜증 등의 복합적인 감정을 던져준다. 자칭 가톨릭 신도라면서도, 성화를 밟으라면 망설임 없이 밟고 침을 뱉으라 해도 주저 없이 침을 뱉는다. 그는 스스로의 믿음이 연약해 고난을 견뎌낼 수 없을 뿐이라고 읍소한다. 자기도 좋은 시절에 신도가 되었다면 끝까지 믿음을 지켰을 것이라고 항변한다.
나는 어떤가. 키치지로의 모습을 보며 문득 나의 심령 한 구석을 들킨 것만 같아 움찔했었다. 혹시 내 믿음이란 것이 좋은 시절에만 작동하는 그런 신앙이진 않을까? 과연 나는 기꺼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골로새서1: 24)을 내 육체에 채우려 하는 예수의 제자임에 틀림없는가? 그런 질문을 자신에게 던져보게 되었다.
소설 ‘침묵’은 우리에게 놀라운 사실 하나를 고발한다. 그것은 사람이 그릇된 신앙으로도 순교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당시 일본 가톨릭 신도들의 신앙은 참된 기독교 신앙이라고 부르기 힘든 모습이었다. 로드리고를 회유하기 위해 찾아왔던 페레이라 신부는 일본 신도가 믿는 하나님은 기독교의 하나님이 아니라고 단정했다. 그는 이를 거미줄에 걸린 나비에 비유하여 설명했다. 겉모습만 나비일 뿐 실체를 잃어버린 죽은 나비처럼, 선교사들이 전한 하나님은 일본인들의 마음에서 껍데기만 남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대체 뭘 위해 순교했는가? 결론부터 말하면 그건 예수를 위한, 예수로 인한 순교가 아니었다. 당시 대부분 극심한 빈농이었던 일본의 기독교 신도들로선 매일매일의 생활 자체가 지옥이었다. 어떤 이에겐 순교가 차라리 지옥을 벗어나는 길로 여겨지기도 했다.
그들은 무엇보다 생전 처음으로 사람 대접해주는 신부들이 좋았다. 그들의 신앙은 매우 인간적인 것이었다. 혼합종교의 양상도 띠었다. 가톨릭에다 불교를 섞고 미신도 덧붙였다. 그래서 한 때 20만명 또는 40만명에 달했던 일본의 신도를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를 수 없다는 것이 페레이라 신부의 주장이었다.
이 소설은 그런 신앙의 굴절 속에서 로드리고 신부가 맞닥뜨린 갈등을 통해 신앙의 참모습을 찾아간다. 겉으로 드러난 로드리고의 갈등은 가톨릭적 배교 여부였지만, 더 깊이 들어가면 우상적 신앙과 참된 신앙 간의 갈등이 내재되어 있다.
우선 가톨릭적 관점을 살펴보면, 페레이라와 로드리고가 성화를 밟은 행위는 명백한 배교에 해당된다. 비록 판자 위에 그린 예수 그림일지라도 성화를 밟는 것은 곧 예수를 밟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의 관점에서 본다면 얘기가 달라지게 된다. 출애굽기20: 4(십계명 중 둘째 계명)은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라고 말씀한다. 성화는 단지 우상일 뿐이다. 성경은 무엇보다 성화란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믿음의 본질면에서, 배교의 문제는 성화를 밟았느냐 아니냐에 달려있지 않다. 어떤 행위를 하든 그가 예수 안에 있느냐는 믿음의 진정성이 본질이다. 로드리고는 “성화를 밟아라”고 말씀하시는 예수 안에 있었다. 성화를 밟아서라도 그가 구해야 했던 이웃들은 예수께서 죽기까지 사랑했던 그분의 백성들이었다.
로드리고 신부의 마지막 고백이 가슴을 울린다. ‘나는 그들(로마 교황청)을 배반했을지 모르나 결코 그분(예수)을 배반하지는 않았다.’ 가톨릭 사제가 쉽게 품을 수 있는 신앙고백이 아닌 탓에 그에게 감사하단 생각까지 들었다. 그러나, 후미에 이후 로드리고의 행적은 독자에게 개운치 않은 뒷맛을 남긴다. 페레이라처럼 처와 자식 등 일본인 가족을 선사 받고 일본조정에 협력하는 꽃 길 행보를 걸었던 것이다.
차라리 후미에 이후, 페레이라와 로드리고가 일본 기독교의 나비를 옭아맨 거미줄을 걷어내고 예수 신앙을 위해 목숨을 걸었다면, 그들의 행적은 곧 사도행전 28장에 이은 29장의 선교역사가 되지 않았을까. 두 선교사의 신세가 마치 짠 맛을 잃은 소금(마태복음5: 13)으로 전락한 것만 같아 안타까움을 느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침묵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는 로드리고의 증언은 여전히 귀하다. 단언컨대, 하나님은 지금도 말씀하고 계신다. 후미에의 현장에서 ‘성화를 밟아라’고 말씀하시며 십자가 신앙의 본질을 일깨워주신 예수의 음성이 오늘날 복음을 외치는 우리 모두의 함성으로 일본땅에 그리고 온 세계에 울려 퍼지게 되길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