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첫째 주 찬송/424장(통일216) 아버지여 나의 맘을
언제나 드러냄 만이/ 언제나 소리냄 만이/ 하나님께 대한 참된 기도인 줄 알았습니다/ 고난에 대한 간구와/ 병에 대한 고백만이/ 때론 하나님께 드리는/ 참 제사인 줄 알았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영혼의 끝보다는 시작을/ 알고 싶었습니다/ 정적속에 몰입된/ 심연의 묵도를/ 하나님께 올리게 되었습니다/ 영혼의 시작을 알게 해 달라고…”(장시하의 ‘심연의 묵도’)
소리를 내지 않고 마음속으로 드리는 기도, 더욱이 새벽의 묵도는 시인의 시구에서처럼 어느 드러냄보다도, 어느 소리 냄 보다도 하나님과의 깊은 대화를 가지게 합니다. 흙탕물이 고요 속에 점차 가라앉듯이 우리 안에 분주함이 가라앉아 집중하게 되어, 드디어는 하나님을 뵙는 관상의 경지에까지 이를 수 있을 것입니다.
새벽기도회에서 묵상적 기도분위기를 위해선 찬송의 선곡도 큰 몫을 합니다. 묵상기도로 이름난 테제공동체에서 부르는 노래를 바탕으로 새벽기도회의 찬송 선곡기준을 만들어 보았습니다.
① 고요하고 정적인 곡일 것. ② 선율적인 곡일 것. ③ 길지 않은 곡일 것. ④ 단순한 화성의 곡일 것.(박자마다 화성이 자주 바뀌는 곡보다는) ⑤ 음역이 넓지 않은 곡일 것.
‘주 달려 죽은 십자가’(147), ‘비둘기 같이 온유한’(187), ‘하나님 사랑은’(299장), ‘내 주 되신 주를 참 사랑하고’(315장), ‘너 성결키 위해’(420장), ‘아버지여 나의 맘을’(424장),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425장), ‘신자 되기 원합니다’(463장) 같은 곡들이 좋은 예입니다.
새벽엔 찬송을 원래의 조성보다 낮추어 나지막한 소리로 부르는 것이 좋습니다. 반주는 볼륨이 큰 오르간이나 피아노 보다는 쳄발로 같은 조용한 음색의 악기가 좋은데, 오히려 무반주가 더 낳을 수 있습니다. 이렇듯 인도자도 공간 음향을 살펴 마이크 사용을 절제하여 사용할 때 묵상분위기를 더합니다.
작자미상의 찬송 시 ‘아버지여 나의 맘을’은 1849년 미국에서 출판된 ‘서부 보스턴 유일교도 찬송집’(West Boston Unitarian Collection)에 보스턴의 음악교사인 우드버리(Isaac Baker Woodbury, 1819-1858)가 작곡한 DORRNANCE에 붙여져 발표되었습니다. 우드버리는 1845년 그가 편집한 ‘성가집’(The Choral)에 다른 시에 곡을 붙여 발표하였었는데, 그 때의 곡명은 CHESTER 였죠.
이 찬송은 우리나라에서 오랫동안 첫 송영으로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예전엔 거의 모든 교회예배가 묵도로 시작하였기에, 6도 이내의 좁은 음역과 단순한 화성의 묵상분위기가 소위 묵도송으로 적격이지 않았겠나 생각됩니다.
밀러(F.S.Miller, 1866-1937) 선교사가 ‘찬셩시’(1898)에 실은 최초의 번역가사는 “아버지여 나의 맘을 맡아 다스리시고”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다스리시는데 나 어떻게 완악할까. 나 어떻게 교만할까. 몇 번이고 고요히 반복하여 부르노라면 우리 맘에 주님의 숨결이 느껴집니다.
6월 둘째 주 찬송/565장 예수께로 가면
어린이 합창단을 지휘할 때입니다. 오디션을 보는데 초등학교 5학년 어린이가 가곡을 부르겠답니다. 그것도 ‘수선화’와 ‘그리워’같은 뻑적지근한 대곡들로.
성악가들처럼 열창하는 아이의 엄마는 꽤 자랑스레 여기며 노래 반주를 했습니다. 동요를 불러보라니 아는 동요가 한 곡도 없답니다. 생각 같아선 뽑기 싫었지만 교육적인 차원에서 아이에게 동심을 심어주고 싶어 선발하였습니다.
그런데 아이어른인 그 어린이는 같은 또래들과는 어울리길 꺼렸고, 나는 엄마에게 어린 시절을 빼앗긴 불행한 아이어른을 측은이 여기며 가르쳐야만 했습니다.
“꽃가지에 내리는 가는 빗소리/ 가만히 귀 기울이고 들어 보셔요/ 너희들도 이 꽃처럼 맘이 고와라/ 너희들도 이 꽃처럼 맘이 고와라”(이태선 시) “담 밑의 봉숭아 어여쁜 봉숭아/ 그 누가 날마다 키우시나/ 하늘에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언제나 쉬지 않고 키우신다”(최봉춘 시)
“샛별 같은 두 눈을 사르르 감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노라면/ 우리 주님 마음에 대답하는 말/ 아이야 나는 너를 사랑하노라”(이태선 시)
지금도 이 노래를 부르노라면 동요를 부르며 자라던 어린 시절이 그리워집니다. 그런데 요즈음 이 노래를 들을 수 있을까요? 혹 유치부 어린이들에게서나 가능할는지요.
어린이교회동요 중에 “돈으로도 못가요 하나님 나라”란 노래가 있었습니다. 이 노래엔 “힘으로도 못가요” “벼슬로도 못가요” “지식으로 못가요”라고 노래합니다. 그렇습니다. 노래가사처럼 하늘나라는 “거듭나면 가는 나라/ 믿음으로 가는 나라”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봅시다. 어린이의 세계완 너무 거리가 멀지 않습니까. 어린이가 벌써 무슨 돈을 안다고.
이건 신학(神學)입니다. 어린이에게 신학을 가르치기엔 아직 이릅니다. 노래 3절에선 어여뻐도 못 간답니다. 맘 착해도 못 간답니다. 앞서 노래에선 꽃처럼 맘이 고와라하지 않았던가요. 시는 시요, 노래는 노래입니다.
무얼 계몽하려하고 가르치려 하면 동요가 아닙니다. CM송이 예술이 아니듯이.
교회에 어린이답지 않은 분주한 노래들이 쓰나미처럼 몰려들던 80년대 말, 나는 낙담하며 십 수 년 즐겨 곡을 짓던 연필을 꺾었습니다.
시를 지은이나 작곡한 이가 알려지지 않은 곡명 IF I GO TO JESUS는 미국에서 ‘장로교 찬양집’(Presbyterian Book of Praise)에 실린 것을 우리나라에서 1905년 ‘찬셩시’에 처음 소개되었습니다.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배위량 부인(Annie A.Baird, 1864-1916)이 번역한 처음엔 “예수께로 가면 기쁘리로다 걱정근심대신 재미 많도다”라 되어있습니다. “예수께로 가면 나는 기뻐요”(If I Come to Jesus, He will make me glad)라 고친 지금의 번역도 나쁘지 않지만 재미란 말이 더 어린이답습니다. 어린이들이 즐겨 쓰는 “참 재미있다”란 말을 살려 표현하면 어떨지요.
우리 찬송에선 빠진 원래 4절엔 “영화로운 곳에 있는 동무들 고운 옷을 입고 주를 섬기네”라 되어있습니다. 선교초기, 남루한 옷을 입고 지낸 가난하던 시절 예쁜 옷을 입은 하늘나라 어린이들을 보여주는 것이 특이합니다.